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다시, 사령의 숲(3)
“할미……!”
곱고 흰 피부에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
그리고 붉은 눈.
“웬일로 탈을 안 쓰셨네?”
“원한다면 써 줄게.”
할미가 탈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어떠니? 이 모습이 더 마음에 들까?”
마음에 들고 자시고, 이를 악물며 창을 꺼내 들었다. 할미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무서워라.”
“닥쳐.”
도무지 좋은 말이 튀어 나가지 않았다.
“감히 내 친구들을 노려?”
창을 쥔 손을 꼭 잡으며 할미를 노려봤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어머.”
할미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키득거렸다.
“우리 리사, 정말 무섭네.”
“시끄럽다고 했지?”
단숨에 그녀를 향해 땅을 박차서 날아오르고는 창을 휘둘렀다.
쐐액!
할미를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잔상이었다.
“사람을 베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거니? 정말 네 아비와 똑 닮았구나.”
어느새 땅에 착지한 할미가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아빠에 그 딸이니까.”
싱긋 웃어 주고는 나 역시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손에는 여전히 창을 쥔 채였다.
나는 물끄러미 할미를 보다 순식간에 몸을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내달린 후, 곧바로 할미의 앞에 선 나는 다시 한번 더 망설임 없이 창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창끝이 닿았다.
그 닿은 부분이 할미가 쓰고 있던 탈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살짝 금이 간 탈이 이내 부서져 내렸다. 할미가 후두둑 떨어지는 탈의 잔재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성장하다니. 역시 그때 그 새끼랑 죽였어야 했는데.”
그 새끼라면…….
“저세상?”
할미의 얼굴이 ‘저세상’의 이름을 언급하기 무섭게 험악하게 변했다.
저세상은 지금 할미와 함께 유랑단에 소속되어 있다. 정확히는, 그들과 손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하현은 유랑단의 수장이 저세상을 꽤 아끼고 있다고 했지.’
하지만 할미는 아니었다.
어린 날, 각시의 일이 있었던 후, 그녀는 한동안 모습을 감췄었다.
‘유랑단 내부에 무슨 문제가 생겼겠거니 했지만.’
지금 보니 그 일로 수장의 눈 밖에 난 모양이다.
추측이지만 만에 하나의 가정을 품고서 물었다.
“혹시, 나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저세상 때문이야?”
할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정답이었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활짝 웃으며 말했다.
“굴러온 돌이 당신 앞에 박혀서 기분 나쁜 모양이네?”
그런데 그 굴러온 돌이 수장의 예쁨받고 있다니.
‘함부로 해칠 수 없겠지.’
그래서 목표를 나로 바꾼 거다.
굴러온 돌인 저세상.
그와 한때 가족이었던 나를 몰아붙여, 그에게 정신적 충격을 입히고자 말이다.
“쓸데없는 짓을 하네.”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를 건드린다고 저세상이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아?”
할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 역시 그녀와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그래? 과연 그럴까?”
할미가 조롱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세상, 그 새끼는 내가 너를 노린다는 걸 알자마자 감히 내 언니를 찾아갔지.”
“언니……?”
그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원래는 최설윤 길드장님을 죽여 그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는데.’
왜 하필 할미를 저지하기 위해 최설윤을 노린 건가 했더니!
“당신, 최설윤 길드장님이랑 무슨 사이인 거야?”
“어머, 내가 말 안 했던가?”
할미가 과장된 몸짓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래아의 최설윤, 그녀는 나의 하나뿐인 언니란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언니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할미와 최설윤이 서로 형제 사이라니.
“안 닮았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할미의 말대로 그녀는 최설윤과 닮은 구석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 한 가지 있기는 했다.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
그것만큼은 최설윤의 것과 꼭 닮아 있었다.
할미가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고는 말했다.
“언니와 내가 닮지 않은 건 알아. 어릴 적부터 들었지. 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나를 매일 때렸어. 어머니가 감히 간통해서 낳은 딸이라고 생각했거든.”
주절주절 내뱉는 목소리에는 광기가 섞여 있었다.
“우리 어머니한테서는 이런 색이 나올 리가 없는데도 아버지는 의심했지. 그때마다 언니가 나를 구해줬어. 오빠는 못 본 척 모르는 척 계속 무시했는데!”
할미가 버럭 소리 지르고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진정하자, 진정해. 이런 추태를 보일 생각은 없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진정하자.”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던 그녀가 이내 싱긋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줬으면 해. 친애하는 언니는 내가 탈이란 걸 알게 되면 슬퍼할 테니.”
“그걸 잘 아는 사람이 탈이 된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니?”
할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가 광기 어린 웃음을 내뱉을 때마다 주변에 사령들이 모였다.
―아… 아이……!
―몸을 빼앗자! 빼앗자, 저 몸을!
―우흐흐흑……!
몸을 잃은 것들이 나를 향해 탐욕을 내비쳤다. 할미는 그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명령했다.
“갈기갈기 찢어 버려.”
나지막하게 내뱉은 그 명령과 함께 사령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황급히 그림자를 움직여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는 것들을 찢으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사령들은 형체가 없다.
그 때문에 나의 그림자는 그대로 사령들을 통과하고 말았다.
―몸…! 그 몸을 내게 다오……!
―아파! 아파!
―살려 주세요…! 살려 줘……!
사령들이 제각기 원혼 어린 말을 쏟아내며 나를 노렸다. 그것들을 피하면서 동시에 두 눈을 굴렀다.
사령들을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할미!’
사령들의 뒤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그녀에게 타격을 입힐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아해야,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내 도와주리?〗
천지해가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느닷없는 말에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불렀다.
“대도깨비님!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럼, 물론이지.〗
천지해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남긴 찌꺼기이지 않느냐? 당연히 내 너를 도와줄 수 있느니라.〗
“그런 거면 처음부터 도와줄 것이지!”
〖네가 너무 열심히라서 말이다. 내 어찌 계약자를 방해할 수 있겠느냐?〗
말은 잘하지!
짧게 혀를 차고는 대도깨비에게 손을 벌렸다.
“부탁할게요!”
〖오냐, 저것들 먼저 처리하면 되겠느냐?〗
“네!”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대도깨비가 몸집을 키웠다.
내 허리에 올 정도로 몸집을 키운 그는 이윽고 두 손을 펼치며 빛을 뿜어냈다.
―으아아악……!
―아파! 아파!
―사, 살려줘!
―흐아아악……!
사령들이 그 빛에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몸부림쳤다. 이내 나를 노렸던 사령들은 희게 빛이 되어 사라졌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가야 할 곳으로 보내 줬느니라.〗
천지해가 싱긋 웃었다.
〖이곳에 오랫동안 붙잡혀 있던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소멸시켜줬지마는 말이다.〗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 뒤로 할미가 외쳤다.
“무슨 짓이야!”
기껏 모은 사령들이 한순간에 빛이 되어 당황한 모양이다.
“인간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는 어리석은 것들이!”
〖호오.〗
천지해가 입술을 오므렸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를 향해 저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군.〗
“탈쟁이 새끼들은 원래 그래요.”
당장,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중’이 그랬다. 천지해 역시 그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인간을 노릴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랑야 녀석의 반려를 죽인 놈도 있었지.〗
“그 자식은 아빠가 반쯤 죽여 놓았어요.”
〖듣던 중 기쁜 소리군.〗
천지해가 유쾌하게 웃고는 다시 모습을 줄였다.
〖이제 네게 맡겨도 되겠지?〗
“물론이죠.”
골치 아픈 사령들도 없어졌겠다.
그림자를 움직여 나와 할미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대도깨비님, 한 가지 부탁 좀 할게요.”
〖네게 모두 맡겨달라고 하더니?〗
“그런 말은 안 했어요.”
공간을 만들어 낸 후, 그림자로 다시 창을 내고서는 천지해에게 부탁했다.
“저 망할 탈쟁이 새끼가 또 사령들을 부리면.”
〖그것들 또한 가야 할 곳으로 내 보내 주도록 하마.〗
천지해가 내 말을 끊고는 웃었다.
〖그러니, 아해야. 다치지 말고 몸 생각하며 상대 좀 해 주거라.〗
“물론이죠.”
괜히 오기를 부려 할미를 잡으려 하다가 다치기라도 해 봐.
‘윤사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외출 금지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
나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할미를 향해 땅을 박찼다.
“이런, 버러지 같은 꼬마가!”
할미가 악의가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동시에 새로운 사령들이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물론, 그것들은.
〖학습 능력이 없구나.〗
천지해가 뿜어내는 빛에 의해 사라졌다.
할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 얼굴 앞에 다다라서는 활짝 웃어 줬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힘껏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