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찾는 것도 일이다(4)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파르르 입술을 떨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단예야? 단이야?”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멈칫하더니 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리사.”
“리사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어나 나를 반겼다.
“오래간만이야.”
“어서 와.”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단예야! 단이야!”
와락, 그들을 껴안으며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희가 왜 여기 있어?”
“에일린 님께서 부르셨거든. 리사, 네가 온다고.”
“엄마가?”
“응.”
단예가 미소를 그렸다.
“예전에 우연히 만난 적이 있거든. 그 인연으로 꾸준히 연락을 나누게 됐어.”
그 인간이랑?
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급히 삼켰다.
“그래서 엄마가 너희한테 알려 준 거야? 내가 온다고?”
단예와 단이가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리사, 너무한 거 아니야?”
단이가 불퉁하게 물었다.
“미국까지 왔으면서 우리를 보지 않고 가려고 하다니.”
“그게…….”
솔직하게 말하면, 단예도 단이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오직 ‘윤사해를 데리고 돌아와야 한다’라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이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나를 보고는 웃었다.
“괜찮아. 이해해.”
단이는 못 본 사이에 완전히 어른이 되어 있었다.
‘도윤이보다 체격은 작지만.’
그래도 그새 성장해 있었다.
단예는 예나 지금에나.
‘예쁘구나.’
한 떨기 꽃 같은 것이, 그들의 할아버지인 한태극이 왜 그렇게 싸고도는지 이해가 가는 심정이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 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리사, 너도.”
단예가 내 손을 꼭 끌어 잡고는 입을 열었다.
“너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야.”
눈웃음을 지으며 건네는 목소리에 배시시 웃어 주었다.
“그럼, 자리에 앉아서 잠시 이야기 좀 나눌까?”
“이야기?”
나 역시 단예와 단이와 그간의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빠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단이가 웃으며 말했다.
“오래 잡고 있지는 않을 거야. 에일린 님의 부탁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생각은 없거든.”
“솔직하게 말하면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
단예가 그 말을 거들었다.
“어쨌든, 30분만.”
그러면서 단예는 웃었다.
“30분만 우리와 어울려 줘. 그 정도는 괜찮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30분이고 자시고 하루 종일 떠들고 싶었지마는.
‘그건, 다음에.’
한국으로 돌아가, 단아와 도윤이도 함께 하는 장소에서. 그때 친구들과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윤사해가 있는 집에서, 윤리오가 깨어난 바로 나의 보금자리에서.
그리고.
‘윤리타.’
그 빌어먹을 둘째가 돌아온 우리 집에서 말이다.
“그런데 리사야.”
“응?”
“옆에 있는 분은 누구셔?”
아, 맞다.
단예와 단이한테 천지해를 소개해 주는 걸 잊었다.
사실, 그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머쓱하게 뺨을 긁적인 후 두 사람에게 천지해를 소개해 주려는데.
〖이 몸은 대도깨비 님이시다.〗
천지해가 스스로 자신을 밝혔다.
단예와 단이가 놀란 듯 두 눈을 끔뻑이는가 싶더니 웃으며 말했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님이신가요?”
“대도깨비 님이라고 한 것을 보니, 도깨비 님들 중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분이신가 보네요.”
“리사가 미지 영역의 거주자님과 계약을 맺었을 줄이야.”
“윤사해 전 길드장님을 생각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지.”
“그건 그래.”
단예와 단이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눴다.
천지해는 그들의 모습에 당황한 듯 내게 속삭이며 물었다.
〖저 녀석들은 도대체 무엇이냐?〗
“제 친구들인데요.”
〖네 친구들?〗
천지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친구들이 저렇게 똑똑하다니. 정말 신기하구나.〗
이 망할 도깨비가 뭐라는 거야?
“내 친구들이 똑똑한 게 왜 신기한데요?”
〖그야, 네 녀석은…….〗
천지해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고는 애잔하게 웃었다.
그것이 더 기분 나빠 한 대 치려는데 단예가 말했다.
“리사, 대단해.”
“응?”
“미지 영역의 거주자님과 계약을 맺었다니.”
그 말을 뒤이어 단이가 웃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줄 수 있을까? 사실 궁금한 게 많아. 30분이라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단이의 말에 나는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
나는 단예와 단이의 앞에 앉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우리 따님께서 친구들이랑 만난 모양이야.”
“친구들?”
“한태극 의원의 손주들. 만나 본 적 있지 않아?”
윤사해가 살포시 미간을 좁히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는군.”
분명, 한태극에게 세 명의 손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분명하게 기억났지만 나머지 둘은 흐릿했다.
‘린이 말하는 게 그 나머지 둘인가 보군.’
자신이 다른 세계로 떨어질 때에, 한국에 있던 한태극의 손주는 단 한 명.
자신이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아이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그 아이들이 지금 미국에 있나?”
한태극의 다른 두 손주가 미국에 있을 줄은 몰랐다.
에일린 리가 윤사해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응, 유학 중이래. 자기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윤사해가 어깨를 으쓱였다.
“리사와 관련된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 잊었다는 말이었다.
에일린 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자기가 나랑 결혼할 때를 생각하면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윤사해가 얼굴을 찌푸렸다.
“옛날 일은 꺼내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내가 자기 말을 들을 위인이야?”
그건 그랬다.
윤사해가 장난기 가득한 전 부인의 얼굴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응?”
“리사랑은 언제 만날 수 있는 거지? 그 친구 녀석들이랑 헤어지면 만날 수 있는 건가?”
에일린 리가 입술을 오므렸다.
“우리 따님께서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가 봐?”
당장 윤리사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면서 멱살을 잡을 줄 알았다.
“우리 자기도 나이를 먹기는 먹었구나?”
얼굴은 옛날 그대로인데 말이다.
적어도 에일린 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의 칭찬에 윤사해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그 친구 녀석들과 헤어진 후, 리사를.”
“만날 수 있어.”
에일린 리가 윤사해의 말을 끊고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사실, 한 일주일은 미국 여행을 시켜 줄까 했거든?”
“뭐?”
“우리 따님께서 미국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또 언제 이렇게 미국에 오겠어?”
설사 온다고 해도 그때는 편하게 관광을 할 수 없을 거다.
“그래서 엄마가 된 도리로 여러 곳을 구경시켜 주려고 했는데.”
에일린 리가 픽 웃었다.
“싫은가 보더라고.”
“좋아할 줄 알았던 건가?”
“아니.”
경쾌한 대답과 함께 에일린 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따님, 자기를 보러 한달음에 여기까지 달려왔잖아.”
그런데 여행이라는 이름하에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다니.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잖아?”
그럼에도 에일린 리는 그런 여정을 준비했다.
‘왜일까?’
에일린 리가 윤사해를 물끄러미 보다 픽 웃었다.
“어쨌든, 우리 따님. 오늘 중으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랑 좀 어울려 줘.”
윤사해의 잔에 손수 와인을 따라주면서 에일린 리가 웃었다. 그에 윤사해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누가 보면 너와의 만남이 이번이 끝인 줄 알겠지?”
“아니야?”
에일린 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자기가 이렇게 나를 찾아올 일이 앞으로 있을까?”
“없겠지.”
윤사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내가 먼저 너를 찾을 일은 없을 거다.”
그 대신.
“네가 먼저 연락하면 몰라.”
에일린 리가 놀란 눈을 보였다.
윤사해는 그 표정을 무시하며 잔을 들었다.
버려진 세계라고 했던가?
그곳에서 ‘백정’이 된 아들과 함께 다니며 배운 것은 하나였다.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자.
내 곁에 있는 가족을, 친구를, 내 사람들을.
‘보듬자.’
후에 그들을 잃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자기는…….”
에일린 리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너도 그래.”
윤사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말을 덧붙였다.
“리사를 위해 여행을 준비하다니.”
물론, 윤리사의 마음에는 하나도 들지 않는 여행인 것 같지마는.
“리오와 리타를 위해서도 움직였다고도 했잖아.”
윤사해가 옅게 미소를 그렸다.
“너 역시 많이 달라졌어, 린.”
에일린 리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결합하자고 하면 해 줄 거야?”
“아니.”
윤사해가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 에일린 리는 더욱더 크게 웃었다.
벌컥!
문이 열리며.
“아빠!”
윤리사가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