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399)화 (399/500)

399화. 절망(1)

“듣고 가는 게 좋았을 텐데.”

하현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윤리사가 정리해 달라는 정보에 그 이야기는 담지 못할 테니.

“바보같군.”

그래서 저세상이 윤리사를 그렇게 아끼는 건가 싶었다.

저세상.

그 또한 바보였으니.

‘아끼는 방법이 잘못됐지마는.’

자신이 신경쓸 일은 아닌 듯했다.

윤리사에게 말해준다고 해서 그녀가 들을 일도 아니거니와, 저세상이 알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나를 죽이고자 움직이겠지.’

방심했다고 하나, 저세상은 자신을 아주 손쉽게 상처 입힌 각성자다.

그 실력은 높게 사야 했다.

‘이매보다 더 강할 수도 있으니.’

유랑단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홉 탈 중에서 ‘백정’이 가장 강하다고 하나, 실상은 달랐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가장 위험한 건 바로 이매.

자신이 수장의 손을 잡고 유랑단에 올 때부터 있었던 그다.

‘이매가 나를 찾겠답시고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가 자신을 배신자로 규정하든, 아님. 아직 동료라고 생각하여 이곳에서 자신을 구하려고 들든.

이매가 움직이는 순간, 누구 하나 크게 다칠 건 분명했기에.

그리고 그게 이운조가 될까 두려웠다.

‘이운조…….’

하현이 그녀를 떠올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하 감옥에서의 실험이 몇 번이고 악몽으로 나타났을 때, 자신을 끊임없이 불러준 사람.

‘정신 차려, 이 멍창아! 네가 보고 있는 건 다 과거야! 돌아갈 일도, 돌아갈 수도 없는 과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뜨라며 애원하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뭐해?”

마치 지금처럼.

하현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도깨비와의 이야기를 잘 끝내고 온 건 아닌 것 같군요.”

이운조가 불퉁하게 말했다.

“배상금이 엄청나.”

“그럼, 엄청나겠죠. 저 하나 찾겠답시고 이매망량 곳곳에 폭탄을 설치해서 터트렸잖습니까?”

“무너진 곳은 없는데.”

“이운조.”

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일으켰다.

“제가 기억을 찾지 못했거나 그랬다면은 무척이나 위험했을 겁니다.”

“내가? 아님, 네가?”

“당연히 이운조, 당신이지요.”

하현이 그걸 말이라고 묻느냐는 듯이 타박했다.

“도깨비는 위험한 자입니다.”

“도깨비가 아니라 윤사해.”

“네, 윤사해. 어쨌든 그 자는 무척이나 위험한 녀석입니다.”

“알아.”

하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내 그가 빼액 소리 질렀다.

“그걸 아는데도 그런 겁니까?!”

“어쩔수 없었어!”

이운조가 지지 않고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너를 찾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너를 네가 암만 선비 탈을 쓰고 있다고 해도, 내가 아는 하현이 분명한데. 그런데.”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하현.

자신이 지어 준 그 이름의 주인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곳을 뛰어다녔던가?

이운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도 알아. 내가 무모한 짓 했다는 거. 잘못하면 이매망량뿐만이 아니라 AMO까지 적으로 돌릴 뻔한 거 안다고. 그렇지만!”

“알겠습니다.”

하현이 이운조를 와락 끌어안아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건 모두 제가 잘못한 일이지요.”

“네가? 왜?”

“그야, 제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더욱이 유랑단의 수장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바보같이.’

그때는 자신에게 건네진 손이 구원인 줄 알았다. 그 때문에 하현은 생각도 하지 않고 덥석 그 손을 잡고 말았다.

“제 신병은 어떻게 됩니까?”

“일단, 네가 유랑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네 신병은 AMO에 넘기지 않기로 했어.”

“넘기십시오.”

“뭐?!”

이운조가 놀라 물었다.

“미쳤어? AMO에 구속된다면!”

“저는 분명 높은 확률로 유랑단에 다시 돌아가게 될 겁니다. AMO는 유랑단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니까요.”

이운조가 표정을 굳혔다. 그에 하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이를 이용해서 협상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협상……?”

“네.”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운조, 당신과 계속 함께 할 수 있도록요.”

낯 간지러운 목소리였지만 이운조는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차마 응접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틈 사이로 두 눈만 끔뻑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운조와 하현이 신혼부부라도 된 것처럼 아주 깨를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어울리는 한쌍이구나.〗

천지해가 내 옆에서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각성, 그 후』에서 어떻게 됐는지 알면 대도깨비가 어떻게 나올까?

아마, 『각성, 그 후』의 저자를 찾아 죽이려고 할 거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는 살인을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 정도로 천지해는 입꼬리가 광대 끝에 걸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요?”

〖그래. 선남선녀의 결합은 언제봐도 기분 좋은 것이지.〗

“선남선녀는 아닌 것 같은데.”

〖시끄럽다, 이 녀석아.〗

천지해가 타박하고는 말했다.

〖그래도 이제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 네 아비의 말을 저 녀석들에게 전해 줘야지.〗

“그건 그렇죠.”

이운조와 하현이 계속 깨를 볶고 있게끔 둘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으아악!”

이운조가 나를 보자마자 하현을 밀쳐 넘어뜨렸다.

“헉! 미안! 괜찮냐?!”

하현이 어떤 부상을 입었었는지 아는 이운조가 다급하게 그를 일으켜세웠다.

“이운조……!”

“미안! 놀라서 그랬어! 그러게, 리사! 왜 갑자기 들어온 거야?!”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언니. 저한테 화낼 입장이 아니란 걸 잊은 모양이네요?”

이운조가 움찔거리고는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당분간 이매망량에서 지내도록 하세요.”

“뭐?”

이운조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현은…….”

“선비였던 아저씨도 함께요.”

선비였던 아저씨, 하현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내 칭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만 어쩌라고다.

“하현이 정리해 준 유랑단에 관한 자료가 혹시라도 AMO에 넘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예요.”

또한.

“하현의 생존을 아는 유랑단의 탈이 습격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아.”

이운조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유랑단…….”

하현은 자신이 속해 있던 곳을 입에 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별안간 그가 손에 선비 탈을 쥐고서는.

콰직!

산산조각 내서 부숴 버렸다.

“그렇게 탈을 부숴도 어차피 원상복구 되지 않나요?”

“또 부수면 되는 일입니다.”

하현이 홀가분하게 말했다.

“저는 이제 유랑단의 ‘선비’가 아닌, ‘하현’이니까요.”

하현은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미소를 그렸다.

새삼스레 저 얼굴이 지금까지 탈에 가려져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어쨌든 간에.

“곧 방을 안내해 줄 사람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 푹 쉬도록 하세요. 제가 부탁한 자료를 정리하고 있어도 좋고요.”

“네, 알겠습니다.”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곧장 응접실을 나가려는데.

“잠깐만, 리사!”

이운조가 나를 붙잡았다.

왜 그러나 했더니,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네?”

“네 덕분이야.”

그러니까 뭐가?

당황하여 두 눈을 끔뻑이는데 이운조가 금방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전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하현과 이렇게 만날 수 없었을 거야. 저 자식의 기억도 찾지 못했을 테고, 꼼짝없이 AMO로 신병이 넘어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어야겠지.”

그러니까 내게 큰 빚을 졌다면서 이운조가 말했다.

“언제인가 네 도움이 필요할 때, 어떤 일이든 해 줄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더라도요?”

“그래.”

이운조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손에 묻은 피가 꽤 많아서 그런 거겠지.

그 피가 모두 지하 길드원들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네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를 불러. 내가 대신 죽여 줄 테니.”

이운조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진지한지, 하현이 안절부절 뭐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릴 정도였다.

“이운조…….”

걱정스럽게 자시을 부르는 하현을 향해 이운조가 싱긋 웃었다.

“걱정 마. 위험한 일은 적당히 몸 사려서 할 거야.”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나 보다.

뭐, 이운조가 언제고 한 번 나를 도와준다면야.

“좋아요.”

그게 뭐든 환영이었다.

“그럼, 운조 언니. 탈쟁이였던 저 아저씨는 언니한테 맡길게요. 혹시라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는 선비의 손목에 웬 팔찌를 채웠다.

“스킬 사용을 차단시키는 S급 아이템이에요. 12공방에서 선물해 준 물건이죠.”

일전에 그들의 일을 해결해 준 대가로 받은 것이었다. 하현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나를 보다가 이내 체념한 듯 말했다.

“좋습니다.”

그 대답에 싱긋 웃어주며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네 아비의 일도 들어줬겠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어떻게 할 거냐고?

“돌아가야죠.”

저세상을 뒤쫓는 건 불가능하고, 어차피 그에 대해서는 하현이 정리해서 줄 테니.

“돌아가요.”

윤리오와 윤리타, 나의 오빠들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