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돌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2)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윤사해는 비린 맛이 나는 물방울을 아무렇지 않게 맞았다.
“뭐하는 거야?”
백정이 날카롭게 물었다.
“이거 산성비야. 맞으면 대머리 될 거라고.”
그러면서 백정은 윤사해의 팔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대머리가 된 채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설마.”
윤사해가 픽 웃었다.
“그럼, 앞으로 내리는 비를 멍청하게 곧이곧대로 맞을 생각 하지 마.”
“그래, 알겠단다.”
건물 안쪽에 들어온 그가 젖은 머리를 털었다.
이 세계에 온 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걸 수도 있다.
윤사해는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빠!’
‘아버지!’
자신을 부르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기는커녕 더욱 뚜렷해지기만 했다.
그것이 윤사해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다.
백정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보다 큰일이네.”
“무엇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동물들이 밖에 안 돌아다니거든. 사냥해서 먹을 수가 없어.”
그동안 두 사람은 동물을 사냥하거나 편의점을 털거나 하는 식으로 먹을 것을 조달해 왔다.
“근처에 먹을 게 남아 있는 편의점이 있을지 모르겠네.”
“같이 찾아 보자꾸나.”
“됐어.”
백정이 질색했다.
암만 윤사해가 자신이 아는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불편해.”
백정은 그가 불편했다.
그렇게 백정이 매몰차게 걸음을 돌릴 때.
〖나갈 필요 없다.〗
랑야가 나타났다.
통조림 캔을 잔뜩 들고서 말이다.
우르르!
그것을 윤사해와 백정의 앞에 쏟아 버리고는 랑야가 말했다.
〖오랫동안 생각했다.〗
랑야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역시 윤사해를 죽여 버려야겠다고.〗
살기 어린 목소리에 백정이 자신도 모르게 윤사해의 앞을 막아섰다.
“랑야 님. 이 사람은.”
〖안다.〗
랑야가 차갑게 백정의 말을 끊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윤사해가 아니란 것을.〗
그의 붉은 눈이 윤사해를 향했다.
〖내 딸을 죽게 둔 그놈이 아니란 것을 안단 말이다!〗
랑야가 분노 어린 목소리를 토해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백정을 밀치고는 윤사해의 멱살을 잡았다.
윤사해는 순순히 그에게 멱살을 잡혀 줬다. 랑야의 붉은 눈이 금방에라도 눈물을 흘릴 듯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랑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보다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아 줬다.
〖그러니 넌 죽이지 않겠다.〗
그가 목소리를 쥐어짜내었다.
〖윤사해, 지금 내 앞에 있는 네놈은 내가 알고 있던 그 빌어먹을 놈이 아니니까.〗
윤사해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 고개 숙였다.
“미안하네.”
이 세계의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자세하게 모르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쓰레기.’
이 세계에서 자신은 분명 재활용도 할 수 없는 쓰레기였을 거다.
“리오.”
백정이 왜 부르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윤사해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다니면서 백정은 한 가지 포기했다.
윤사해가 자신을 ‘윤리오’라고 부르는 것을 내버려두기로 한 거다.
암만 그 이름은 버렸다고,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왜?”
백정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윤사해가 통조림 캔 하나를 따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 세계에서 나는 어땠니? 쓰레기였겠지?”
“응.”
백정이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뒤를 이어 랑야가 말했다.
〖나를 비롯한 도깨비 녀석들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쓰레기였지. 아비란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윤사해가 얼굴을 찌푸렸다.
“랑야, 자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랑야 역시 자신 못지않게 자식한테 무관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자신과 똑같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윤사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잃었지 않나?〗
랑야가 통조림 캔 하나를 주워 들며 중얼거렸다.
〖너를 믿었다가.〗
윤사해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랑야가 그런 그를 흘긋거리고는 벅벅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빌어먹을! 알아, 안다고! 네가 내가 알고 있는 그놈이 아니라는 거 잘 알아! 하지만!〗
“괜찮네.”
윤사해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 세계의 내게 하지 못했던 욕을 실컷 쏟아도.”
그것이 어떤 욕이든.
“나는 아무렇지 않아, 랑야.”
랑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자, 두 분 다 그만하시고 어서 먹기나 하죠? 랑야 님은 모르겠지만 저랑 아버지는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몸이라고요?”
백정이 통조림 캔을 따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숟가락도 대충 물로 씻었다.
윤사해가 역시 그와 똑같이 통조림 캔을 퍼먹을 때.
번쩍!
하늘이 빛을 냈다.
쿠르릉-!
요동치듯 크게 울리는 천둥에 백정이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네요.”
“하긴, 곧 여름이니까.”
“그걸 어떻게 아세요?”
“더워서.”
백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요. 날이 더워졌으니 이제 여름이겠네요.”
랑야가 키득거리며 웃는 그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하늘이 번쩍거리며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낸 건 그때였다.
“오늘 편하게 자기는 글렀네요. 계속 저럴 테니까.”
윤사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바깥을 쳐다본 그 순간.
“……!”
그는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
백정이 왜 그러냐는 듯이 그를 불렀다. 윤사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쏟아지는 비 사이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남자를 쳐다볼 뿐.
“아오, 아파라. 망할 새끼.”
적갈색의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털어냈다. 그래봤자 곧장 쏟아지는 비에 젖었지만 말이다.
“제대로 온 거 맞나? 알 수가 있어야지, 원.”
남자가 벅벅 머리를 긁고는 고개를 돌렸을 때.
“……!”
그의 표정 역시 윤사해와 똑같이 변했다.
남자가 멍하니 두 눈을 끔벅이다 이내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대로 온 거 맞네.”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던 남자가 윤사해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 사해야.”
가볍게 손을 흔드는 그 모습에 윤사해가 고함을 터트렸다.
“서차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제 자식들을 납치했던 배신자.
소중했던 친구.
이매망량의 부길드장이기도 했던 그가 자신의 앞에 서서 인사하고 있다.
제 손으로 죽인, 그가 말이다.
윤사해가 창을 꺼내 쥔 후, 곧장 그를 향해 땅을 박찼다.
“아버지!”
백정이 뒤늦게 움직였다.
〖저 바보 녀석이!〗
랑야도 짧게 혀를 차고는 몸을 움직였다.
〖진정해라, 윤사해.〗
랑야가 늑대의 모습을 취하며 그의 앞을 막았다.
“맞아요, 아버지.”
백정이 거들었다.
“잊었어요? 이곳에서 큰 소리를 내면 그 자식들이 몰려들 거라고요.”
윤사해가 이를 악물었다.
백정이 말하는 ‘그 자식들’이란, 바로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이었다.
하나같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그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해치고자 들었다.
그 상대가 같은 거주자라고 해도 마찬가지.
윤사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글쎄, 어떻게 살아 있는 것 같아?”
“서차윤!”
윤사해가 비명을 내지르듯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렸던 친구의 이름을 내뱉었다.
서차윤은 자신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처럼 늙지 않은, 죽었던 그 당시의 젊었을 적 모습이었다는 거다.
서차윤은 말없이 윤사해를 보다 입을 열었다.
“리사 부탁을 받고 왔어.”
“뭐……?”
윤사해가 멍하니 물었다. 그에 서차윤이 싱긋 웃었다.
“리사가 너를 많이 그리워하더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윤사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다르게 서차윤은 웃었다.
“그래서 왔어.”
너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 주려고.
나지막하게 덧붙인 목소리에 윤사해의 두 눈이 떨렸다. 그건 백정 역시 마찬가지.
“아버지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서차윤이 백정을 보고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는 서글프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우리 리오, 많이 컸네?”
“닥쳐.”
백정이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 역시 당신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것뿐이야.”
그랬다가는 자신들이 위험해질 테니. 그래서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착하네.”
서차윤이 싱긋 웃었다.
“예나 지금에나 리오는 참 착하다니까?”
“닥치라는 말이 안 들리나 보군.”
백정이 검을 꺼내 들었다.
“나는 알아. 당신이 아버지와는 다르게, 내가 알고 있는 그놈이 맞다는 걸.”
백정의 보랏빛 눈이 번들거렸다.
“뭣하면 그 입을 찢어 줄까? 그 정도 일은 저질러도 괜찮을 것 같은데.”
“리오!”
윤사해가 다급하게 아들을 불렀다.
서차윤은 말없이 저를 향해 살기를 내보내는 백정을 쳐다보다 싱긋 웃었다.
“원한다면 그래도 돼.”
백정이 흠칫 몸을 떨었다. 윤사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서차윤을 쳐다봤다.
부자(父子)의 시선 속에서 서차윤은 웃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뭔들 못하겠어? 나는 뭐든 해 줄 수 있어.”
뜻 모를 말에 부자(父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차윤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