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친구들(3)
“마음만 받을게.”
“리사.”
“정말 미안해.”
서글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단예, 네가.”
그리고.
“단이, 너도.”
단예에 이어 단이를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토해 냈다.
“두 사람이 나를 돕다가 다친다면, 난 정말 버틸 수 없게 될 거야.”
나의 말에 단예와 단이는 아무 반응 없이 조용했다.
단아 역시 마찬가지.
한태극과 한창 싸우고 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태극도 그러고 있었다.
부담스럽게 저 할아버지는 왜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담?
어쨌거나, 나는.
“크흠!”
헛기침을 두어 번 터트리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보다 배고프지 않아? 나는 배고픈데!”
단예와 단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그래.”
결국 두 사람은 나와 이 주제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을 그만뒀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가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일 거다.
두 사람은 똑똑하니까.
“야! 한단예, 한단이! 이대로 끝이야? 윤리사한테 더 말 안 해?”
단아는 아니었지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단아를 향해 단예가 부드럽게 말했다.
“셋째야, 앉으렴. 식사 예절을 그새 잊은 모양이구나.”
단예의 말에 단아의 얼굴이 금새 붉어졌다.
단아는 단예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얼굴을 보이다가.
“쳇!”
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럼, 다들 먹자꾸나.”
한태극이 숟가락을 들면서 식사는 시작됐다.
나를 위해 준비한 저녁답게, 하나같이 모두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5성급 음식점의 셰프가 직접 요리해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말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음식 중에서 가장 크게 자리를 잡은 연어는 입에서 사르르 녹았고, 이후 후식으로 나온 푸딩은탱글탱글한 것이 먹는 맛이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후에 다 함께 차를 들었다.
“우리 윤사해 길드장님의 따님 입맛에 음식이 잘 맞았는지 모르겠구나.”
한태극이 웃으며 물었다. 그에 나 역시 웃으며 답해 줬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 정말로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한태극이 흐뭇하게 웃었다.
“또 함께 저녁을 들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거라. 너는 우리 망나니를 구해 준 은인이니.”
그러면서 그는 단아를 바라보았다.
한태극이 가리킨 ‘망나니’는 아무래도 단아인 모양이다.
단아 역시 그것을 알고서 빼액 소리 질렀다.
“망할 할배가 누구보고 망나니라는 거야?!”
“예끼, 이놈! 할애비한테 망할이 뭐냐, 망할이!”
“그러는 할배는 나보고 망나니라고 했으면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거라! 다들 너보고 망나니라고 할 거다!”
“아니거든?!”
유치한 말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왜일까?
그 모습이 무척이나 정겹게 느껴졌다. 식사 자리를 가지기 전처럼 말이다.
문득, 단예의 말이 떠올랐다.
‘리사, 네 덕분이란다.’
‘응?’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집은 지금 우울에 잠겼겠지.’
보기 좋은 저 광경이 내 덕분에 지켜진 거라고 하던가?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깨를 곱게 펴기로 한 거다.
우웅,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윤리오가 보낸 메시지였다.
[리사, 언제 들어올 거야?]
뒤를 이어 다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윤리타의 메시지였다.
[한단이라고 했지? 걔랑만 있는 거 아니지? 걔랑만 있으면 아주 혼날 줄 알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기 무섭게 또다시 윤리오한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친구들이랑 노는 것도 좋지만, 몸도 좋지 않을 텐데 어서 들어와. 혹시 힘들 것 같으면 전화하고. 윤리타나 아버지 보낼게.]
윤리오의 걱정에 픽 웃고는 괜찮다며 답장을 보내줬다.
곧 돌아가겠다는 말과 함께.
“아, 그래! 리사, 너는 이 맹랑한 녀석이 학교에서 얼마나 사고를 치고 있는지 아느냐? 이놈 때문에 내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원!”
“할배! 윤리사한테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
“쓸데없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알려 주는 거지. 네 녀석이 얼마나 멍청한지.”
“멍청하다고도 하지 마!”
한태극과 단아는 계속 빽빽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어릴 적부터 변함없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신기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집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떠올렸다.
생각하니 아니었다.
윤리오가 쓰러지고, 윤사해가 사라진 후에 우리 집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었으니.
문득, 단아와 단이. 그리고 단예의 집이 우리 집과 같은 일을 겪지 않게 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티격태격 싸우는 한태극과 단아를 물끄러미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윤리오와 윤리타한테서 계속 메시지가 날아오기도 했고.
“가려고 그러느냐?”
“네, 의원님.”
“의원님은 무슨!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라니까!”
한태극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단예야, 단이야. 네 친구 좀 집에 데려다주고 오렴.”
“아니에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집까지 혼자 갈 수 있어요.”
“물론, 그럴 수는 있겠지. 하지만 과연 네 아비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건 아닐 것 같다.
윤사해는 간혹 쓸데없는 부분에서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여기니까 말이다.
그러니 윤사해라면 분명, 혼자서 집에 돌아온 나를 보고 한태극에게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애를 멋대로 데리고 간 것도 모자라서 혼자서 돌아오게 했다고.
‘아주 난리를 치겠지.’
나 몰래 한태극에게 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한태극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할배, 나도! 나도 갈래!”
단아가 손을 들었지만.
“너는 안 된다.”
한태극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다가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주제에 어디를 돌아다니려고!”
“그치마안!”
“그치만은 무슨! 약이나 먹거라!”
“윽! 싫은데!”
단아가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태극이 사령의 숲에서 고생한 막내 손녀를 위해 약을 지어 온 모양이었다.
그 약을, 단아는 무척 싫어하는 듯했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태극과 단아에게 인사했다.
“의원님, 저녁 잘 먹었습니다.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또 찾아올게요. 단아, 너는 의원님께서 지어 준 약 잘 챙겨 먹고.”
“싫은데에!”
단아가 투정 어린 목소리를 내고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윤리사, 고마워.”
“응?”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두 눈을 끔벅이는데, 단아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웅얼거렸다.
“나, 사실 사령의 숲에서 정말 많이 무서웠단 말이야.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고.”
그렇지만 내가 단아를, 그리고 도윤이를 찾아내서 구출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그리고 또, 으음.”
단아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무력했는지 몰라. 탈쟁이 새끼의 장난질에 그대로 놀아나던 나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단아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순간에 무력했던 자신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했다.
“단아는 강해. 그리고 앞으로도 강해질 거야.”
“정말……?”
단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응, 정말. 이매망량의 전 길드장이었던 내가 보장할게.”
단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그런 친구를 힘주어 꼭 끌어안고는 말했다.
“그럼, 몸 잘 회복해야 해. 다음에 또 보자.”
“응! 잘 가, 윤리사!”
단아가 밝게 인사했다.
그렇게 나는 단예와 단이와 함께 그들의 집을 나서게 됐다.
“한단예, 한단이! 이상한 곳으로 빠지지 말고 윤리사 집까지 잘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
단아가 목소리를 높이며 당부했다.
단예와 단이는 그런 막내의 말을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집. 곧장 들어가려고 하는데.
“리사.”
단이가 나를 불러서 세웠다. 자리에 멈춰 서고는 작게 숨을 내쉰 후 말했다.
“단이야, 단예랑 같은 말을 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나는 너희의 도움을 원치 않아.”
“알아.”
단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도 단예도 리사가 우리가 위험해질까 봐 그렇게 답하는 거 알고 있다는 소리야.”
흠칫 표정을 굳혔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해해주니 고마워.”
“아니.”
단이가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리사, 네가 우리의 도움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너를 도울 생각이니까.”
“단이야!”
“그렇게 불러도 소용없어. 어차피 귀국한 후, 리사 네가 단아를 구해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결심한 일이니까.”
“친구라서 당연히 구한 것뿐이야!”
“친구가 아니었다고 해도 리사라면 분명 구했겠지. 단아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고 해도 그랬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리사니까.”
단이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선 웃었다.
“리사의 적, 세상이 형이지?”
단이의 입에서 들려온 이름에 나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나의 침묵을 어떻게 여겼는지 모르겠지만 단이는 말했다.
“리사는 세상이 형을 죽이고 싶은 거야?”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답이 나오지가 않았다.
저세상은 나의 적이다.
내 세상을, 내 가족을 망가뜨렸던 장본인.
그런 그를 죽이고 싶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것만 알아줘. 내 세상의 주인공은 너야.’
잘 모르겠다.
내 세상의 주인공 역시 저세상. 그 하나였으니까.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금붕어처럼 입만 뻐금거리는 나를 향해 단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답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고는 단예와 함께 몸을 돌리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밤 보내.”
우스운 인사였다.
왜냐하면 알았거든.
단예와 단이를 저렇게 보낸 후, 절대로 좋은 밤을 보낼 수 없을 거란 것을.
불현듯 단아의 말이 떠올랐다.
‘얼마나 무력했는지 몰라. 탈쟁이 새끼의 장난질에 그대로 놀아나던 나 자신이.’
왜 지금 그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