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이운조(4)
선비가 깨어났다.
이운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그 탈쟁이가 악몽에서 깨어나 버렸다.
아쉽다고 하면 내가 너무 못된 걸까?
어쨌거나.
“모시겠습니다.”
사야의 안내에 따라 선비가 있는 곳으로 가니, 그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선비.”
나지막하게 그를 부르자, 선비의 금안이 나에게로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워진 눈매에 윤사해가 중얼거렸다.
“독기가 빠졌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선비는 그러지 않은 척, 알게 모르게 날을 잔뜩 세우고 있었으니.
“리사, 저 녀석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그냥…….”
윤사희한테 당한 것 그대로 돌려줬다고 말하면 윤사해는 길길이 날뛰겠지?
‘윤사희를 보러 가겠다고 나설 지도 몰라.’
그건 원치 않았다.
그 때문에 어물쩍 말을 넘겼다.
“자아 성찰의 시간을 좀 가지게 했어. 저 아저씨는 다른 탈쟁이들과는 다르게 인간적인 면모가 아주 많이 남아 있거든.”
“흐음.”
윤사해가 고민하는 듯, 아래턱을 쓸었다. 선비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는 듯했다.
그때, 이운조가 나섰다.
“유랑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겨줄 거야.”
윤사해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나 역시 그랬다. 이운조는 그런 우리 부녀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선비는, 아니. 하현은 이동계 각성자야. 그것도 유랑단에서 꽤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
지금도 유랑단에 속해 있는 그인데, 이운조는 선비가 마치 그곳에서 나온 것처럼 굴었다.
“이매망량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많이 줄 거야.”
“저 녀석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윤사해의 지적에 이운조가 선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빡!
두개골 뼈가 부러진 건 아닌가 싶은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덕분에 선비는 정신을 차린 것 같지마는.
“뭡니까?!”
“멍청하게 있지 말고 아저씨한테 어서 말해!”
“뭐를 말입니까?”
“당연히 유랑단에 대해서지!”
이운조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너 이대로 돌아갈 생각인 건 아니지? 응?”
“그건…….”
“돌아가기만 해 봐.”
이운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파지직, 튀는 전격에 선비가 흠칫 몸을 떨고는 말했다.
“안 돌아갑니다.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돌아간다고 해 봤자, 수장님을 제대로 볼 자신도 없거니와.”
“수장님?”
“……하여튼 안 돌아갈 거라고요!”
선비가 버럭 소리 지르고는 이마를 짚었다.
“윤리사.”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왜요, 아저씨?”
선비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저한테 궁금한 것이 있으셨죠?”
“네. 하지만 아저씨는 가르쳐주지 않았죠.”
“그래서 저를 그런.”
악몽에 가둔 겁니까?
선비는, 그 말을 억지로 삼킨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는 말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선비는 물었다.
“모두가 들어도 상관없는 이야기인 겁니까?”
“설마요.”
사실, 이운조나 사야는 들어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윤사해는 아니다.
그가 저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분명 충격을 받을 터.
윤사해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옮길까요?”
“리사.”
윤사해가 걱정된다는 듯 나를 불렀지만.
“걱정 마, 아빠.”
나는 더없이 활짝 웃으며 그의 걱정을 덜어 줬다.
“……그래.”
윤사해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렴.”
“응!”
선비가 우리 부녀의 대화를 듣고는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 도깨비가 오기도 전에 내가 죽을 텐데.”
그 목소리에 이운조가 팔꿈치를 들어 선비의 옆구리를 찔렀다.
***
“악몽으로부터 금방 벗어나서 다행이에요.”
내가 있는 곳은 윤사해의 집무실 바로 옆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겁니까?”
선비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응접실에는 나와 선비뿐이었다.
아니, 이제 선비가 아니지.
“하현.”
그렇게 불린 남자가 살포시 미간을 좁히며 나를 쳐다봤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에 웃으며 물었다.
“하현이 아저씨의 이름인 걸 이제 알겠어요?”
“덕분에 말입니다.”
하현이 짜증스럽게 툴툴거렸다.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 덕분에 말이죠.”
하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악몽에서는 어떻게 나온 거예요? 몇 날 며칠은 헤맬 줄 알았는데.”
“이운조가 불러서요.”
하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하도 시끄럽게 저를 불러서,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창밖을 쳐다봤다.
“꿈만 같군요.”
유랑단에 있었던 모든 순간이 그런 식으로 느껴지는 건지, 아님. 모든 기억을 되찾은 이 순간이 꿈만 같이 느껴지는 건지는 모른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하현이 지금 후회하고 있다는 것. 회한에 젖은 그의 두 눈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과거의 죄를 청산하고 싶으면, 그 값을 하도록 하세요.”
죽을 생각은 하지 말고.
“살아서요.”
“그래야죠.”
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때문에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결심한 거니까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인 건지, 하현은 더는 내가 알던 ‘선비’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세상에 대해 물으셨지요?”
하현이 저세상의 이름을 언급하며 말했다.
“그는 수장님과, 아니. 수장과 지금 거래를 한 상태입니다.”
“거래요?”
“수장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한 것 같더군요.”
그 대가 때문인지 유랑단의 수장은 저세상의 모든 편의를 봐 주고 있는 중이라고 하현이 말했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나, 중요한 건. 저세상이 먼저 수장을 찾아왔다는 겁니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도대체, 왜?’
저세상만이 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 하마터면 하현을 향해 튀어 나갈 뻔했다.
가까스로 치미는 말을 억누른 후 입을 열었다.
“저세상의 목적은요?”
“그것 역시 모릅니다. 하지만 저를 죽이려고 들면서 이런 말은 남겼습니다.”
저제상이 선비의 몸에 큰 상처를 내며 남긴 말은 하나.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 나는 어차피 너희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내 세상의 주인공이 살아남으려면 너희 같은 악당들은 죽어 버리는 게 좋거든.’
하현이 들려준 말에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유랑단의 수장은 저세상의 목적을 모르는 건가요?”
“글쎄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가 말했다.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두는 걸 수도 있습니다.”
“유랑단의 수장이요?”
“네.”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장에게 있어서 저희 탈들은 모두 하나의 장기 말일 뿐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으나,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저세상에 관해 아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저세상이 탈을 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네, 아닙니다.”
하현이 그 부분은 걱정 말라는 듯이 대답했다.
“혹, 저세상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아니요.”
“그렇다면 저세상은 여전히 탈을 받지 않은 상태인 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이라…….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선비가 그런 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저세상이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모르겠네요.”
“네?”
“모르겠다고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닫혀 있던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죽이고 싶은데, 한 편으로는 붙잡아서 묻고 싶어요.”
네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뭐냐고.
“그러다 또다시 죽이고 싶어요.”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이 몇 번이고 어수선하게 머리를 어지럽혔다.
지금도 그랬다.
저세상이 유랑단의 수장과 거래를 한 이유가 무엇인지, 도대체 어떤 것을 거래의 조건으로 내밀었는지.
“저는 사실, 저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가 주인공이었던 이야기를 읽었으니까. 완결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윤사해를 죽여 눈물을 흘리는 장면까지는 봤으니까.
그래서 저세상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그의 뒤를 쫓아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라니.
“어쨌든, 그 자식에 대해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직 알려드리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건 운조 언니와 함께 정리해서 보내 줘요.”
지금쯤 이운조는 이매망량을 엉망으로 만든 것과 관련하여 윤사해와 이것저것 이야기 중일 거다.
‘선비의 처리와 관련해서도.’
하현이 AMO에 넘겨질지 그러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좋은 꿈 꾸세요.”
나는 그 인사를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기에 보지 못했다.
하현의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