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잊힌 이름(3)
“아빠, 그게 말이지.”
“리사.”
윤사해가 내 어깨를 잡고는.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란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함부로 막 범죄를 저지를 사람으로 보여?!”
윤사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빠……?”
크흠, 윤사해가 두 어번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그래서 저 녀석은 누구니?”
말 돌리기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윤사해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선비.”
“뭐?”
내 말에 윤사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라고?”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에 나는 다시 한번 더 또박또박 말해줬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선비.”
그러고는 그림자에 묶여 있는 그를 가볍게 쳤다.
“뭡니까?”
“아빠가 아무래도 아저씨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요. 제대로 인사 좀 해 주세요.”
“허어…….”
선비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는 이내 말했다.
“맞습니다.”
그러고는 윤사해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맨얼굴로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정중한 인사에 윤사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서 비서.”
“네, 길드장님.”
“지금 선비 새끼가 나한테 인사를 했는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가?”
“맞습니다.”
서차웅의 담담한 목소리에 윤사해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리사……!”
그가 앓듯이 나를 부르고는 황급히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다쳤다고 하면 그건 선비다.
하지만 윤사해는 선비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태도로 내게 물었다.
“정말로 없니?”
“응, 그렇게 걱정되면 혜원이 언니한테 물어봐.”
마침, 광혜원이 당황한 얼굴로 다른 길드원들과 함께 있었다.
윤사해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고 있던 건지, 케이크 한 조각을 들고 있는 채로 말이다.
“파티했어?”
“아빠는 필요 없다고 했단다.”
“어쨌든 했다는 거네? 나 빼고?”
“리사 그러니까…….”
윤사해가 허둥지둥 변명하려는 것도 잠시.
“지금 중요한 건 길드원들이 아빠에게 파티를 열어 줬다는 게 아니지 않니?”
곧 윤사해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깝다.’
윤사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선비한테서 신경을 끄게 만들려고 했더니만.
내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 천지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를 놀렸다.
〖실패했구나.〗
“시끄러워요.”
“응?”
“아빠한테 한 소리 아니야.”
존재감을 죽인 채 서 있던 천지해를 잡아 곁으로 이끌었다.
“이 사람한테 한 소리지.”
〖사람이라…….〗
천지해가 묘하게 웃었다.
윤사해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리사, 이 아이는 누구니?”
〖아이라니. 내 아해들과 그렇게 많이 계약 중이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게냐?〗
윤사해가 천지해를 물끄러미 보다 경악했다.
“리사! 너, 설마!”
“내가 아빠한테 미지 영역의 거주자랑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던가?”
“윤리사!”
저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알려주지 않았던 모양인 듯하다.
“너, 정말……!”
윤사해가 말을 하다 말고 뒷목을 잡았다.
“길드장님, 진정하십시오!”
“맞아요, 길드장님. 이제 나이도 있은 분이 그렇게 화내면 안 돼요.”
“아님, 우리 아씨에게 다시 그 자리를 넘기시는 게 어떠시오?”
“하긴, 확실히 리사 아씨가 길드장이었을 때가 즐거웠지.”
“길드도 환했고.”
이매망량의 길드원들이 윤사해를 걱정하다 말고 앞담을 하기 시작했다.
윤사해는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그러고는.
“저 녀석은 내가 맡고 있으마.”
따악―!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그러기 무섭게 윤사해의 아래에서 그림자가 솟구쳐 올라와서는 내게 잡혀 있던 선비를 빼앗아 갔다.
“윽…….”
내게 잡혀 있을 때보다 더욱 강한 힘을 자신을 옭아맸는지, 선비가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
“아빠, 그 자식 너무 세게 잡지 마. 많이 다쳤거든.”
“윤리사.”
조용히 하라는 듯, 나지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감히 예상해 보건데, 이매망량에 들어가자마자 크게 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
“이제 그만 손 내리렴.”
입술을 삐죽이고는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윤리사, 뭘 잘못한 건지 알겠니?”
“함부로 선비 새끼 데리고 온 거?”
“물론, 그것도 있지.”
윤사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후 말했다.
“아빠가 화난 건, 아빠한테 알리지도 않고 선비와 싸운 거란다.”
“안 싸웠다니까? 쓰러져 있던 거 그냥 주워 온 거뿐이야!”
“그래도.”
윤사해가 단호하게 목소리를 뱉어 냈다.
“그래도 아빠한테 알렸어야지.”
선비가 함정을 파놓은 거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냐며, 윤사해가 다그쳐 물었다.
“옆에 운조 언니 있었는데…….”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가 실없이 웃고 말았다.
“윤리사, 지금 웃음이 나오니?”
“그치만.”
오랜만에 듣는 아빠의 걱정에 절로 웃음이 나와 버렸다.
윤리오가 쓰러지고, 윤리타가 집을 나가 버리고. 윤사해가 사라지고.
……저세상이 적이 되고.
모든 가족이 떠나 버린 그 시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가족한테 듣는 걱정이 더 따뜻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괜히 지금까지 나를 걱정해 준 수많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리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반성 중이었어.”
〖거짓말하기는.〗
“대도깨비 님은 제발 조용히 좀 있으세요.”
천지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의 앞에는 류사화와 류홍랑이 앉아 있었다. 천지해가 보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온 아이들이었다.
랑야와는 다르게 보는 맛이 있다며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모른다.
어쨌든 간에.
“선비는 어떻게 할 거야?”
“우선, 이운조를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단다.”
윤사해에게 선비를 발견하고 그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게 된 이유를 모두 말해줬다.
즉, 이운조가 선비를 향해 아는 사이일 것 같다고 한 것도 모두 말해줬다는 뜻.
‘이운조한테는 미안하지만.’
선비를 데리고 오게 된 과정을 들려주려면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사.”
윤사해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당부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야 한단다.”
“응, 걱정 마.”
“그래.”
윤사해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물었다.
“그보다 선비를 저렇게 만든 녀석은 누구인지 아니?”
응, 저세상이야.
바로 튀어나오려던 이름을 애써 삼킨 후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것까지는 몰라.”
나도 안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이라는 걸.
하지만 윤사해에게 저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선비에게 심한 부상을 입힌 사람이 저세상이란 걸 알게 된다면, 윤사해는 분명 죄책감에 괴로워할 테니까.
‘윤사해 잘못은 아무것도 없는데.’
저세상을 자식처럼 여겼던 윤사해라면, 분명 자신의 잘못으로 그가 그릇된 길을 걷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바보.’
『각성, 그 후』에서는 윤사해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던 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윤사해가 아파하지 않았으면 했다.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면 바랐다.
“많이 피곤할 텐데 이만 쉬렴.”
“아빠는?”
“일해야지.”
윤사해가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리사가 잡아 온 선비 녀석을 심문해야 하지 않겠니?”
“심문할 게 뭐 있다고…….”
“비밀이란다.”
윤사해가 미소를 그리고는, 류사하와 류홍랑과 정답게 과자를 나눠 먹고 있는 천지해를 불렀다.
“대도깨비님, 딸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렴, 걱정 말게.〗
그렇게 윤사해가 자리를 떠났다.
혹시라도 선비를 잡아 족칠까 싶어 급히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아해야, 어디를 가려고 그러느냐?〗
대도깨비가 나를 막았다.
“비켜요. 아빠 따라가려고 하는 거니까.”
〖네 아비는 쉬라고 했을 텐데?〗
“안 쉬어도 돼요.”
피곤하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충분히 쉬었다.
하지만 대도깨비는 비켜 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히죽거렸다.
“미지 영역으로 돌려보내는 수가 있어요.”
〖어디 한 번 해 보거라.〗
천지해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그 전에 네가 내 감정에 동조돼서 쓰러지는 게 빠를 것 같지마는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헉!”
갑작스럽게 눈 앞이 어질거렸다.
이런, 망할.
미지 영역의 거주자와의 계약의 단점을 하나 잊고 있었다.
‘감정.’
계약자는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다니!’
지금까지 천지해의 감정을 느낀 적이 없어서 몰랐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천지해를 노려봤다. 빌어먹을 대도깨비는 내 시선에 픽 웃고는.
〖괜히 네 아비를 귀찮게 만들 생각하지 말고 쉬도록 하거나. 그것도 싫으면, 그래. 이운조라는 녀석을 부르는 게 좋겠구나.〗
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까드득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