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선산(4)
사희(死希).
죽을 사(死)에 바랄 희(希).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한자를 내걸며 그녀는 12공방의 사람들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원한다면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준다고 하더군.”
그러면서 그녀는 그들에게 의뢰를 맡겼단다.
“무슨 의뢰요?”
“탈.”
지연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도깨비님들께서 쓰실 탈을 만들어달라고 하더군.”
“그래요?”
윤사해가 거느리는 도깨비들이 탈을 쓰고 다니는 건 본 적이 없는데.
‘할머니는 내가 모르는 도깨비를 거느렸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네. 시답잖은 논쟁을 하며 언성을 높이는 일 따위 그만두고 싶었으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곳.
결투의 장(場).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에게 매겨진 숫자는 의미 없어졌소. 제1 공방의 주인이든, 제12 공방의 주인이든, 서로 공평한 위치에서 주먹을 들 수 있게 됐지.”
좋은 건가……?
아니, 그보다.
‘할머니가 이곳을 만들었다니!’
골치가 아파졌다.
지끈거리며 올라오는 두통에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연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에야 다른 것 같지만, 그때 우리 12 공방의 장인들은 평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소이다.”
제1 공방의 장인이 내리는 명령은 절대적.
거부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서로 불만을 품게 된 건 그 때문이겠지.”
“어쨌든 이곳 덕분에 그 불만을 조금 잠재우게 됐나 보네요.”
“그렇소.”
지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우리가 싸울 때마다 사희가 심판을 봐줬으니 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지.”
윤사희뿐만 아니라, 여럿의 도깨비도 그녀와 함께 싸움을 구경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어쨌든, 사희는 그 이후로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마을에 있었소.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지마는.”
그래서 12 공방의 옛 영혼들이 우리 할머니를 알고 있었던 거구나.
“하지만 12공방에서 할머니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던데요?”
“그거야 사희가 떠나기 전, 모든 흔적을 지워 버렸으니 그렇소. 더군다나 훗날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사희와 관련하여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도 모두 맥이 끊겨 버렸더군.”
그 이유를, 왜인지 모르게 알 것 같았다.
‘아해야, 혹시 신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
‘아니요, 몰라요.’
‘소멸이다. 내 존재도 이름도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사라지는 것. 그게 바로 신의 죽음이지.’
윤사희는 신이었던 스스로를 죽였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사라진 것일 터. 그럼에도 지연호가 윤사희를 기억하고 있는 건, 그가 그 이전에 죽었기 때문일 거다.
“어찌 됐든 영광이었소.”
지연호가 합장하며 내게 말했다.
“내 사희와 한 번 싸우고 싶었으나 죽기 전까지 그러지 못해서 말이오. 그 후손과 싸운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오.”
그게 픽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그보다 이제 연호 님도 떠나시죠?”
현원창이 애가 끓는다는 얼굴로 지연호가 차지한 지운휴의 몸을 보고 있었다.
“알겠소. 후손에게는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해 주시기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지운휴의 위로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가 싶더니 사라졌다.
“으으.”
지운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나는 곧장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지연호와 대화를 하느라 몰랐는데, 영혼이 빠져나간 다른 사람들 모두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들 중에는 청해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상태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나는 지운휴를 앉히며 그를 살폈다.
다행히 크게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으아악!”
갑작스럽게 나를 봐서 놀란 모양이었다.
화르륵!
이는 불꽃에 황급히 걸음을 뒤로 물렸다.
“지운휴!”
현원창이 소리 질렀다.
“너를 구해 준 분이시다! 이매망량의 새 주인이기도 하시고!”
“뭐?”
지운휴가 멍하니 물었다.
“이매망량의 새 주인께서 이곳에는 왜 오셨대? 아니, 그보다. 여기는 선산이잖아?”
휙휙, 주위를 둘러본 그가 곧이어 경악했다.
“마을 사람들이 도대체 선산에는 어떻게 온 거지?! 이매망량의 새 주인께서도 도대체 어떻게……!”
“진정해. 우선은 산을 내려가는 게 먼저다.”
현원창이 친구를 진정시킨 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아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다들! 곧 해가 질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말해 줄 테니, 어서 산을 내려가도록 합시다!”
정신을 못 차리고 끙끙 앓고 있던 사람들이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청해진은 아니었다.
여느 사람들보다 튼튼한 신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였다.
“해진이 오빠, 일어나. 곧 해가 질 거라잖아.”
“나도 들었는데 말이지.”
청해진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상하게 온몸이 아파서 꼼짝도 못 하겠어. 리사,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묻는 목소리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줬다. 청해진이 아프다면서 끙끙 앓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겠지.’
그림자를 이용해 그를, 아니. 그의 몸을 차지했던 영혼을 포박할 때 힘 조절을 잘 못 했나 보다.
청해진이 빙의됐던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다.
“자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면 어서 일어나. 현연창 님께서 마을로 돌아가서 이야기해 준다고 하잖아?”
청해진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죽어가는 병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그렇게 그와 함께 산을 내려가는 무리에 합류하려는데.
“현훈 님.”
허망한 얼굴로 자리에 우뚝 서 있는 현원창의 아버지가 보였다.
현훈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여 나를 담았다.
그에 싱긋 웃어 주며 말했다.
“내려가셔야죠.”
이번 일의 중심이 바로 현훈이지 않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빠져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현훈이 입술을 우물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무리에 합류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와 청해진이 가장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현훈이 도망치거나 다른 마음을 품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길드장님, 무슨 일이 있었떤 건지 모르겠지만 12공방의 일. 모두 해결된 거지?”
“아마도?”
“그럼, 바로 돌아가면 안 될까? 나 피곤해. 서울 공기 마시고 싶어.”
“서울 공기 탁해.”
청(淸)의 사람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
“다들 모였습니까?”
현원창이 제1 공방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신없고 피곤하겠지만, 사안이 급박하여 이러는 것이니 모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곳곳에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우리 애 칭얼거리는 거 안 들려? 본론만 짧게 끝내!”
“나는 온몸이 쑤셔서 죽겠어.”
현원창이 작게 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조금 전까지 12 공방의 옛 선조들께 빙의를 당했습니다.”
“뭐……?”
다들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빙의라니! 우리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지 못할 것도 없지.”
“맞아. 장인들이 만든 물건 중 하나가 선조들의 영혼을 불러들였거나 그런 모양이지.”
곳곳에서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정말 시끄러웠다.
하지만 현원창은 그렇지 않은지, 묵묵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대단하네.’
현훈의 일로 화가 많이 났을 텐데 저런 인내심이라니.
내가 현원창이었다면 진작 정숙하라면서 큰 소리를 냈을 텐데 말이다.
‘부끄러워라.’
괜히 멋쩍어져 뺨을 긁적이던 그때, 현원창이 목소리를 내었다.
“먼저, 여러분께서 선조들의 영혼에 빙의를 당한 건 저희 아버지 때문입니다.”
현원창의 말에 모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현훈 님 때문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웅성대는 목소리 사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현훈이 보였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노인의 모습에 한숨을 쉬는 찰나, 현원창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아버지.”
그렇게 현훈을 부르며 그가 담담하게 물었다.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없다.”
없기는 뭐가 없어!
이렇게 많은 사람의 몸을 자기 멋대로 선조들한테 넘겨 줬는데, 적어도 미안하다고 사과는 해야지!
다행히도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버지!”
현원창이 버럭 소리 질렀다.
“여기, 윤리사 길드장님이 아니었다면 저희 마을은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영 잊혀질 뻔 했습니다! 아십니까?!”
현훈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지키는 그 모습에 현원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그러신 겁니까? 아니,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떤 겁니까?!”
다그치는 목소리에도 현훈은 묵묵부답이었다.
속이 탄다는 듯, 들끓는 시선으로 제 아버지를 노려보던 현원창이 결국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계속 나오시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가둬 재판을 열 수밖에요.”
감옥, 그리고 재판.
그 단어에 현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