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아빠와 아들(2)
“싫어.”
짜증 섞인 목소리에 서차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를 향해 백정은 계속해서 날 선 목소리를 뱉어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어차피 내가 죽거나 하면 알아서 깨어날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
“그건 맞는 말인데…….”
서차윤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활짝 웃었다.
“우리 리오는 착하잖아!”
“지랄.”
백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 번만 더 그딴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이면 베어 버릴 줄 알아.”
진심이었다.
하지만 서차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헤실거렸다.
“왜 자꾸 웃는 거야?”
“앙칼진 게 정말 사해 어릴 적이랑 똑같아서.”
“그 인간 이야기는 왜 꺼내?”
“생각나서 꺼내는 거지.”
서차윤이 물끄러미 백정을 보다 손을 들었다. 그렇게 옅게 분홍빛이 도는 머리칼 위에 그의 손이 얹어지려는 찰나.
후웅-!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허공을 베어 버렸다.
〖이 미친놈이!〗
윤사해가 떠난 후, 조용히 있던 랑야가 서차윤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 덕분에 서차윤은 아슬아슬하게 백정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아야!”
서차윤이 엉덩방아를 찧고는 앓는 목소리를 내었다.
랑야의 도움이 없었다면 죽었을 수도 있는데, 그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랑야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는 물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설마요.”
이 세계에서 죽으면 정말 ‘죽음’을 맞이하는 거였다.
‘애초에 나한테 남은 기회는 이제 없지만.’
그래도 죽는 건 싫었다.
설사, 죽는다고 해도.
“뭐야?”
자신으로 인해 엇나가 버린 친구의 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후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서차윤이 방긋 웃었다.
“우리 리오, 사해보다 더 강해진 거 같아.”
검을 뽑는 걸 보지 못했다.
그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백정은 서차윤의 칭찬에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백정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원수였으니.
백정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칭찬도 못해?”
“하지 마.”
불쾌하니까.
백정이 나지막하게 뒷말을 덧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당장에라도 떠날 듯이 구는 그를.
“리오야.”
서차윤이 붙잡았다.
“사해 만나 봐서 알잖아.”
들려오는 이름에 백정이 작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동요를 놓치지 않고 서차윤이 말을 이었다.
“이 세계의 사해는 너희를 한없이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네가 만난 사해는 달라. 그리고…….”
잠시 목소리의 끝을 흐렸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잖아.”
백정이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윤사해를 똑 닮은 보랏빛 두 눈이 거세게 흔들리고 싶었다.
서차윤은 그가 보이는 동요에 옅게 미소를 그리고는 말했다.
“미안해.”
백정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는 서차윤을 뚫어 버릴 듯 노려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
다시는 그를 보지 않을 것처럼 매몰찬 발걸음이었다.
〖붙잡지 않는 거냐?〗
“네.”
서차윤이 씁쓸하게 대답하고는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리오는 착하거든요.”
〖착하다고?〗
랑야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 자식한테 죽을 뻔했는데?〗
“네, 그래도요.”
저는 알아요.
서차윤이 나지막하게 뒷말을 덧붙이고는 힘주어 말했다.
“리오는 착해요.”
랑야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말해 보거라.〗
“뭐를요?”
〖이 세계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고 있는 눈치던데.〗
“그건 리오도 알고 있는 것 같던데요?”
〖인성 파탄 난 인간과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아.〗
인성 파탄 난 건 이 세계의 랑야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하지만 서차윤은 뒷말을 꾹 삼키고는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랑야의 귀에 들리지 않을 테니까.
“리오가 돌아올 때까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랑야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녀석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느냐?〗
“네.”
서차윤이 배시시 웃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백정은, 아니.
“리오는 착하다고요.”
랑야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뒤로하며 서차윤이 입을 열었다.
***
〖네 아버지는 저 안에서 하루 종일 있을 생각인가 보구나.〗
천지해가 지루하다는 듯 크게 하품하며 물었다.
“리오 오빠랑 오랜만에 만난 거니까요.”
〖네 녀석이랑도 오랜만에 만나지 않았느냐?〗
“저랑은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 많이 나눴잖아요.”
〖그래도 부족할 텐데?〗
천지해가 금빛 눈을 반짝거렸다.
〖질투 나지 않느냐?〗
질투는 무슨.
“제가 어린아이인 줄 알아요?”
〖내 기준으로 네 녀석은 한없이 어린 아해란다.〗
“시끄러워요.”
천지해가 재미있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모습을 취하고 있어서일까?
꼭 누나를 놀려먹은 게 즐거워 웃는 아이처럼 보였다.
〖그보다 아해야.〗
“왜요.”
〖아무래도 내 말대로 네 오라비가 움직인 모양이구나.〗
“리오 오빠는 누워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움직였다는 거예요?”
라고 묻는 찰나.
“리오? 리오!”
윤사해가 다급하게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외침에 곧장 병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아빠! 무슨 일이야?!”
“리사! 리오가……!”
윤리오의 생체 리듬이 날뛰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곧장 의사를 호출했다.
〖의원 나으리를 부를 필요는 없을 텐데.〗
“시끄러워요!”
천지해를 향해 버럭 소리 질러준 후, 곧장 윤리오의 손을 잡았다.
“오빠, 내 말 들려?”
대도깨비의 말대로 『각성, 그 후』의 백정이 이 세계의 윤리오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거라면.
“제발 부탁할게.”
이 목소리가 ‘윤리오’에게 닿기를 바라며 나는 말했다.
“오빠가 일어나게 해 줘.”
***
“들었지?”
서차윤이 활짝 웃으며 백정에게 물었다.
백정은 서차윤의 말대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데?’
자신이 아닌, 또한 ‘백정’이 아닌 윤리오를 깨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였다.
그 질문에 서차윤은 활짝 웃으며 방법을 알려 줬다.
그렇게 들은 건.
‘오빠, 내 말 들려?’
‘제발 부탁할게.’
‘오빠가 일어나게 해 줘.’
희미해진 여동생의 목소리였다.
백정이 두 눈을 잘게 떨며 물었다.
“리사가 정말 살아 있어?”
“응.”
서차윤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말했다.
“지금, 보자. 열여덟 살일 걸?”
“열여덟 살…….”
백정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자신이 기억하는 여동생은 제 무릎을 겨우 넘는 아이였는데.
“열여덟 살이라고.”
얼마나 컸을까?
도대체 얼마나 예쁘게 컸을까?
백정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보고 싶다고, 보러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그렇게 서차윤의 멱살을 붙잡고는 애원하게 될 것 같았다.
제발, 여동생을 만나게 해 달라고.
백정이 크게 숨을 내뱉고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서차윤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데?”
“그쪽 세계와 연결은 제대로 된 것 같으니, 이제 가야지.”
“간다고?”
“그래.”
서차윤이 싱긋 웃었다.
“네 동생이 살아 있는 세계의 너를 만나러 가는 거야.”
그러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네가 보기에는 꽤 멍청하게 보일 거야.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
“내 얼굴로 바보같이 웃고 있지만 않으면 돼.”
“그러고 있을 텐데?”
백정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보며 서차윤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그래도 갈 거지?”
“그래.”
백정이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바라는 일이다. 백정은 뭐든 들어줄 수 있었다.
비록, 이 세계의 ‘윤리사’는 지키기 못하고 떠나보냈지만.
‘다른 세계의 나는 그러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렇기에 백정은 말했다.
“시간 끌지 말고 어서 시작해.”
“좋아.”
서차윤이 옅게 분홍빛이 도는 머리칼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 백정은 그 손을 쳐내지 않았다. 검을 휘둘러 베어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불쾌하다는 듯, 서차윤을 노려볼 뿐.
닿는 시선에 서차윤이 웃고는.
“다녀와, 리오야.”
그대로 백정의 뒷목을 강하게 내리쳐 버렸다.
“……!”
백정은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그대로 정신을 잃게 됐다.
〖괜찮겠냐?〗
“리오요? 괜찮아요.”
서차윤이 겉옷을 벗어 기절한 백정의 위에 덮어 주며 웃었다.
하지만 랑야는 말했다.
〖아니, 너.〗
그가 걱정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자식 깨어나면 네놈을 죽이려고 들 것 같다만?〗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서차윤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