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잊힌 이름(5)
“바보 같지?”
이운조의 이야기가 끝났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 녀석이 툭 하면 울던 울보였다는 것, 그리고 내가 지어 준 이름.”
하현.
“그걸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다 잊었는데.”
어떻게든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 그렇게 찾아낸 사람이.
“선비라니.”
이운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바보 같지 않아?”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이운조를 응시할 뿐이었다.
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던 건지, 이운조가 하소연을 하듯 말을 쏟아 냈다.
“선비가 하현이라면 그동안 내가 해 온 일들은 뭘까? 그 새끼는 왜 유랑단에 소속되어 있는 거지? 지하 길드로 인해 그 고통을 받았는데, 왜 똑같이 행동한 거야?”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내뱉어지는 목소리에 답해 줬다.
“선비도 언니랑 똑같이 기억이 없을 수도 있죠.”
다만, 이운조와는 다르게 그는 지하 감옥에서 지냈던 모든 기억을 잊고 말았을 거다.
때문에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로서 지금의 자리에 있는 거겠지.
이운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만약, 아니라면. 사실은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라면.”
“하현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그 편이 언니한테 좋을 테니.”
이운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못 본 척, 그 표정을 무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비는 AMO에 인도될 거예요. 아님, 우리 손에 처리되던가요.”
“리사!”
“AMO에 인도되기를 바라세요.”
그렇게 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될 테니.
하지만 윤사해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 내가 어릴 적 중의 신병을 AMO에 넘긴 적 있는 그다.
‘그리고 중의 행방은 묘연해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윤사해는 그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더욱이 AMO가 아닌, 유랑단의 보호 아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으니.
‘선비는 AMO에 넘기지 않고 직접 처리하려고 할 거야.’
선비가 이매망량에 피해를 입힌 적 없는 탈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운조의 과거를 몰랐다면, 망할 탈쟁이가 그냥 죽게 뒀을 거다.
그한테서 저세상에 관한 정보만 얻어 내고는 죽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왜 하필 이운조와 그런 식으로 관련이 되어서는.’
사람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머리를 벅벅 긁고는 윤사해가 있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선비에게 저세상과 관련해 얻어 낼 정보가 있었으니.
윤사해가 그한테서 저세상의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망할 저세상 새끼에 대해서 물어보기는 해야지.’
작게 한숨을 푹 내쉬는 찰나.
〖저대로 둬도 괜찮겠느냐?〗
천지해가 걱정했다.
이운조가 다른 마음을 품고 이매망량을 쑥대밭으로 만들면 어쩌나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나는 무덤덤하게 그의 걱정을 덜어 줬다.
이운조가 바보도 아니고, 선비를 위해서라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아빠한테 가기나 하죠.”
지금 선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그였으니까.
***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제발 뭐라고 말 좀 하지? 나한테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윤사해는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선비를 심문 중이었다.
유랑단의 탈쟁이에게 폭력 따위는 전혀 행사하지 않고, 아주 신사적으로 말이다.
나로서는 꽤 놀라운 광경이었다.
윤사해라면 분명 선비를 반쯤 죽여 놓을 줄 알았는데.
‘부상자라서 그런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선비의 상처는 모두 치료가 된 상태였다. 아무래도 광혜원을 불러 그를 치료하게끔 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봐, 선비.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생각이지? 내 질문이 들리면 대답 좀 하지 그래?”
윤사해는 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나 했더니.
“도대체 내 딸이랑 무슨 사이인지, 좋게 말할 때 알려 줬으면 하는데.”
터무니없는 질문에 선비가 아무 답도 해 주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긴, 내가 선비라도 저런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대답을 하든 죽이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하는군. 이봐, 도깨비?”
결국 선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설마 당신 딸을 연모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연모?”
윤사해가 살기를 흘렸다.
“지금 감히 누구를 연모한다고?”
“아니, 그러니까.”
언제는 어떤 대답을 하든 죽이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윤사해는 당장 선비를 죽일 기세였다.
“네까짓 게 내 딸을 연모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제가 당신 딸을 사랑할 리가 없잖습니까!”
“우리 딸이 매력이 없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선비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 계속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겁니까?”
탈쟁이가 윤사해 좀 말려달라는 듯 내게 물었다. 그제서야 윤사해는 나를 발견했다.
“리사.”
“안녕, 아빠. 선비 엄청 재미있게 괴롭히더라?”
“크흠.”
윤사해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여기에는 어떻게 내려온 거니?”
“아빠대신 이매망량의 길드장을 맡고 있었다는 거 잊었어?”
이매망량의 건물 내의 비밀 장소는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뜻.
“선비 그만 괴롭히고 쉬러 가.”
“저 자식이랑 뭐 하려고 그러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아무래도 선비를 그림자로 묶어서 데리고 온 것 때문에 윤사해한테 큰 오해를 사고 만 것 같다.
윤사해는 내 말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아빠, 나 못 믿어?”
“그건 아니다만.”
“내 이상형은 아빠같은 사람인걸?”
선비는 윤사해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얼굴이었다. 체격 역시 그랬고, 풍기는 분위기 또한 달랐다.
“나는 아빠처럼 어깨도 넓고, 선이 굵은 잘생긴 사람이 좋아! 하지만 선비를 봐!”
어깨가 넓기는 하지만 윤사해만큼 넓은 건 아니었다. 역시 미남이기는 했지만, 윤사해처럼 선이 굵은 느낌의 미남은 아니고.
“리사…….”
윤사해가 감격에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아빠. 걱정 말고 자리 좀 비켜 줘. 서 비서님한테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망할 탈쟁이 자식, 이매망량에 쳐들어온 적 있다고.”
“그건.”
“쉿.”
선비의 입을 틀어막고는 웃었다.
“변명은 나중에 하세요.”
선비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윤사해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말했다.
“그래. 잠시 자리를 비켜 주도록 하마.”
“고마워, 아빠!”
“30분.”
“응?”
“30분이 지난 후 내려올 거란다. 그전까지 이야기를 끝마치렴.”
30분밖에 시간을 안 주다니.
‘너무 촉박한데?’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윤사해가 자리를 비켜 주지 않을 줄 알았으니까.’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를 사용해 윤사해의 뺨을 때리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윤사해는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대도깨비님, 저놈이 우리 딸아이한테 허튼짓을 하려고 하면 부디 손 좀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는 인간한테 해를 끼칠 수 없다만?〗
“인간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짐승이라고 여겨 처리해 주십시오.”
〖오…….〗
천지해가 떨떠름한 얼굴을 보였다.
“아빠! 그만하고 어서 가!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 불러서 끌고 가라고 하기 전에!”
내 말에 윤사해가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간만에 둘이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들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잔소리를 듣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제가 아빠를 쫓아냈어요.”
윤사해가 자리를 뜨게끔 만들었다.
선비가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저한테서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겁니까?”
“설마요.”
탈쟁이한테서 칭찬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저세상에 대해 좀 알려 주실래요?”
망할 주인공의 이야기였지.
선비가 살포시 미간을 좁히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저는 아빠와는 다르게 상냥하지 않아요.”
“윤사해 역시 상냥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불만 어린 목소리였지마는.
“그래도 아저씨한테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잖아요.”
나는 그림자를 움직이며 그를 위협했다.
“저세상과 관련해서 거짓말할 생각은 말아 주세요.”
선비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찰나.
쿠구궁!
건물이 금방에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데.
“리사 아가씨!”
류화홍이 다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선비를 위협하던 그림자를 거두고는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습격이에요!”
“유랑단인가요?”
“아니요!”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매망량을 공격하고 있는 자를 알려 줬다.
“이운조 헌터에요!”
“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리사!”
콰과광!
굉음과 함께 지하실 문이 열리며 이운조가 상처투성이인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짧게 혀를 차고는 그녀를 반겼다.
“운조 언니가 이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는데요.”
“시끄러.”
이운조가 조금 전, 선비가 지었던 표정과 똑같이 비틀린 웃음을 보이면서.
“나도 내가 이렇게 멍청한 녀석인 줄 몰랐으니까.”
자조적으로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