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하늘과 땅, 바다(5)
“네.”
나는 두 손을 꼭 주먹 쥐고서 담담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빠를 데리고 돌아와 주세요.”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하느냐?〗
묻는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천지해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거짓말.〗
미지 영역의 거주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사실은 네 가족을 그렇게 만든 놈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지 않느냐?〗
주먹 쥔 손이 움찔거렸다.
천지해가 나의 작은 동요를 알아차리고선 웃었다.
〖속일 생각 하지 말거라.〗
그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러면서 그는 나를 향해 금빛 눈을 반짝였다. 마치, 나란 인간을 탐색하는 것처럼 말이다.
홀린 듯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 눈빛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제가 어떤 마음인지도 알지 않나요?”
천지해의 말대로, 나는 저세상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했다.
하지만 그건.
“제가 할 일이에요.”
내 손으로 이뤄낼 일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 아빠나 무사히 데리고 와 주세요.”
나와 계약하여 미지 영역 밖으로 나오고 싶다면 말이다.
〖호오…….〗
천지해가 흥미롭다는 듯 웃고는 입을 열었다.
〖좋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계약을 하지 않겠느냐?〗
천지해가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고민 않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
쨍그랑-!
남자의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바닥과 부딪쳐 산산이 조각났다.
그의 앞에서 차를 음미하고 있던 또 다른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묻는 목소리에 남자가 파르르 떨며 말했다.
“윤리사가 대도깨비와 계약했어.”
“네?”
대도깨비라니?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에게 도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존재도 있답니까?”
“네, 있어요.”
대답해 준 건 또 다른 남자였다.
그가 저보다 어린 남자가 깨뜨린 찻잔을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도깨비들이 경의를 표현하는 유일무이한 존재.”
하지만 그 존재를 이매망량의 어린 주인께서 불러냈다니.
하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미소를 내보이며 저보다 어린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래.”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질문을 던진 남자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세상 군께서는 이매망량의 어린 주인이 그 존재를 불러냈다는 걸 어떻게 아시는 거죠?”
남자는, 아니.
저세상은 들려온 질문에 두 손을 꼭 주먹 쥐었다.
그거야 자신이 그 존재를 잠들게 만들었으니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이 아닌, 떠나온 세상에서 말이다.
그런데 떠나온 세상에서 잠들었던 대도깨비가 조금 전 눈을 떴다.
‘안 돼.’
대도깨비가 눈을 뜨는 건 나중의 일이 되어야 했다.
그가 눈을 떴다는 건, 즉. 윤사해가 머지않아 돌아오게 될 거라는 말인데…….
‘막아야 해.’
윤사해는 지금 돌아오면 안 됐다.
그라면 자신이 이 세상에 뒤집어씌운 『각성, 그 후』에 크게 영향을 받을 테니까.
윤리오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
적어도 윤리사가 자신을 죽여 이 세상에 덮어 씌워진 『각성, 그 후』를 제거하기 전까지 윤사해는 버려진 세상에 있어야 했다.
“선비.”
저세상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앞에서 찻잔을 음미하고 있던 남자가 왜 부르냐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저세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문을 열어 줘.”
“문이요?”
“그래.”
곧, 그의 손에 사슬이 들렸다.
“지금 당장 이매망량이 있는 귀수산으로 간다.”
***
쏴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이 흔들렸다.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리사 길드장님, 죄송하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대답했지만 서차웅은 내게 기어코 질문을 던졌다.
“정말, 저 아이가.”
아니.
“저 거주자께서 윤사해 전 길드장님을 데리고 돌아올 수 있답니까?”
서차웅이 말을 고치고는 물었다.
못 미덥다는 듯이 내뱉는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믿기가 힘들었거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윤사해를 데리고 돌아오겠다던 미지 영역의 거주자는 돌연 잠에 들어 버렸으니까.
그냥 자는 것도 아니었다.
〖크어어.〗
아주 코를 골며 꿀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도저히 미지 영역의 거주자라고는 보이지 않는 행색이었다.
당장 내가 만난 미지 영역의 거주자와는 다르게 품위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안 깨워도 되겠습니까?”
서차웅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천지해를 쳐다봤다.
꾸벅꾸벅 넘어가는 고개에 담이 결리는 건 아닐까 걱정되나 보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잘못 자서 담이 결리다니.
‘재미있겠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픽 웃고는 말했다.
“우선은 저대로 두죠.”
천지해는 분명 말했다.
윤사해를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그것이 계약 조건이니 그는 분명 자신이 한 말을 지킬 터.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길드장님, 저대로 두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침대도 아니고 책상 위에서 저러고 자고 있는데.”
류화홍의 말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광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로 옮기죠?”
“그러다 깨면 어떻게 합니까?”
서차웅의 질문에 광혜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깨는 거죠.”
저 망할 언니가!
참고로 광혜원은 오늘 소란이 있을 때, 의무실에서 쿨쿨 자고 있었단다.
지금 꿀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저기 있는 미지 영역의 거주자와 똑같이 말이다.
새삼스레 골치가 아파져 이마를 짚는 그 순간이었다.
콰과광-!
굉음과 함께 귀수산이 흔들렸다.
***
〖아, 이런. 큰일 났군. 그 자식이 알아차렸나 보네. 하긴, 이렇게 눈을 떴으니 알아차릴 만도 하지.〗
천지해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눈을 뜨기 전까지 그 자식에 대한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나참,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가 돌연 고개를 들고선 활짝 웃었다.
〖다들 안녕하신가?〗
윤사해를 비롯한 모두가 떨떠름한 얼굴을 보였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천지해는 그 모습들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많이들 놀랐나 보군? 하긴, 그럴 만도 해. 나처럼 대단한 놈을 만날 기회는 생전에 얻기 힘들, 어헉!〗
천지해가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럽게 멱살이 잡혔기 때문이다.
“리오!”
그의 멱살을 잡은 건 다름 아닌 백정이었다.
윤사해가 다급히 그를 불렀지만, 백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눈앞의 거주자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리사가 당신을 불러냈어?”
〖뭐?〗
“내 동생이 당신을 불러내 계약을 맺었냐고!”
천지해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 히죽거렸다.
〖그래.〗
백정이 침음을 흘렸다. 그와는 달리 천지해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아해야, 너무 그러지 말고. 우선 나를 좀 놓아 주지 않겠느냐? 겸사겸사 내 몸을 묶고 있는 이것도 좀 풀어 주고.〗
백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오, 진정하고 비키렴.”
윤사해가 아들의 어깨를 짚고서는 다정하게 달랬다.
“그래, 리오. 그분을 어서 놓아 줘.”
서차윤이 윤사해의 옆에서 그의 말을 거들었다.
백정은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로 천지해를 노려보다가 그를 놓아 줬다.
〖나, 원. 이것도 풀어달라니까?〗
천지해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제가 풀어 드리겠습니다.”
윤사해가 그림자를 움직여 가볍게 그를 나무한테서 풀어 줬다.
〖고맙군! 계속 묶여 있었으면 꽤 곤란할 뻔했어.〗
“아닙니다. 그보다…….”
윤사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정말 대도깨비님이십니까?”
〖그럼!〗
천지해가 활짝 웃고는 윤사해의 뒤로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을 향해 대답을 구했다.
〖그렇지, 랑야?〗
랑야가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랑야가 존댓말을 사용하는 이라니!
윤사해가 놀란 얼굴로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토해냈다.
“당신은 정말 대도깨비님이시군요.”
〖그렇다니까!〗
천지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네가 바로 그 맹랑한 녀석의 아비겠지?〗
윤사해는 천지해가 말한 ‘맹랑한 녀석’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윤리사.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신의 하나뿐인 딸.
윤사해가 그리움에 잠겨 먹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지해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 딸인, 내 계약자께서 부탁하시더군.〗
그러면서 그는 윤사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를 데리고 돌아와 달라고.〗
윤사해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