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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416)화 (416/500)

416화. 서로가 원하는 것(1)

“이런, 아까운 아이가 결국 죽은 모양이구나.”

눈가를 붕대로 감고 있는 이가 짧게 혀를 찼다. 그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할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 당신 때문일 텐데?”

“호오?”

바둑판 위로 검정 돌을 올리려고 했던 이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 아이가 자진한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뻔하지, 뭐.”

남자가 하얀 돌을 바둑판 위에 올리고는 말했다.

“당신을 그 누구보다 숭배하던 녀석이었잖아?”

“흐음.”

콧소리를 흘리며, 남자의 상대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떻느냐?”

할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숭배하냐는 듯이 묻는 그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당신을 증오해.”

그 누구보다도 더.

“또한, 혐오하고.”

날 선 대답에 질문을 던진 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다는 듯이 유쾌하게 웃는 그 모습에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수장?”

유랑단의 수장이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즐겁지 않겠느냐? 나를 그 누구보다도 더 증오하고 혐오하는 네가, 나와 손을 잡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지.

“너는 결코 모를 거란다.”

저세상.

나지막하게 덧붙이는 이름에 남자의, 아니. 저세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서 유랑단의 수장은 여유로웠다. 저세상이 자신을 죽이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너는 알고 있었지?”

“뭐를?”

“할미, 그 아이가 네가 애정해 마지않는 도깨비의 따님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저세상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긍정으로 여겼는지, 유랑단의 수장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할미의 가족에게 손을 대려고 한 거겠지. 그 아이는 나를 숭배하나 사랑하는 건, 아래아의 길드장뿐이었거든.”

하지만 할미는 사랑하던 가족한테서도 외면받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스스로 목숨을 끊을 리가 없을 터.

‘나의 최후 역시 똑같겠지.’

저세상이 그런 생각을 하며 유랑단의 수장을 노려봤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않은 이유는?”

“막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느냐?”

도리어 묻는 목소리에 저세상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면, 유랑단의 수장이 나서 할미를 막거나 자신을 막을 이유 따위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수장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아홉 탈이 무슨 일을 벌이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들이 배신해도 마찬가지.

초랭이에 이어 선비까지 유랑단에서 등을 돌렸음에도 수장은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수장이 움직이는 건, 그들이 이매망량을 건드렸을 때뿐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보복할 뻔한데 말이다.

‘이상한 자식.’

저세상이 속을 알 수가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휙 고개를 돌렸다.

“저세상.”

그런 그를 유랑단의 수장이 부드럽게 부르며 말을 이었다.

“나를 마음껏 증오하고 혐오하렴. 하지만, 알고 있겠지?”

탁―!

수장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돌을 바둑판 위에 놓고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와 나는 한배를 탄 사이라는 것을.”

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세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둑판을 물끄러미 보다, 자신이 진 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날 뿐.

“더 나눌 이야기 없으면 이만 가 보겠어.”

“그러렴.”

유랑단의 수장이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그는 곧 저세상을 불러 세웠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저세상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수장을 노려봤다.

질문할 것이 있으면 빨리하고 끝내라는 듯이 말이다.

누가 봐도 불만 어린 그 표정에 수장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물었다.

“집 나간 녀석들을 슬슬 데리고 오려고 한단다.”

초랭이와 선비. 그 둘을 말하는 것일 터.

“도와주지 않겠니?”

웃는 낯으로 묻는 목소리에 저세상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까지 잘만 놔두더니…….”

“그 아이들이 필요해졌으니까.”

수장이 싱긋 웃었다.

“사실, 초랭이는 몰라도 앞으로의 일에 선비는 꼭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도와주지 않겠니?”

저세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알아본바, 초랭이는 청해솔의 곁에 있으며 선비는 이운조의 곁에 있었다.

즉, 초랭이와 선비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 속 함께했던 동료들과 척져야 한다는 말.

하지만 저세상은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한 박자 늦게 답하는 목소리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

“윤리사! 너!”

윤사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윤리오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다친 몸으로 멋대로 나가면 어떻게 해?!”

“다 나았는데…….”

“쓰읍!”

말대꾸하지 말라는 듯이 구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윤사해의 뒤로 모습을 숨겼다.

“윤리사, 아버지 뒤에 숨지 말고 어서 나와.”

“그치마안.”

윤사해의 뒤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지만.

“그치만이 아니야.”

윤리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너 혼자 짧게 잔소리 들을래? 아님, 아버지랑 함께 길게 잔소리 들을래?”

윤리오가 내민 두 개의 선택지에 윤사해가 당황했다.

“리오야, 나는 왜…….”

“리사가 AMO에 간 것을 알았음에도 저랑 윤리타한테 말하지 않은 죄에요.”

윤리타는 나를 찾겠답시고 밖에 나간 상태라고 했다.

첫째 아들의 말에 윤사해는 할 말을 잃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빠, 지지 마! 뭐라고 반박 좀 해! 여기서 지면 우리 둘 다 혼난다고!

속으로 열심히 응원하는 내 목소리를 들은 걸까?

윤사해가 우물쭈물 말했다.

“리오야, 리사는 이 아빠가 걱정되어서.”

“좋아요. 두 사람 다 저기 앉아 보세요.”

윤리오가 윤사해의 말을 끊고는 거실을 가리켰다.

나와 윤사해는 두 눈을 끔뻑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거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윤리오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15분, 30분, 그리고 1시간…….

끊임없이 이어지던 윤리오의 잔소리는 윤리타가 돌아오고 나서야 멈췄다.

“야, 윤리오! 아빠랑 윤리사한테 뭐하는 거야? 특히나 윤리사는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우리 오라버니들은 나를 부상자 취급하는 걸까?

광혜원 덕분에 나은지 다 오래인데도.

하지만 잠자코 있기로 했다.

여기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윤리오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될 테니까.

대신, 나는 올망졸망 두 눈을 뜨며 윤리오를 쳐다봤다.

그러면서 말했다.

“리오 오빠, 리사 다리 아픈데.”

겸사겸사 윤사해도 챙겨 줬다.

“아빠도 다리 많이 아플 텐데. 오늘 AMO에서 엄청 많이 걸어 다녔는데.”

결국, 윤리오가 백기를 들었다.

“두 사람 다 일어나요.”

앗싸!

윤리오의 허락에 곧장 꿇고 있던 무릎을 바로 폈다.

허리를 바로 편 우리 부녀를 향해 윤리오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 다 잘못했죠?”

나도 윤사해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해요.”

“그러마.”

“그럴게!”

“약속한 거예요?”

어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윤리오가 엄한 얼굴을 보였다.

그에 우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윤리오의 잔소리는 몇 번을 들어도 무서웠다.

“저녁이나 먹죠.”

우리를 향해 잔소리를 퍼부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윤리오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리사,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버지도 말해 주세요.”

“나 햄버거 먹고 싶은데!”

“윤리타, 너한테 물은 적 없어.”

윤리오가 윤리타에게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윤리타는 윤리오의 대답에 우는 소리를 내면서 그를 부축해 줬다.

윤리오의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움직이는 것이 아직 불편했기 때문이다.

사이좋은 형제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윤사해 역시 마찬가지인지, 옅게 미소를 그린 낯으로 제 아들들을 보고 있었다.

그 두 아들 중 한 명에게 조금 전까지 잔소리 폭격을 맞았는데 말이다.

‘어휴, 정말.’

영락없는 아들 바보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리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단아]

한태극의 세 손주 중 막내이자 나의 소중한 친구인 단아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단아야?”

그러고 보니 단아와는 사령의 숲 이후로 만난 적이 없네.

사령의 숲에서 구출된 이후,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상태라고 들어서 섣불리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 잠을 이제야 깬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야, 윤리사! 그게!

단아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눈 떠보니 한단예랑 한단이가 있는데, 왜 있는 걸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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