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하늘과 땅, 바다(3)
“그걸 용케 기억하고 계시네요.”
흘러가듯 말한 것을 말이다.
“제가 기억력이 좋거든요.”
진달래가 싱긋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참.
진달래가 나가다 말고 멈춰섰다.
“장천의 회장님께서 그런 이야기도 하셨어요.”
“무슨 이야기요?”
“성유물이 건네주는 힌트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진달래가 그 말을 남기고서 웃는 낯으로 말을 끝마쳤다.
“길드장님께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요.”
그럼, 이만.
정말로 가보겠다며 진달래는 병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리오 오빠, 정말 저 사람 알아?”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는데도 나는 그렇게 물었다.
***
윤리오의 병문안을 끝내고 이매망량으로 출근한 나는 쉽사리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길드장님, 무슨 고민 있습니까?”
“네?”
“그렇게 보여서 말입니다.”
서차웅이 멋쩍게 말했다.
“털어놓기 힘든 고민이라도 말해주시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으니.”
“그럼,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서차웅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 비서님은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요?”
서차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이랑 바다, 땅…….”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이런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군요. 괜찮으시다면 다른 길드원 분들께 한 번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괜찮아요.”
이매망량의 다른 길드원들에게 묻는 순간 그날로 난장판이 되고 말 거다.
서로 자신들의 말이 옳다면서 내기를 하자니 뭐니 그렇게 나오겠지.
신성한 길드에서 내기판이 벌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감사해요.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어요.”
“그렇습니까? 별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은데…….”
서차웅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 척 넘기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성유물이 건네주는 힌트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진달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물론, 장천의가 내뱉은 소리라고는 하지만 말이지.
“서 비서님.”
“네, 길드장님.”
“진달래라고 들어보셨나요?”
“진달래요?”
서차웅이 두 눈을 끔뻑거리다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내게 되물었다.
“혹시 CW의 회장 대리인 진달래 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네, 맞아요. 유명하신 분인가 보네요.”
“아무래도 그런 편입니다.”
서차웅이 서류를 정리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장천의 회장님께서 종적을 감추신 후, CW가 많이 휘청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일조한 사람이 바로 장천의 회장님의 비서였던 진달래 씨입니다.”
지금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회장 대리를 맡고 있다며 서차웅이 입을 열었다.
“리타 도련님과도 많이 친하셨는데 말이죠.”
윤리타.
그 이름을 내뱉은 서차웅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렇군요.”
윤리타와 친했다면 윤리오와도 친했을 거다.
즉, 진달래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의심했다니.’
그녀의 눈에 내가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을까?
‘됐어.’
남의 시선 따위 생각해 봤자다.
‘그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림자 속에서 피리를 꺼냈다.
“그건 뭡니까? 윤사해 전 길드장님께서 들고 다니시던 것과 똑같이 생겼군요.”
“그야, 아빠가 가지고 다니던 거랑 같은 물건이니까요.”
“네?”
서차웅이 놀라 물었지만 나는 별다른 설명은 해 주지 않고 피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계속 가지고 있기만 할 바에야 두 눈 감고 한 번 불어보기로 한 거다.
삐이-!
피리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낯선 소음이 귓가를 울렸다.
‘이거 맞아?’
아무래도 윤사희가 사기를 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계약을 원하는 거주자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푸른 시스템 창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가 부를 수 있는 거주자는 이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문구가 바뀌었다.
윤사희가 내게 일러준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이 세상을 이루는 것.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당연히 이 이름은 아닐 거다.
세상 어떤 거주자의 진명이 저런 식일까?
나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천지해.”
하늘 천(天).
땅 지(地).
바다 해(海).
천지해가 아니라고 하면 다른 식으로 조합해 볼 작정이었다.
일단 지르고 보자.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시스템 창의 문구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정답일까?’
확실치 않은 마음에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믿어 보기로 했다.
서차웅이 일러준 대답을.
그뿐만이 아니라 단아와 도윤이, 그리고 청해솔이 말해 준 것들을 말이다.
곧, 시스템 창의 문구가 바뀌었다.
아니.
“어?”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길드장님, 왜 그러십니까?”
긴장감 어린 얼굴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서차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내 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은 서차웅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게…….”
더듬더듬 입을 열려는 찰나.
파앗!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윽?”
황급히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길드장님!”
“저는 괜찮아요!”
내게 다가오려는 서차웅을 자리에 있게 하고서는 빛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환하게 터지던 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서 비서님은요?”
“저도 괜찮습니다.”
그때였다.
“길드장님! 무슨 일입니까!”
“길드장님, 괜찮으세요?!”
우당탕!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길드원들이 넘어지듯이 들어왔다.
그 위로 류화홍이 나타났다.
“길드장님, 괜찮으세요? 집무실 안이 갑자기 엄청나게 빛나던데요!”
“괜찮아요. 그보다 그걸 어떻게 본 거예요?”
“그야, 밖에서 땅따먹기 하는 중이었으니까요!”
해맑게 말하는 유부남의 목소리에 이마를 짚는 순간이었다.
〖이것, 참. 오랜만에 나왔다 싶었더니 환영 인사가 꽤 시끄럽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서차웅도, 그리고 류화홍도.
우리뿐만이 아니라 내 집무실에 들이닥친 모든 길드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나를 부른 아해는 이 중에서 누구인지 내 물어도 되겠느냐?〗
내 무릎을 겨우 넘길 정도의 작은 아이가 뒷짐을 지며 물었다.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지해?”
아이가 두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나를 부른 인간이 너인가 보구나, 아해야.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순식간에 내 앞에 다가온 아이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나와 계약을 하겠느냐? 내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참이라 어서 너와 계약을 맺고 싶구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히죽거렸다.
아이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눈앞의 존재는 미지 영역의 거주자였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계약을 한다고 하면요?”
〖음?〗
“제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데요?”
미지 영역의 거주자는 계약자의 소원을 이뤄 주는 것을 대가로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됐다.
가까스로 이 사실을 기억해낸 나는 긴장감 어린 얼굴로 물었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구나! 이 나와 감히 흥정이라니!〗
그것도 잠시, 아이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내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너. 가만 보니 내가 아는 녀석이랑 닮았는데?〗
아이가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윤사희.
분명 그녀를 말하는 것일 터.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누구랑 닮았다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그보다 어서 대답이나 해 주시죠?”
〖흐음.〗
아이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
“길드장님, 얘 도대체 뭐예요?”
류화홍이 아이의, 아니. 어린 모습을 취하고 있는 미지 영역의 거주자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화홍이 오빠! 당장 놓아 줘요! 걔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
〖호오, 이 난쟁이 똥자루만 한 놈이 감히 나를 든 것이냐?〗
아이가 히죽거렸다.
그보다 난쟁이 똥자루만 하다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일단은!’
저 망할 미지 영역의 거주자를 류화홍에게서 떼어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움직이기 전에 나에 의해 소환된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먼저 움직여버렸다.
〖내게 함부로 손댄 것에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아이의 두 눈이 번뜩였고.
“안 돼!”
나는 류화홍의 손에서 미지 영역의 거주자를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창문이 열리며.
후웅-!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과 똑같은 세기의 산들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천지해’라는 진명을 가진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입을 쩍 벌렸다.
〖내, 내 힘이……!〗
잔뜩 놀란 얼굴을 뒤로하며 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