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절망(5)
“……리타 형.”
긴 침묵 끝에 저세상이 윤리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웃는 낯으로 말이다.
“세상이, 네가 왜…….”
윤리타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최설윤 길드장님을…….”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요?”
“뭐?”
“제가 지금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요.”
윤리타가 표정을 굳혔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그 표정에 저세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리타 형이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윤리사가 말해 주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 말에 윤리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저세상의 말대로였다.
윤리타는 그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유랑단.’
또한, 윤리타는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고.
‘윤리오도, 그리고 아빠도 이미 알고 있겠지.’
그 때문에 저세상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해 온 것이다.
끊임없이 저세상을 쫓고 있는 여동생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다른 일이었다.
아이에서 청소년, 청소년에서 어른.
그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본 가족이지 않는가?
그렇기에 윤리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세상아, 네가 왜 그렇게 됐는지 묻지 않을게.”
그러면서 윤리타는 한 글자씩 힘주어 내뱉었다.
“돌아와.”
저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면서.
“리타 형…….”
내밀어진 손을 보는 저세상의 두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런 그를 향해 윤리타가 애써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잠시 집 나갔었거든? 집 나가니까 개고생이더라. 친한 누나 만나지 않았으면 그대로 노숙자가 됐을 거야.”
그러니 방황은 이만 끝내고 돌아오라는 그 말에 저세상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리타 형은 너무 착한 것 같아요.”
유랑단에 소속되어, 아래아의 최설윤을 노리고 있는 자신에게 저렇게 손을 건네다니.
“그래서 형이 죽었던 거예요.”
저세상이 윤리타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후, 시작된 건 공격이었다.
“윽!”
갑작스럽게 날아온 사슬에 윤리타의 팔이 묶였다. 그는 그대로 나무에 처박혀 기침을 토했다.
“리타야!”
최설윤이 경악하며 그를 불렀다.
자신을 돕기 위해 이곳에 온 이매망량의 길드원이기 이전에, 윤리타는 윤사해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다치면 곤란했다.
때문에 최설윤은 다친 몸으로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쿠구궁―!
대지가 울리며 가시넝쿨이 아래쪽에서 튀어 올라왔다.
“잡아!”
최설윤의 말과 함께 저세상을 향해 가시넝쿨이 움직였다.
일반인이라면, 아니. 각성자도 쉽게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였지만, 저세상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최설윤의 공격을 피해 내며 그녀를 놀렸다.
“최설윤 길드장님, 생각보다 학습 능력이 많이 없으신가 봐요.”
“그러는 우리 세상이는 버릇이 많이 없어졌구나? 윤사해 길드장이 자식 교육은 똑바로 한 줄 알았는데!”
“저는 윤사해 길드장님의 자식이 아니니까요.”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얹혀살았을 뿐, 자신은 절대로 윤사해의 자식이 될 수 없다.
저세상은 그렇게 최설윤의 공격을 피하며 사슬을 움직였다.
날카로운 끝이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꿰뚫으려고 할 때.
타앙―!
날아든 총알이 최설윤을 노리던 사슬을 튕겨 냈다.
“세상아.”
그가 휘두르던 무기를 튕겨 낸 윤리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짓씹듯이 내뱉었다.
“다음에는 심장을 노릴 거야.”
“그건 곤란한데요.”
저세상이 싱긋 웃고는 말했다.
“제 심장을 노릴 사람은 따로 있어서요.”
뭐?
윤리타는 마치 그렇게 묻는 것처럼 저세상을 쳐다봤다.
하지만 저세상은 그 시선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연 건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파스슷―!
느닷없이 광풍이 일어나면서다.
“아, 왔네요.”
세차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그 끝에 달려 있던 나뭇잎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그리고 그 사이.
잔뜩 성난 얼굴의 윤리사가 이를 드러내며 서 있었다.
저세상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윤리사. 아,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지?”
“저세상……!”
윤리사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
이매망량에 이어 아래아.
그 이전에 내 가족.
저세상이 배신하고 공격하며 또한 무너뜨리고자 했던 곳이다.
하지만 설마, 그가 아래아를 습격해 온 지하 길드를 이끌고 있을 줄 몰랐다.
‘정말?’
문득 떠오르는 질문을 모르는 척 무시하고는 검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안 놓쳐.”
“그 말,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닥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꺼내든 검을 그를 향해 치켜들었다.
“너는 선을 너무 많이 넘었어.”
“애초에 그러기 위해 유랑단과 손을 잡은 거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열불이 치솟아 올랐다.
〖진정하거라, 아해야.〗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대도깨비의 목소리가 없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저세상에게 달려들었을 거다.
들려온 목소리에 헛숨을 들이 삼킨 후 조용히 말을 토해 냈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도 계약자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감정을 공유할 것도 없이, 네가 화가 무척 많이 났다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대도깨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천지해는 저세상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인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세상이 저렇게 얌전히 있을 리가 없지.
어쨌거나 천지해는 계속해서 나를 달랬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면 할 수 있는 일도 그르치게 될 것이다.〗
“알아요.”
감정을 앞세워서 저세상을 놓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거다.
당장, 그에 의해 윤리타가 당한 것이 보였다.
저세상을 친동생처럼 여기던 그를 전투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다니.
다시 속이 들끓었지만,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느릿하게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또 분노로 잠식되려던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그래, 아해야. 잘했다.〗
다정하게 웃는 목소리를 뒤로하며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리사…….”
“최설윤 길드장님께서는 뒤로 빠져 주세요.”
“혼자서 상대하려고?”
“네.”
그림자를 움직여 공간을 만들며 말을 끝마쳤다.
“가족 일은 가족끼리 해결해야죠.”
그 말을 끝으로 저세상과 나만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둡게 가라앉은 공간이지만 나도 저세상도 어렵지 않게 서로를 보고 있었다.
“못 본 사이에 스킬을 다루는 게 많이 능숙해졌네?”
“네 덕분이야.”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세상, 네가 하도 쥐새끼처럼 구니까, 계속해서 스킬을 연마할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
저세상이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고는 이내 웃었다.
“내가 도움이 돼서 다행이네.”
“다행?”
까드득, 이가 갈렸다.
강해지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내 가족과 친구들을 지키고 싶어서 품은 것뿐, 다른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강해지고 말았다.
바로 눈 앞의 남자를 제압하기 위해.
물론, 이 힘으로 내 가족도 친구도 다른 소중한 존재들도 지킬 수 있게 됐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만들 거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힘을 거머쥐지 않게, 윤사해의 막내딸로 천진난만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쭉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 거란 말이다.
그만큼 이 상황이 가슴을 찌르는 듯 아팠으며, 또한 원망스러웠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세상은 선심 쓰듯 말했다.
“먼저 덤벼.”
하!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곁에 선비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거야? 이제 편히 도망갈 수도 없게 됐는데!”
“도망갈 생각 따위 없어.”
저세상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사슬을 움직였다.
“윤리사, 네가 쓰러져서 이 공간이 무너지게 된다면 물러나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공간을 만들고 남은 그림자를 저세상이 모르도록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바닥을 기어가던 그림자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고.
나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저세상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당황과 당혹감, 그리고.
‘웃어?’
기쁘다는 듯이 웃는 얼굴에 잠시 멈칫했지만 계속 움직였다.
그렇게 저세상의 코앞에 다다른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내 그림자가 붙잡고 있는 건 그의 발목이었으니까.
하지만 저세상은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검을 막지 않았다.
그의 상반신을 길게 베어 낸 검에 피가 묻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세상의 붉은 피가 내 뺨에 묻기까지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황망하게 굳은 나를 저세상이 걷어찼다.
“윽……!”
바닥을 구르며 부딪친 몸에 앓는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런 내 위로 저세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해 하면 안 돼, 윤리사.”
“저세상,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글쎄.”
검에 베인 상처가 아프지도 않은 모양인지, 저세상이 웃는 얼굴로.
“네가 정말 좋다는 생각?”
개소리를 지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