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선산(2)
“이분들을 깨운 사람이 바로 현훈 님이시죠?”
내가 가리키는 사람들은 12공방의 옛 영혼들이었다.
현훈이 나를 노려보다 말했다.
“그렇다만?”
“그럼, 이분들을 돌려보낼 방법도 알고 계시겠네요?”
“돌려보내다니!”
그렇게 외친 사람은 현훈이 아니었다. 청해진의 몸을 차지한 12공방의 옛 선조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나는 얼마 즐기지도 못했다고!”
즐기기는 뭘 즐겨?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그 몸에서 나가 주실 거죠?”
“나가지 않을 거다!”
뭐라고?
“이 녀석도 내가 자신의 몸을 차지한 걸 기뻐할 거다!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죽지 않는 몸이 됐으니!”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멀쩡해 보였구나?
하지만…….
“해진이 오빠한테 의사를 물어본 건 아닌데요?”
“뭐라?”
“불사의 몸이 된 것에 대해서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그러셨잖아요.”
이 녀석도 자신이 몸을 차지한 걸 기뻐할 거라고 말이다.
“해진이 오빠가 직접 그렇게 말을 했다면 몰라도.”
남이 그가 그러겠거니 하면서 대변해 주는 꼴이라니.
“죄송하지만.”
후욱!
나는 그림자를 움직여 청해진의 몸을 옭아맸다.
“좋게 말할 때, 해진이 오빠 몸에서 나와 주시겠어요?”
“싫다면?”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아무래도 청해진의 몸을 차지한 12공방의 영혼은 꽤 어린 축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데, 쟤는 뭘 믿고 저러는 건지.
“네가 나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이 그림자로 나를 위협한다고 한들 상처를 입는 건 이 녀석의 몸뿐이다!”
아, 뭘 믿고 나대는 건가 했더니만.
“그래서요?”
“뭐?”
“그래서 어쩌라고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해진이 오빠 몸을 상처 입혀서 당신을 몰아낼 수 있다면야, 뭐.”
못할 것도 없지.
청해진의, 아니. 그의 몸을 차지한 녀석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주, 죽어 버릴 거다! 혀를 깨물어 죽어 버릴 거라고!”
“어디 한번 해 보세요.”
나는 그림자를 이용해 창을 만들어내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짓을 벌이는 순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당신을.”
그리고.
“이 마을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 테니까요.”
청해진의 몸을 차지한 영혼은 알아차렸을 거다.
내가 허투루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으… 으으……!”
청해진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영혼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무서우면 그 몸에서 나올 것이지!
‘억지로 무력을 행사해야 해진이 오빠 몸에서 나오려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사희의 증손녀. 그대에게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소.”
계단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청해진의 몸을 풀어 주고는 말했다.
“뭐죠?”
들어는 볼 생각이었다.
“우리를 대표하는 열두 명과 싸워 보는 게 어떻겠소?”
“그러니까, 제가 그분들을 이기면 순순히 차지하고 있는 몸에서 나오겠다는 거죠?”
“사희의 피가 섞여 있는 것 같지 않게 말을 잘 알아듣는 군.”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저 녀석, 운휴입니다.”
현원창이 내 옆에서 소곤거렸다.
지운휴라면 제5 공방의 주인이자, 현원창의 오랜 친구였지?
현원창이 안타깝다는 눈으로 옛 선조에게 장악당한 지운휴를 쳐다봤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좋아요.”
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각성자다.
그것도 꽤 강한 공격계 스킬을 소유 중인 S급 각성자.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아니. 사람들의 몸을 차지한 영혼들을 휩쓸어 버릴 수 있다는 뜻.
비아냥거리듯 던진 내 질문에 남자가 말했다.
“괜찮소.”
그 말과 함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지운휴’를 포함해 정확히 열두 명.
남자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우리는 신인이오.”
신인(神人).
과거, ‘각성자’를 칭했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야 할 만하지.
“좋아요.”
나는 어깨에 걸쳐 입은 하얀 두루마기 코트를 허리에 매며 말했다.
“붙어 보죠.”
마을 사람들을 해방시켜 줄 시간이었다.
***
“우리 공방을 찾아온 손님과 약조하나니, 이 결투에서 그대가 이기면 우리는 자연으로 다시 돌아겠나이다.”
‘지운휴’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현원창이 가져온 돌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죠?”
“길드장님과 선조님들 사이의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계약이라.
나는 비딱하게 웃었다.
계약이 이뤄지기 전, 남자는 내게 무언가를 걸 것을 요구했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지 않겠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묻는 모습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어찌 됐든, 그 말에 나 역시 하나 내걸게 되었다.
내 몸을 말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원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지 않을 게 뭐 있나요?”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말했듯, 괜찮지 않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녀올게요.”
나는 현원창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원형 경기장 중앙으로 움직였다.
내 앞에 선 열둘의 얼굴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나 따위,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속이 뻔히 보이는 표정들에 나는 말했다.
“한꺼번에 오세요.”
“뭐라?”
열 두 사람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사람이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암만 사희의 핏줄이라고 해도 우리 모두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일 거다.”
“그거야 어르신의 착각이고요.”
내 주위로 스멀스멀 그림자가 피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비아냥거렸다.
“저는 진작 죽었던 여러분 따위 아주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익!”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입을 놀리는 걸 보니 사희의 핏줄이 맞구나!”
그럼, 내가 누구 핏줄이겠어?
나는 노인을 향해 활짝 웃어 주고는 그림자를 채찍처럼 움직였다.
“크학!”
노인의 몸이 다치지 않게, 그러나 그 몸을 차지한 영혼이 타격은 입을 정도로.
딱 그 정도의 힘을 움직여 나는 노인을 쓰러뜨렸다.
“크윽……!”
원형 경기장의 계단까지 굴러간 노인이 앓는 목소리를 내었다.
“이, 사특한 녀석이!”
곧, 그는 마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보다 사특한 녀석이라니.
저 노인을 차지한 영혼은 현훈의 선조이지 않을까?
나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다시 그림자를 움직였다.
“으아악!”
그림자에 묶인 노인이 허공에 붕 떴다.
“놔라! 이것 놓아달란 말이다!”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노인을 떨어뜨렸다.
“으아아악!”
노인의 비명이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사람들 위로 떨어지며 그대로 기절해 버린 거다.
“자, 한 분 끝난 것 같네요.”
나는 웃는 낯으로 열둘, 아니. 열한 명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래요?”
이래도 한 명씩 나를 상대할래?
속에 담긴 질문을 읽어냈는지 남은 모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이야아아압!”
사이좋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윤리사 길드장님!”
현원창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지만 괜찮았다.
“으아악!”
“아악!”
바라던 바였으니까.
***
열한 명이 열 명으로, 열 명이 다시 아홉으로. 그 아홉이란 숫자가 다시 여덟으로…….
그렇게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나는 지운휴의 몸을 차지한 영혼을 향해 물었다.
“항복하지 않으실래요?”
“그건 싫소.”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보다 대단하군.”
그가 주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흘긋 쳐다보고는 중얼거렸다.
“우리 모두를 이렇게 가볍게 제압하다니.”
남자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여줬다.
물론, 노인을 제외한 모두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신인은 ‘각성자’와는 확연히 뭔가 다른 힘을 사용했다.
우리 각성자들이 게임 캐릭터라면, 신인들은 자연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정령사.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게, 내가 상대한 신인들은 모두 물과 불, 대지와 바람.
이에 빛이나 어둠과도 같은 ‘속성’이라 부를 수 있는 힘만을 운용해 사용했다.
특이한 거라면, 그 속성 중 단 하나만 사용했다는 거다.
속성에 구분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여러 속성을 사용할 수 있는 각성자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어쨌거나 남은 사람은 이제 ‘지운휴’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분명 항복할 기회를 줬어요.”
그 기회를 잡지 못한 건, 지운휴.
‘……가 아니라.’
그의 몸을 차지한 영혼이다.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자세를 취했다. 당장에라도 나를 공격할 듯이 구는 그 모습에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찰나.
“윽!”
갑작스럽게 불어온 바람에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몸이 날아갔다.
“윤리사 길드장님!”
“괜찮아요!”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고선 눈앞의 남자를 노려봤다.
방심했다가 큰코다칠 뻔했다.
‘쓰러져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이랑은 다른 모양이네.’
나는 피식 웃고는 땅을 박찼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강한 바람이 또 한 번 들이닥치는가 싶더니.
“우웁!”
갑작스럽게 물보라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바람에 이어 물?!’
지금까지 신인들은 모두 한 속성만 사용했다.
그런데 두 가지 속성이라니!
당황하는 것도 잠시.
화르륵!
‘지운휴’의 주위로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