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잊힌 이름(1)
‘아이야, 왜 울고 있느냐?’
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비가 숨을 들이마셨다.
‘……각시?’
혜향화.
지금의 각시가 아닌, 이전 대의 각시.
수년 전에 죽은 그녀가 웃는 낯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아니다.
‘응? 왜 울고 있는지 말해 보거라.’
‘설은이 저를 놀렸습니다.’
‘설은이?’
‘네.’
각시가 보고 있는 건 과거의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유랑단의 수장에게 구조되었던 어린 날의 자신.
‘저는 이름이 없다면서, 자신이랑 다르다고 놀렸습니다.’
‘사실이잖아!’
그런 아이의 곁에 거북한 얼굴이 나타났다.
‘향화, 제 말이 맞잖아요.’
‘설은, 저 아이에게도 이름이 있지 않느냐?’
‘저도 알아요!’
1010.
설은이 낭랑하게 어린 선비를 부르고는 말했다.
‘그런데 그건 이름이 아니라 숫자잖아요! 그게 어떻게 이름이 될 수 있어요?’
‘설은.’
조용히 하라는 듯, 엄하게 꾸짖는 목소리에 설은이 입을 다물었다.
‘아이야.’
각시가 무릎을 굽혀 앉고서는 어린 선비의 손을 잡았다.
‘너한테도 분명 이름이 있었을 거다. 수장과 함께 이곳에 오기 전, 네게 지어진 이름이. 그러니 잘 기억해 보거라.’
그 말에 자신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
‘없었느냐?’
‘아니요, 있었습니다.’
‘그래, 무엇이었니?’
‘하현(下弦)이요. 성은 이 씨로 흔한 성으로 붙이자고 친구와 그렇게 약속했었습니다.’
친구?
자신한테 그런 존재가 있었던가?
선비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 따위 없었다.
수장의 손을 잡고 그곳을 나오기 전에도, 그 후에도. 또 이렇게 탈을 쓴 후에도.
‘하현이라는 이름, 거짓말이지? 향화, 쟤 분명 거짓말하는 거예요!’
결단코 없었다.
선비는 어린 자신과 투닥거리고 있는 설은을 보며 잠시 두 눈을 낮게 내리깔았다가 몸을 돌렸다.
‘시답잖은 꿈이군.’
***
“언니, 선비 새끼 우는데요?”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이운조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찰나.
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올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이운조가 살포시 미간을 좁히며 두 손을 쫙 펼쳤다.
파지직!
튀는 전기에 나는 급히 말했다.
“탈쟁이요!”
“응?”
“해솔이 언니한테 붙어 있던 탈쟁이가 온 거 아닐까요? 운조 언니가 해솔이 언니한테 부탁했었잖아요! 그 자식 좀 이쪽으로 보내라고!”
“아, 맞아. 그랬지, 참.”
이운조가 푸르게 튀던 전기를 거두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누군가 빠르게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화장실! 화장실 어디 있어!”
“저기…….”
“감사!”
짙은 분홍빛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토악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탈쟁이가 내 집에서 토를 하는 날이 오다니…….”
이운조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보다 쟤, 탈쟁이 맞아?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이 맞기는 한데, 얼굴이 옛날 그대로인데?”
그건 이운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것 같군.〗
지금까지 존재감을 지우고 있던 천지해가 웃는 낯으로 이운조의 말에 답해 줬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왁! 깜짝이야!”
이운조가 놀라 펄쩍 뛰었다.
“뭐, 뭐야? 누구야?”
“저랑 계약한 미지 영역의 거주자예요.”
“미지 영역의 거주자? 저 꼬마가?”
〖편하게 대도깨비 님이라고 부르거라, 아해야.〗
이운조가 숨을 들이마셨다.
“진짜인가 보네?”
〖그럼, 사실이고 말고.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
천지해가 키득거리며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거라.〗
“손님이요?”
이미 손님이 온 상태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천지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한 명 더 있으니까 이러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이운조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천지해를 쳐다봤다.
그는 괜찮으니 어서 현관문을 열어 주라는 듯 싱긋 웃기만 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천지해가 저러는 건가 했는데.
〖실례하오나, 우리 도령께서 이곳에 있는지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가람?!”
〖오, 리사 아씨!〗
뱀 섬에서 만난 이무기, 가람.
그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도령과 함께 이곳으로 여행을 온 것만으로도 모자라 아씨를 만나게 되다니! 쇤네, 오늘 기뻐 날아갈 것만 같소이다!〗
나 역시 만나서 반갑다며 그에게 웃어주려는데.
〖이 녀석아, 나는 안 보이느냐?〗
내 옆에 서 있던 대도깨비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눈을 끔뻑거리던 것도 잠시, 이내 헛숨을 들이마셨다.
〖대도깨비 님?!〗
〖그래, 이 녀석아. 오랜만이구나. 미지 영역에서 보이지 않아 죽은 줄 알았더니, 아주 잘 살아있었군.〗
〖대도깨비 님!〗
가람이 환하게 웃으며 천지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람은 윤사희를 알고 있었지? 천지해 역시 윤사희를 알고 있었고.
그러니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리사, 있잖아. 혹시 저 녀석도.”
“미지 영역의 거주자예요.”
“오, 세상에. 미지 영역의 거주자를 둘씩이나 보게 되다니.”
이운조가 감탄했다.
“아오,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내가 안전 운전 하라고 했지! 속 울렁거려서 죽는 줄 알았네!”
초랭이가 화장실에서 나온 건 그때였다.
성질을 부리며 화장실에서 나온 그가 천지해를 안아 들고 있는 가람을 보고는 그대로 멈춰섰다.
“그 애새끼는 뭐야?”
〖애새끼라니. 말버릇이 고약한 아해구나.〗
“뭐야, 미지 영역의 거주자야?”
초랭이가 비딱하게 웃었다.
“청해솔이 갑자기 왜 서울로 나를 보내는 건가 했더니만, 미지 영역의 거주자 때문이었어?”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야.”
이운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를 부른 건 나거든.”
“너라고?”
초랭이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가 활짝 웃었다.
“뭐야! 그 누나잖아? 예전에 청해솔이랑 같이 있던 전기 몬스터! 또 나를 귀찮게 굴던 그 누나!”
“누구보고 몬스터래?!”
파지직!
이운조의 주위로 푸른 전격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내가 언제 너를 귀찮게 했어? 너 잡으려고 뛰어다닌 걸 그런 식으로 왜곡하지 말지?! 해솔이만 아니면 그냥 잡아서 처넣는 건데!”
그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초랭이의 말에 화를 내는 그 모습은 정말 영락없는 몬스터의 것이었다.
어쨌거나 초랭이는 이운조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야, 어떻게 생각해?”
나한테 말까지 걸면서 말이다.
“너 도깨비의 따님이지? 못 본 사이에 많이 컸네?”
〖쇤네가 곱게 자랐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시끄러워.”
초랭이가 가람의 말을 매섭게 끊어 버리고는 물었다.
“그래서 나는 왜 불렀는데?”
이운조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알려 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알려 줘? 뭐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이운조가 안내했다.
선비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
침대에 누운 선비를 보자마자 초랭이가 입을 열었다.
“선비?”
“바로 알아보네? 같은 탈이라고 해도 탈을 벗은 얼굴은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차림새가 그 새끼니까.”
초랭이가 이운조의 말에 가볍게 답해 주고는 말했다.
“이 녀석, 왜 이렇게 다친 거래? 네가 그랬냐?”
“아니.”
발견했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다며 이운조가 말을 덧붙였다.
“너, 혹시 이 녀석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없어?”
“도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과거.”
느닷없는 이야기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그녀를 쳐다봤다.
이운조의 과거는 『각성, 그 후』에서 다뤄진 적이 없다. 선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운조는 저세상의 동료로, 선비는 그의 적으로.
두 사람은 그렇게 몇 번이고 부딪치며 싸우다 결국에는 죽게 됐다.
다르게 말하자면 공멸.
서로를 죽이려고 들었던 두 사람은 끝내 함께 목숨을 잃었던 거다.
그런데 이운조가 그의 과거를 궁금해하고 있다니.
‘도대체 왜?’
의아해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선비 새끼의 과거는 왜 물어? 그냥 죽여버리면 될 것을.”
초랭이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이운조는 벅벅 머리를 긁고는 외쳤다.
“그냥 이 자식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좀 가르쳐 줘!”
“싫다면?”
“해솔이한테 연락할 거야. 지금 당장.”
이운조가 진심이라는 듯 초랭이를 향해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아오, 진짜.”
초랭이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아는 것만큼 알려줘도 돼.”
“나, 참.”
기가 찬다는 듯 초랭이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이운조를 놀렸다.
“선비 새끼가 전생의 연인이라도 돼? 이런 쓰레기의 과거를 도대체 왜 궁금해하는 거래?”
같은 쓰레기인 초랭이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이운조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그래.”
“뭐?”
“뭐라고요?”
나도 모르게 초랭이와 똑같이 반응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