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하늘과 땅, 바다(2)
비가 그쳤고 친구들이 떠났다.
단아도 도윤이도 나와 함께 더 놀고 싶어했지마는.
“한단아! 네 이 놈!”
단아는 할아버지인 한태극에 의해 잡혀갔고.
“백도윤!”
도윤이는 백시진에 의해 잡혀갔다.
백시진이 말하기를 백시준은 지금 급한 일로 직장에 나가 있단다.
어쨌든 다시 혼자가 됐다.
조금 전까지 친구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있었던지라 외롭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마는.
‘괜찮아. 다시 만날 텐데, 뭐.’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쓸데 없는 사색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손에 쥔 대나무 피리를 흘긋 쳐다봤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불고 싶지마는 윤사희가 말한 거주자의 이름을 모른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말이나 내뱉어도 되는지 모르겠고.
“그 망할 할머니는 가르쳐주려면 제대로 좀 가르쳐주지!”
불만 어린 목소리를 내뱉고는 집을 뒤로했다.
친구들도 떠났겠다.
윤리오의 병문안을 갈 생각이었다.
“야! 윤리사!”
그러기도 전에 붙잡혔지마는.
“해진이 오빠?”
청해진이 다급하게 우리 집에 뛰어들어와서는 말했다.
“나 좀 숨겨줘!”
숨겨 달라니?
“오빠를?”
“그래!”
청해진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울먹였다.
“붙잡히면 죽을 거야!”
죽는다니!
알 수 없는 소리를 횡설수설 늘어놓는 그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도대체 누구한테? 알아듣게 설명 좀 해 봐!”
“그, 그게.”
청해진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찰나.
“청해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해진이 이름이 불리기 무섭게 딸꾹질을 시작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니라.
“오래간만이에요, 해솔이 언니.”
청해솔이었으니까.
청(淸)의 가주인 그녀가 내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이매망량의 길드장님을 뵙습니다.”
“지금은 편하게 대해 주세요.”
이매망량의 업무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딱딱하게 격식 차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말에 청해솔이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야, 리사야. 네 뒤에 숨어 있는 그 자식 좀 넘겨줄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청해진이 내 뒤에 숨어 있었다. 숨는다고 가려지는 체구가 아닌데 말이다.
어쨌거나 청해진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안 돼! 싫어! 리사야! 길드장님! 나 좀 살려줘! 저 마녀한테 잡혀가면 죽을 거란 말이야!”
“누구보고 마녀라는 거야?!”
날선 목소리에 청해진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해진이 오빠는 넘겨드릴게요.”
“야! 윤리사!”
청해진이 기겁하며 나를 불렀지만 못 들은 척 굴며 청해솔에게 물었다.
“그보다 바쁜 분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에요?”
“저 망할 동생이 내 연락을 계속 씹어대서 말이야.”
청해솔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왔지. 보기 힘든 저 잘난 얼굴 좀 보려고.”
“하, 하하. 예쁜 동생 얼굴 봤으면 이제 남해로 내려가면 안 될까? 누나 안 바빠?”
“안 바빠.”
청해솔이 순식간에 내 앞에 다가와서는 청해진을 낚아챘다.
“흐아아아악!”
청해진이 발버둥 쳤지만 청해솔이 무엇이라 속삭이자 입을 다물었다.
“그럼, 리사.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했단다.”
“아니에요, 언니.”
그렇게 청(淸) 가문의 남매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려는 순간.
“저기, 해솔이 언니.”
갑자기 머리를 번뜩이며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왜?”
“언니는 이 세상을 이루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당연히 청(淸)이지.”
청해솔이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다르게 말하면 물과 공기.”
그 말을 끝맺기 무섭게 살랑이며 바람이 일었다.
청해솔이 일으킨 바람이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가볍게 말을 얼버무리고는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만날 수 있으면 또 만나요.”
“그래, 리사.”
청해솔이 싱긋 웃어 주고는 청해진의 뒷덜미를 붙잡고 사라졌다.
청(淸)의 가주가 왜 청해진을 찾아왔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듯, 물론 청해진이 계속 연락을 무시하고 있어서도 있겠지마는.
‘그보다는 결혼.’
청(淸) 가문 내에서 청해솔과 청해진의 결혼과 관련해서 말이 나오기 시작해서 찾아온 걸 거다.
망할 청(淸) 가문의 원로들의 입을 어떻게 다물게 만들지 머리를 맞대 생각하기 위해서.
‘거주자의 후손도 참 피곤해.’
생각해보면 나도 그와 비슷하지만, 뭐.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보다 물과 공기라.”
청해솔의 말대로 그것 역시 이 세계를 구성하는 거였다.
단순히 그녀가 청(淸)의 가주라서 그렇게 말한 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골치 아프네.”
성유물이라서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거주자를 부를 수 있는 물건을 남에게 넘길 수도 없고.
“물과 공기.”
그리고.
‘하늘인가?’
‘아님, 바다일 수도 있지.’
‘땅을 말하는 게 아닐까?’
‘혹시 사람?’
‘사람이면 동물도 쳐야지.’
친구들이 늘어놓던 대답들.
대답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말들 역시 이 세상을 이루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답을 찾는 사이, 윤리오의 병실에 도착했다.
“오빠, 나왔어.”
하지만 나는 병실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칼을 가지런하게 자른 여자가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리오 학교 선배예요.”
윤리오의 학교 선배라고?
물론, 학교 선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윤리오가 친하게 지내던 선배는 없을 텐데?
‘친구도 청해진뿐이었으니까.’
의심스럽게 쳐다보니 병문안을 온 여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리오가 이렇게 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달받아서 찾아왔어요.”
정말로 윤리오의 학교 선배인가?
“죄송하지만 오빠와 관계가 어떻게 되죠?”
“말했듯 선후배 관계였죠.”
여자가 나긋하게 대답하고는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제가 지하 길드 소속인 건 아닐까 의심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여자가 건넨 명함을 받아든 나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CW?”
“네.”
여자가 미소를 그렸다.
“현재 CW 회장 대리를 맡고 있는 진달래라고 합니다. 언젠가 인사를 나누게 될 줄은 알았는데 말이죠.”
“아, 그게. 죄송해요. 제 명함이 아직 없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서차윤이 만들어 준다고 할 때 받을 걸 그랬다.
진달래는 웃는 낯으로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그보다 길드장님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나 보네요.”
“네?”
“사적인 일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거든요. 몇 번이라고 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요.”
그런가?
멋쩍게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기억이 안 나네요.”
“하긴, 길드장님께서는 그때 무척 어리셨으니까요.”
진달래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내보였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손에 쥐고 계신 건 혹시 성유물인가요?”
“네? 아, 네. 맞아요.”
라고 대답하자마자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피리가 성유물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장 청해솔도 이 피리를 본체만체 굴지 않았던가?
이 피리를 가까이에서 본 단아와 도윤이는 시중에 파는 장난감 피리와 똑같다고 생각했었고.
그런데 진달래는 달랐다.
‘손에 쥐고 계신 건 혹시 성유물인가요?’
이 피리를 보자마자 성유물이냐고 묻다니.
나는 피리를 뒤로 슬쩍 숨기며 날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성유물이란 건 어떻게 아신 거죠?”
“윤사해 길드장님께서 사용하시는 걸 본 적 있으니까요. 아, 윤사해 전 길드장님이시죠.”
진달래가 미소를 그렸다.
“어쨌든, 그분이 그 성유물을 사용하는 모습은 CW 내에 보관 중이던 자료를 통해 확인한 거지만요.”
그래서 알고 있었다며 진달래가 말을 덧붙였다.
“설마 윤리사 길드장님께서도 같은 걸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믿어도 되는 걸까?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진달래를 쳐다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를 믿기로 한 거다.
진달래가 정말 윤리오의 선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적이라면 벌써 그를 죽였을 거다.
애초에 이 병실은 윤리오에게 적의나 살의를 품은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 정도 안전장치도 해 두지 않고 윤리오를 홀로 이 병실에 뒀을 리가 없지.
어쨌든 간에.
“맞아요. 이거 성유물이에요. 그것도 아빠가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성유물.”
나는 진달래에게 알려줬다.
“하지만 아빠가 가지고 있던 것과 다르게 이건 무용지물이에요.”
“왜죠?”
“이 피리로 부를 수 있는 미지 영역의 거주자의 진명을 모르거든요.”
내 말에 진달래가 두 눈을 빛냈다.
“그 피리가 미지 영역의 거주자와 연결할 수 있는 통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명을 알아야 불러낼 수 있는 거였나 보군요!”
“그건 아니에요.”
단순히 피리를 부는 것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시중에 파는 장난감과 다를 바 없었다.
이 피리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답답해졌다.
동시에 입이 험해졌다.
‘망할 할머니.’
윤사희가 앞에 있었더라면 멱살을 붙잡고 제대로 좀 가르쳐주지 그랬냐면서 흔들어댔을 거다.
물론, 그러다가 된통 얻어맞았겠지마는.
그때 진달래가 물었다.
“혹시 진명에 대해 어렴풋하게 들은 건 없나요?”
“네?”
“예전에 장천의 회장님께서 흘러가듯이 말해 주신 게 있거든요.”
미지 영역의 거주자를 불러낼 수 있는 성유물은, 언제나 그 진명에 대한 힌트를 전해준다.
“……라고요.”
웃는 낯으로 말을 끝낸 그녀를 향해 나는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