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고작 그 정도(2)
저세상이 유랑단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격을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저세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자 저세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그러면서 그는 물었다.
“설마 내가 혼자 온 줄 알았어?”
할 말이 없었다.
저세상의 말대로 그 혼자 이곳에 왔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귀수산은 오직 명패를 가진 자만 출입이 가능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자유롭게 귀수산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류화홍.
그리고 그와 똑같은 이동계 각성자뿐.
‘선비.’
류화홍과 똑같은 이동계 각성자인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유랑단은 이매망량과 완전히 척을 지기로 한 건가 보네?”
“설마요.”
선비가 손사래를 쳤다.
“이건 저희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런 것치고는 우리 길드를 너무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그렇기는 하지만 저희가 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기야 엄밀히 말하자면 이매망량을 엉망으로 만든 건, 탈이 아닌 저세상이었다.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저세상은 유랑단과 관계가 없단 소리로 봐도 되는 걸까?”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선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계셨으면 하는군요.”
선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저세상 군은 저희 수장님의 총애를 꽤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유랑단과 아무 관계가 없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정말 질투 난단 말이죠. 오랫동안 곁을 보좌해 온 저보다 저세상 씨를 아끼는 것 같아서요.”
이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저세상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그림자를 움직였다.
저세상 혼자서 이매망량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나, 탈쟁이들을 놓아줄 마음은 없었다.
더욱이 저세상 역시 빠져나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이매망량의 어린 길드장님께서 저희와 싸울 모양이네요.”
이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조롱하듯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비는 저세상에게 의향을 물었다.
유랑단의 수장으로부터 총애를 많이 받고 있다고 하더니, 탈쟁이들 사이에서 힘 좀 쓰나 보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저세상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죠.”
“뭐?”
그렇게 물은 건 나였다.
“이매망량을 이렇게 망가뜨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감히, 돌아가겠다고?
더욱이 저세상이 어디로 돌아가겠다는 건지는 안 봐도 뻔했다.
‘유랑단.’
그 빌어먹을 지하 길드로 돌아가겠다는 거겠지.
‘절대로 그렇게는 안 둬.’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곧장 그림자를 움직였다.
내가 노린 건 저세상.
“큭?!”
……이 아니라 선비였다.
이대로 저세상을 붙잡는다고 해도 선비가 이동 스킬을 사용하면 끝이었으니까.
우선, 선비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선비 씨, 뭐해요?”
“시끄럽습니다!”
선비가 자신을 묶고 있는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내가 풀어주기 전까지는 못 벗어날걸?”
비딱하게 웃으며 비아냥거리자 선비가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릴 적에는 귀여운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군요.”
“원래 사람은 크면서 변하는 법이니까.”
그러니 저세상도 저렇게 변했겠지.
나는 표정을 굳히고 저세상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윽!”
갑작스럽게 쇄도한 공격에 저세상한테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가 보네요? 나름대로 심장을 노린 건데 이렇게 쉽게 막으시다니.”
이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를 칭찬했다. 가까스로 빌어먹을 탈쟁이의 공격을 막은 나는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이매는 자신의 공격을 내가 쉽게 막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공격을 막은 검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한 번 더 공격이 쇄도하면 막아낼 수 없으리라.
“길드장님!”
구원이 도착한 건 그때였다.
“괜찮으신가요?”
류화홍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야가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돕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팔,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도 되니 목숨만 붙여놓으세요.”
“네, 길드장님.”
사야가 거대한 낫을 꺼내 쥐고서는 미소를 그렸다. 그 모습에 이매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것, 참. 예쁘게 생기신 누님께서 너무 살벌한 거 아니에요?”
사야는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을 뿐이었다.
어찌 됐든 덕분에 편하게 저세상을 편하게 상대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주변 상황을 한번 둘러보고는 작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리사, 너는 정말 일을 조용하게 처리하는 법이 없구나?”
“네가 저질러 놓은 것 좀 봐.”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질문을 던졌다.
“내가 조용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저세상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 사슬을 꺼내 들었다.
바라던 바다.
그렇게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아해야, 그만하거라.〗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천……!”
〖내 진명을 계속해서 부를 생각인 게냐?〗
입을 다물고는 놀란 눈으로 천지해를 바라봤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가 크게 하품하고는 구시렁거렸다.
〖주변이 아주 엉망이 됐구나. 이 몸이 다치지 않은 게 용한걸. 아, 살짝 긁히기는 했구만. 그래서 돌아오는 도중에 놓친 거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급하게 그에게 물었다.
“아빠는요?”
〖음?〗
“우리 아빠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했잖아요!”
그게 바로 계약의 조건이었다.
천지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었다가 활짝 웃었다.
〖놓쳤다.〗
“뭐라고요?!”
이 망할 도깨비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아빠 지금 어디 있어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돌아온 건 확실하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내 아해들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거든. 바다 건너 멀리 있는 것 같다마는.〗
어쨌든 윤사해가 이 세상에 돌아온 건 확실하다며 천지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보다 지금은 저 녀석에게 집중해야 하지 않느냐?〗
천지해가 가리킨 사람은 바로 저세상이었다.
저세상이 눈에 띄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도깨비.”
〖오랜만이다, 아해야.〗
천지해가 유쾌하게 저세상을 향해 인사했다.
나는 놀라 물었다.
“아는 사이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모르지.’
내가 알지 못하는 『각성, 그 후』의 이야기 뒷부분에서 서로 알게 된 걸 수도.
어쨌든 내 질문에 천지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알고 있는 사이이기도 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이기도 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쏭달쏭한 소리를 늘어놓는 도깨비는 잠시 무시하기로 했다.
대도깨비도 정신을 차렸겠다.
지금은 저세상을 잡는 데 집중해야 했다.
‘대도깨비의 말로는 윤사해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했으니까.’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해도 그거야 찾으면 되는 일.
그렇게 저세상을 붙잡고자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데.
〖놓아주는 게 좋을 거다.〗
천지해가 나를 막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천지해가 내 부름에 답했을 때, 그는 분명 말했다.
원한다면 ‘저세상’이란 존재를 이 세상에서 제거해 주겠다고.
분명 그랬는데 이제 와서 놓아주는 게 좋을 거라니?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비켜요!”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천지해가 싱긋 웃고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기 무섭게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윽……!”
선비를 묶고 있던 그림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당황해하고 있는 탈쟁이를 향해 천지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뭐 하고 있느냐? 어서 네 친구들을 데리고 썩 꺼지거라.〗
선비가 물끄러미 천지해를 보다가 모습을 감췄다.
사야와 함께 싸우고 있던 이매와 함께.
그리고.
“저세상!”
저세상과 함께 말이다.
천지해는 그들이 사라진 후에야 내 손을 놓았다. 하지만 빠져나간 힘은 돌아오지 않았다.
“길드장님!”
이매와 한바탕 전투를 치렀던 사야가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후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지로 들어 천지해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 계약자께서는 어른에 대한 예의와 공경을 배우지 못했나 보군.〗
“네, 그딴 거 배우지 못했으니까 어서 대답이나 해요.”
이를 갈며 짓씹듯이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도깨비 님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요?”
〖알다마다.〗
천지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의 계약자인 네 행복을 위해 일하지 않았느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행복을 위해 저세상이 도망치게 해 준 거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나의 감정이 저 망할 도깨비한테 전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은 내 바람을 망쳤어요.”
천지해는 그저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저세상을 쫓고 싶었지만, 이제 다른 일에 집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