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선산(1)
12공방 마을 옆의 작은 산.
‘선산’이라 불리는 곳을 나는 현원창과 함께 올랐다. 정확히는, 넋이 나간 얼굴로 산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을 깨우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현원창이 아들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지 않을까요?”
더욱이 어떻게 저들을 깨워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혔다.
“일단, 계속 따라가 보죠.”
이 산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했으면 진작 끼쳤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어.’
다만, 궁금해졌다.
선산이 사람들을 도대체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건지 말이다.
하지만 그 의문은 곧 해결됐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곳입니다.”
“네?”
“선조들께서 만든 싸움터가 곧 보일 거란 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선산이 사람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고 있는 건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현원창이 말한 옛 장인들이 만든 싸움터.
산은 지금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실종된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곳에 있을 터.
나는 그림자를 움직여 창을 만들어 냈다.
“뭐 하는 겁니까?”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고요.”
옛 장인들의 싸움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철저하게 대비해야 했다.
나와 현원창마저 앞서가고 있는 저들처럼 되면, 12공방은 완벽하게 잊힐 테니.
‘마을 사람들의 부재를 떠올리지 못한 것만 봐도 그래.’
나는 긴장감 어린 얼굴로 선산을 올랐다. 그렇게 넋이 나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정상에 올랐을 때.
“와아아아!”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됐다.
***
“아하하하! 뭐 하는 거냐?! 제대로 싸워라, 싸워!”
“어이~! 2공방주! 4공방주한테 그렇게 밀릴 거냐?!”
“제대로 주먹을 휘둘러! 네가 이길 거라고 걸었단 말이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마치, 콜로세움처럼 생긴 원형의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서로 주먹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계단에 둘러앉아 싸우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웃고 있었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때, 내 옆으로 청해진이 지나갔다.
“해진이 오빠!”
급히 그를 불렀지만 청해진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현한도, 우암도 그리고 우아영도 넋이 나간 얼굴 그대로 청해진과 함께 원형 경기장으로 내려가 버렸다.
“제,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겁니까? 저 광경, 저만 보고 있는 게 아니지요?”
현원창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도로 질문을 던졌다.
“저 경기장이 바로 옛 장인들이 만들었다는 싸움터인가요?”
“네? 아, 네.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저곳에서 장인들이 서로 주먹다짐을 하며 싸웠다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던 그때, 현원창이 놀라 소리 질렀다.
“아버지!”
옛 장인들의 싸움터를 처음 발견한 그의 아버지가 원형 경기장 중앙에 흐뭇한 얼굴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현원창의 목소리는 닿지 않은 듯했다.
“선조들이시여, 새로운 몸이 도착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보다 뭐라고? 새로운 몸?
‘잘못 들은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아버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새로운 몸이라니요!”
현원창이 희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아무래도 내가 현훈의 말을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새로운 몸이라…….’
도대체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지껄인 걸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 선조들이시여! 어서 이들 몸에 빙의되십시오!”
현훈의 말과 함께 하늘이 울렸다.
그리고, 곧.
“오… 오오……!”
넋이 나가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몸이다, 몸이야!”
“나는 어린 계집의 몸을 차지해 버렸군.”
“아하하하! 청(淸)의 몸이 내 것이 됐다네! 보이는가?!”
엄한 사람들이, 아니. 12공방의 옛 선조들이 정신을 차렸다는 거다. 계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축하해 주기 시작했다.
“축하하네, 축하해!”
“자네는 싸움판에 끼어들지 못하겠구만!”
“자네도 안 돼! 청(淸)의 힘을 사용하면 큰일 나니!”
와하하하하!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목소리에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아… 아버지…….”
현원창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허망하게 현훈을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 역시 현훈에게는 닿지 못했다.
“자, 선조들이시여! 다시 경기를 계속하도록 하지요!”
현훈이 사람들을, 아니. 옛 선조들의 흥을 돋웠다. 그의 말에 진작 죽어 없어져야 했던 영혼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좋네, 좋아! 어디 한 번 다시 신이 나게 다시 놀아 보자고!”
“그 전에 새로 몸을 얻은 녀석들이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게 어떤가?”
“좋은 생각이군!”
좋은 생각이고 자시고 화가 났다.
후손들의 몸을 차지해서 자기들 좋을 대로 싸우고 있는 꼴이라니.
나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현원창 님.”
넋이 나가 있던 그가 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현원창 님 손으로 패륜을 저지를 수는 없겠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 아버지, 당신 손으로 때릴 수 있겠느냐고요.”
“없습니다!”
현원창이 놀라 소리 질렀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픽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십니까?”
“저 짓거리 말리러요.”
“자, 잠시만요! 윤리사 길드장님! 제 아버지를 때리는 건……!”
“안 때려요, 안 때려.”
나는 현원창의 걱정을 덜어주고는 원형 경기장에 들어섰다.
촤아악-!
그림자를 움직여, 원형 경기장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모두 봉쇄하면서 말이다.
“뭐, 뭐야?! 몸이 안 움직여!”
사람들이, 아니. 그들의 몸을 차지한 영혼들이 당황하며 아우성댔다.
덕분에 편안하게 원형 경기장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제길! 이런 것쯤은, 청(淸)이 가진 힘으로……!”
“멈춰 주시겠어요?”
청해진의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그 몸을 차지한 영혼에게 경고했다.
“죄송하지만, 그 몸. 제 길드원의 몸이거든요.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 주실래요?”
다치기라도 해 봐. 네가 책임지고 치료해 줄 거야? 더욱이 청해진은 청해솔의 하나뿐인 동생이라고.
나는 청해진의 몸을 차지한 영혼이 허튼짓이라도 할까 싶어 그림자로 아예 꽁꽁 묶어 버렸다.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영혼들이 모두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원형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사회를 보고 있던 현훈 역시 마찬가지.
그대로 그를 향해 걸어가는데.
“사희?”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사희는 제 증조할머니세요.”
히익!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2공방과 이매망량과의 관계가 꽤 긴밀한 것 같더니만. 윤사희 때문이었나 보다.
그보다 우리 할머니, 도대체 12공방과 어떤 사이였기에 저 귀신들이 겁을 먹은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자리를 방해하는 것이냐! 선산에는 또 어떻게 올라온 것이고!”
현훈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나참, 목청 한 번 크시다.
나는 귀를 후비적거리고는 말했다.
“딱히 방해한 거 아닌데요? 나잇값 못하는 선조님들이 후손들 몸을 차지해서 노는 게 고까워서 잠시 나온 것뿐이에요.”
“뭐, 뭣!”
“그리고 선산을 올라온 건…….”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방긋 웃어 줬다.
“이 산이, 저의 출입을 허락해 줬으니까 그런 거겠죠?”
“그럴 리가!”
현훈이 경악했다.
“이 사특한 외부인 같으니라고! 분명 이 산에 무슨 짓을 한 것이렷다!”
사특한 건, 후손들 몸을 차지한 저 귀신들이지 않나?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절로 나왔지마는 나는 친절하게 대꾸해 줬다.
“산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현훈 님이지 않나요?”
“뭐라?!”
“애꿎은 마을 사람들을 이곳에 불러 선조들에게 몸을 내놓게 하다니.”
짧게 혀를 차며 말을 끝마쳤다.
“12공방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이 산이 정말 슬퍼하겠어요.”
그러니까 나와 현원창이 산을 오를 수 있도록 입구를 열어 준 거겠지.
현훈은 내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부인 주제에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는 것이냐?!”
“그럼, 외부인이 아닌 사람은 떠들어대도 되나요?”
나는 그렇게 물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현원창 님, 계속 그렇게 있을 거예요?”
“현원창?!”
현훈이 화들짝 놀라 내가 보고 있는 쪽을 쳐다봤다.
“……아버지.”
현원창이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계시는 겁니까?”
묻는 말에 현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현원창이 목소리를 높였다.
“선조들이 차지한 몸 중 현훈도 있습니다! 설마, 하나뿐인 손주를 알아보지 못한 건 아니겠지요?!”
알아보지 못한 것 같다.
현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으니 말이다.
‘바보…….’
어른에게 실례되는 말이지만, 그런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현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