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돌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4)
비가 그쳤다.
“자,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윤사해와 백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서차윤을 쳐다봤다.
서차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아님,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그건 안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까이에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구궁!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땅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윤사해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는 서차윤에게 물었다.
“어떻게 안 거지?”
“뭐가?”
서차윤이 모르는 척 물었다. 그에 윤사해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곳이 곧 위험해질 거라는 거.”
“그럴 것 같았거든.”
서차윤이 배시시 웃었다.
“나, 감 좋은 거 알잖아.”
장난치듯 말하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얼굴을 찌푸리는 찰나.
“됐어, 아버지.”
백정이 그의 어깨에 손을 짚고는 말했다.
“저자식이 이곳이 위험해질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벗어나야 해.”
〖그 말이 맞다.〗
랑야가 백정의 말을 거들었다.
〖싸우고 있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닌 걸 보니, 이 일대는 금방 무너질 거다.〗
그러니 이곳을 어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랑야가 재촉했다.
하지만 어디로?
사방이 폐허가 된 와중에 겨우 찾은 안전한 장소였다.
이곳을 버리면 도대체 어디에 다시 몸을 숨긴단 말인가?
윤사해가 그것을 걱정할 때.
“걱정하지 마.”
그 걱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서차윤이 말했다.
“우리 길드장님은 잠자코 따라오면 돼. 안전한 장소를 알고 있으니까.”
윤사해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비밀.”
윤사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정말 죽여 버리고 싶네.”
백정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서차윤이 앞장서서 걷다 그 말을 듣고는 겁에 질린 척 말했다.
“리오야,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줄래? 아저씨 무섭거든.”
“지랄하지 마.”
검을 꽉 쥐는 백정의 모습에 서차윤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더 재잘거리면 자신의 목숨이 정말 위험해질 거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차윤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
“당신이 말한 안전한 장소가 여기였어?”
“응.”
서차윤이 뼈대만 남은 폐허 속에서 웃는 낯으로 물었다.
“왜? 그리워?”
“그립기는.”
백정이 피식 웃었다.
“모르나 보네? 이곳을 이렇게 만든 게 나라는 걸?”
서차윤이 부자(父子)를 비롯해 랑야를 데리고 온 곳은 다름 아닌 그들의 집이었다.
백정의 말에 서차윤도, 그리고 윤사해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무척 슬퍼 보였기 때문에.
〖어쨌든 잘 찾아왔군.〗
랑야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 근방에서 나를 제외한 거주자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잠시 지내도 되겠어.〗
“그렇죠?”
서차윤이 활짝 웃었다.
“여기는 미친 거주자들도 기피하는 사람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는 곳이니까요! 당연히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죠!”
“우리 집에 그런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응.”
서차윤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아니야?”
백정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윤사해는 아들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
그야, 주변에서 자신을 향해 미친놈이니 뭐니 그런 소리를 지껄였었으니.
“사해야, 너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누가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윤사해가 뚱하게 물었다.
“그럼, 누구지?”
“사희 님.”
서차윤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희?”
백정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랑야는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윤사해는 표정을 굳혔다.
가지각색의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을 향해 서차윤이 말했다.
“사해, 네가 이 집을 처음 만들었을 때 사희 님이 와서 축복을 걸어 줬었잖아.”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잘 먹고 잘 살다 고생 꽤나 하라는 등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웬만한 거주자들은 이곳에 얼씬도 안 할 거야. 그렇죠, 랑야 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랑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그 녀석을 잊고 있었다니. 나도 미쳤었나 보군.〗
“그럴 수밖에요. 사희 님은 당신을 비롯한 다른 도깨비들과 함께 할 때 밝혔던 이름을 버렸었으니.”
그러니 대도깨비같은 분이 아니면 잊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면서 서차윤이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맞아, 서차윤.”
윤사해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그분을 만난 건 아주 잠시뿐이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
서차윤이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사희 님을 만난 게, 그분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이었지? 사해, 너랑 친구가 되고 얼마 안 됐을 때 그분을 만났었으니.”
윤사해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친구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서차윤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분이 알려줬어.”
“뭐?”
“나도 고생 꽤나 할 팔자라면서 다 알려줬지.”
윤사해의 할머니, ‘윤사희’가 사실 어떤 존재였는지 등등.
그녀는 자신에게 믿을 수 없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그때는 도대체 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건가 했는데…….”
서차윤이 짓궂게 웃었다.
“이제 알겠네.”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처음, 윤사해를 잃고 다시 시작된 세계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와 그의 가족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를 수도 없이 찾으면서 알게 됐었다.
“저기, 이야기 중에 미안한데.”
백정이 퉁명스레 물었다.
“사희가 누구인데?”
이야기에서 겉도는 것에 언짢아진 모양이다.
서차윤이 배시시 웃었다.
“리오의 할머니.”
“뭐?”
백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한테 그런 게 있었어?”
“정확히는 증조할머니.”
“정말 그런 게 있었단 말이야?”
거듭해서 묻는 목소리에 서차윤이 말했다.
“그럼, 있었지. 너한테도 엄마랑 아빠가 있는데, 네 아빠한테도 그런 사람들이 없었을까 봐?”
없었으면 이 자리에 윤사해는 없었을 거다.
“사희 님에 대해 궁금하면 네 아빠한테 물어봐.”
서차윤이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서차윤.”
“장작 좀 주워 올게. 여기에서는 마음껏 불을 피워도 되거든.”
그는 그 말을 남겨 두고 무성하게 자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걱정되면 따라가 주지.〗
“딱히 그런 건.”
〖솔직하지 못한 건 이 세계에서의 그놈과 똑같군.〗
윤사해가 입을 다물었다.
〖그놈은 너와 다르게 아주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지. 그래서 저놈이 저렇게 된 거고.〗
랑야가 백정을 흘긋 쳐다봤다. 그 시선에 백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랑야 님, 저는 원래 이런 놈이었어요.”
랑야가 가볍게 혀를 찼다.
윤사해는 머뭇거리다 랑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탁해도 될까?”
서차윤을 따라가 달란 소리였다.
〖네 놈이 부탁이라니.〗
랑야가 콧방귀를 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과 싸우지나 말거라.〗
그에 백정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랑야 님, 아무리 저라도 아버지한테 패륜은 안 저질러요. 물론, 아버지가 먼저 싸우려고 들면 기꺼이 패륜을 저지를 수 있지만요.”
〖미친놈.〗
랑야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서는 서차윤의 뒤를 쫓아 떠나 버렸다.
그렇게 부자(父子)만 남게 됐다.
“그래서 사희가 누구야?”
“네 증조할머니란다.”
“아버지가 어릴 적에는 살아 계셨었나 보네?”
윤사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스물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었지.”
“그런데 왜 나는 몰랐지?”
“말해 준 적 없으니까.”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백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버지는 아무것도 말해 준 적 없었지.”
그러다 그가 바닥에 있던 타다 만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오, 재미있는 거 주웠는데 볼래?”
“증조할머니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니?”
“응.”
백정이 웃는 낯으로 재잘거렸다.
“어차피 죽었잖아. 알아봤자 뭐해?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끝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보다 이거나 봐봐.”
윤사해가 얼떨결에 백정이 건넨 것을 받아 들었다.
아들이 건네준 건 사진이었다.
반쯤 타다 만 사진.
“리사야. 아버지의 외면 속에서 죽은 이 세계의 리사. 내 동생.”
윤사해의 두 눈이 흔들렸다.
“물론, 리사를 죽인 건 이 세계의 아버지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윤사해의 얼굴이 금방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일그러지자 백정이 고개를 휙 돌리고는 말했다.
“서차윤이 돌아오면 대도깨비님에 대해 물어보자. 그 자식이라면 대도깨비님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을 것 같으니까.”
백정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야지.”
윤사해가 아들이 건네준 사진을 품에 소중히 넣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가야 했다.
이곳에서는 지키지 못한 제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그곳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