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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426)화 (426/500)

426화. 열여덟의 겨울(3)

화장실에 들렸다가 나오던 길.

겸사겸사 뒤늦게 내가 지하 길드를 제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놀라서 연락한 윤사해를 달래던 참이었다.

“아빠, 잠시만.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뭐? 리사, 잠깐……!

뚝, 전화를 끊은 후 달갑지 않은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왜 찾아온 거야?”

인사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날 선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곧장 그림자를 움직여 나를 제압하려고 들 줄 알았는데, 의외네.”

“저세상.”

나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원수였으니.

험상궂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닥치고 찾아온 목적이나 말해.”

저세상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나와?”

“그러게.”

그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릴 적에는 보기만 해도 밉고 싫던 얼굴인데, 이제는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오다니. 나도 참 이상하지?”

질문에 대한 어떠한 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내가 침묵할 줄 알았는지 저제상이 혼잣말을 이어갔다.

“윤리사, 너는 알지? 내 이야기가 스무 살에 이미 시작됐다는 걸.”

알고 있다.

스무 살, 저세상은 술에 취해 죽을 생각으로 들어갔던 던전에서 우연히 각성했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수도 없이 많은 인물이 죽어 나간 『각성, 그 후』가.

“벌써 1년이네.”

“그러게.”

이번에 답한 사람은 나였다.

“네가 우리 가족을 그딴 식으로 만든 후, 유랑단에 붙은 지도 벌써 1년이네.”

시간 참 빠르게 흐른다 싶어졌다.

저세상이 내 말에 씁쓸하게 웃고는 말했다.

“내가 원망스러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당장 그림자를 움직여 저 망할 새끼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알았다.

내 앞의 저세상은 어떠한 스킬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것을.

그 때문에 공격하지 않았다.

공격해 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기에.

설사, 내 눈 앞의 저세상이 ‘진짜’라고 해도 공격하지 않았을 거다.

그랬다가는 간만에 친구들과 나온 외출이 엉망이 될 테니까.

그런 건 원하지 않았다.

“저세상, 나는 네가 원망스러워.”

“그래, 마음껏 원망해.”

저세상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나는 네가 처단할 악이니까.”

악(惡).

그건 저세상의 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적’을 저세상이 자처했다.

“도대체…….”

묻고 싶다.

아니, 그냥 두 눈 꼭 감고 묻기로 했다.

“대체 네 목적이 뭐야?”

저세상이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네 행복.”

“개소리하지마.”

날선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갔다.

“내 행복을 원하면 이딴 식으로 하면 안 돼.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예상치 못한 답인 걸까?

저세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 앞에 있는 그가 허상이 아닌 실체라면 한 대 때려 주는 건데!

“윤리사, 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해. 정말로.”

“스무 살 처먹은 새끼가 못 하는 말이 없네. 너 아청법으로 잡혀 가.”

“아청법?”

오, 이런. 이 세상에는 아청법이 없나 보다.

어쨌든.

“나는 아저씨는 사절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 취향은 연상이라서.”

도대체 저세상과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데.

그런데 왜일까?

가슴 한구석에서 울컥 영문 모를 감정이 치미는 건.

“윤리사, 내 말 기억하지?”

저세상이 느닷없이 질문을 던져 온 건 그때였다.

그에 비웃으며 답해 줬다.

“내가 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말?”

저세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아저씨와 리오 형, 그리고 리타 형. 백도윤과 한단예, 한단이와 한단아. 백시진 삼촌과 백시준 삼촌, 운조 누나와 해진이 누나. 해솔이 형이랑 화홍이 형…….”

저세상의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이름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잠깐.”

그 입을 멈춰 세운 후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저세상이 나열한 이름들은 모두 그와 인연이 끊어진 사람들이다.

다름 아닌, 저세상.

그가 직접 끊어 버린 인연이란 거다. 그런데, 왜. 왜 이제 와서 그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걸까?

저세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내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사람들 모두 데리고 아주 멀리 떠나 줄 수 있어?”

난데없는 부탁에 기가 차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그러지 않으면 그들 중 한 명은 분명 죽을 테니까.”

“뭐……?”

허망한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런 내게 저세상이 중얼거렸다.

“자신감이 없어졌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왜 자신감이 없어졌다는 건지, 그 이유가 앞으로 저세상이 일으킬 어떤 사건 때문인지.

그런 거라면 왜 그런 사건을 일으키려고 하는 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저세상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네가 쌓은 인연이 이야기가 끝을 맺을 때까지 안전할 거란 자신감이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글쎄, 말한다고 네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저세상의 얼굴은 꽤, 아니. 무척이나 서글퍼 보였다. 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말했다.

“궁금하면 장천의를 찾아가서 한 번 물어봐. 너라면 분명 그 자식을 찾을 수 있을거야. 아니, 분명히 너는 찾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저세상의 모습이 흐려졌다.

“저세상!”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잡히는 건 없었다.

투명하게 변한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한 내 손에, 저세상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윤리사, 다음에 만날 때는 손이 아닌 다른 걸 뻗어야 할 거야.”

그림자.

내가 가진 무기.

“내가 해 줄 말은 이게 끝이야. 그럼, 안녕.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저세상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그러고는 애틋하게 나를 쳐다봤다.

그것으로 끝.

저세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

“경고장을 날리는 것 치고는 너무 싱겁군요.”

저세상에게 스킬을 걸어 준 여인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혹 도깨비의 따님에게 마음이 있으신건가요?”

“내 취향은 연하가 아닌 연상이야. 들었을 텐데?”

“정신 연령을 생각해 보면 도깨비의 따님 쪽이 훨씬 더 연상이라 말씀을 드린 거랍니다.”

“닥쳐, 부네.”

저세상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여자의 입을 다물게 했다.

“내가 당장에라도 너를 죽일 수 있는 걸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건, 부네. 그녀가 수장과 함께 일으킬 일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다.

성큼, 부네에게 다가선 저세상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너랑 그토록 죽이 잘 맞던 백정 새끼는 진작 죽어 새로운 놈으로 교체됐잖아?”

부네가 살짝 얼굴을 굳혔다.

“두 분 다 그만.”

둘 사이에 누군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이매.

그가 부네를 향해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네 씨, 백정 씨가 찾아요.”

“……알겠어요.”

부네가 한 박자 늦게 답하고는 휙 몸을 돌렸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이매가 말했다.

“저세상 씨는.”

“찾는 사람 아무도 없는 거 알아.”

수장은 지금 각시를 이용해 때를 맞추고 있는지라 바빴다.

수장을 제외하고서 그를 찾을 사람은 유랑단 내에 아무도 없었고.

그러니까 지금, 이매는.

“쓸데없이 끼어들었어.”

“저세상 씨가 부네 씨를 죽일 것 같아서요. 부네 씨가 달려들었으면 정말 죽였을 거잖아요? 안 그래도 지금 새로운 ‘할미’를 찾고 있느라 힘든데, 그건 곤란하답니다.”

이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저세상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다 휙 몸을 돌렸다.

그런 그에게 이매가 말을 걸었다.

“초랭이 씨와 선비 씨.”

유랑단을 탈주한 두 탈을 언급하며 이매가 말했다.

“수장님께서 두 분을 곧 처분할 건가 봐요.”

그러고선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 초랭이 씨는 수장님께 심장을 바쳤으니 쉽게 처리되겠지만, 선비 씨는 잘 모르겠네요. 잘못하면 제가 나서야 할지도?”

“너는 선비와 꽤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맞아요.”

이매가 순순히 인정하고는 웃었다.

“놀리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십수년 전에 양반 씨가 그렇게 죽어 버려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저세상이 얼굴을 찌푸렸다.

“양반 씨도 건드리는 재미가 무척 많이 있었거든요. 이전 각시님을 가지고 놀리면 얼마나 발작하던지.”

십 수년 전의 ‘양반’과 이전 ‘각시’ 모두 윤리사와 인연이 있던 탈들.

더욱이.

“초랭이와 선비.”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세상이 담담하게 물었다.

“두 사람을 이제 와서 처분하려는 이유는?”

“그야, 간단하죠. 저세상 씨께서 우리 수장님과 함께 꾸미고 있는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죠. 배신자는 미리 처단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맞는 말이었다.

초랭이도 선비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방해였다.

사실, 가장 큰 방해는 따로 있었지마는…….

‘안 돼.’

그 존재는 죽이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형!’

자신이 암만 밀어내도 다가오던 망할 꼬마의 아버지니까.

아저씨의 하나 남은 친구니까.

하지만 그가 지닌 스킬을 생각하면 죽여서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짝짝!

가벼운 박수 소리에 저세상이 놀라 앞을 봤다.

이매가 그의 앞에서 싱글벙글 웃는 낯을 보이고 있었다.

“저세상 씨?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꺼지든 말든 네 알아서 해.”

저세상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몸을 돌렸다.

유랑단의 수장과 저세상. 그들이 벌일 일은 하나였다.

이 세상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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