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짧은 재회(2)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탈이었다.
코가 특징적으로 두드러진 그 탈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선비……?”
“아, 이것 참.”
선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며 알은체를 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자라셨군요. 하긴, 그러니 그 자리를 이어받은 거겠지요.”
선비와는 오래된 연(緣)이 있었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악연이라면 악연인데.
“당신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죠?”
아무래도 선비와는 악연으로 완전히 돌아설 것 같았다.
선비가 내 물음에 웃으며 말했다.
“그야, 저희 유랑단의 귀한 손님을 모시러 왔기 때문이죠.”
“귀한 손님이라니…….”
이 자리에서 선비가 데리고 갈 만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거짓말.”
나는 저세상을 향해 물었다.
“거짓말이지?”
저세상은 말이 없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나는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저세상은 조용히 고개 숙였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다급하게 빌었다.
“아니라고 해. 제발 아니라고 하란 말이야! 저 망할 선비 새끼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라고!”
제발.
“그렇게 말하란 말이야, 저세상.”
“……미안해.”
저세상이 나를 보며 애달프게 미소를 그렸다.
“다음에 만날 때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서 그는 경고했다.
“그때는 이번처럼 봐주지 않을 테니까.”
절대로.
그가 나지막하게 뒷말을 덧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동작 그만.”
이운조가 그 움직임을 막았다.
“유랑단의 탈쟁이 새끼가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었으면서 그대로 줄행랑을 치겠다고?”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감히, 내 앞에서?”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파지직!
이운조의 주위로 푸른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일 듯이 선비를 노려보며 나를 향해 말했다.
“윤리사, 정신 차려. 이대로 저 자식 놓칠 거야?”
다그치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운조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 저세상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표정을 굳히며 저세상을 노려봤다. 선비가 저세상의 앞에 서며 내 시선을 가로막았다.
“이것, 참. 두 사람 다 꼭 이래야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래야겠는데?”
이운조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내 사전에 탈쟁이 새끼들을 놓아준다는 말은 없어서.”
“그렇군요.”
선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당신께서 무슨 수로 저를 잡겠다는 건지?”
그 말과 동시에 선비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가 다시 나타난 건, 이운조의 코앞에서였다.
“당신은 저를 잡지 못합니다.”
“과연 그럴까?”
이운조의 주변에서 튀던 스파크가 선비를 직격했다.
아니, 그를 맞추지는 못했다.
가까스로 이운조의 공격을 피한 선비가 짧게 혀를 찼다.
“포악하기는.”
“탈쟁이 새끼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은데?”
이운조가 비딱하게 웃었다.
“리사, 그대로 계속 있을 거야?”
“설마요.”
나는 그림자를 이용해공간을 만들어 냈다. 선비가 저세상을 데리고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선비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투로 중얼거렸다.
“도깨비의 따님께 이런 힘이 있을 줄 몰랐는데 말입니다.”
“저도 몰랐어요.”
귀수산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터득하지 못했을 힘.
나는 그 힘을 이용해 검을 만들어 낸 후 말했다.
“운조 언니, 서포트 부탁할게요.”
“서포트는 네가 해야지.”
이운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뚝, 그 웃음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비와 저세상을 향해 걸음을 박찼다.
***
“선비, 나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비가 짜증스럽게 외치며 이동을 시전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공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선비가 욕을 내뱉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그림자 공간이 부서져야 스킬이 제대로 사용되나 봅니다.”
“그래?”
저세상이 제 주위로 어둡게 처져 있는 막(幕)을 둘러봤다.
“상처 입히고 싶지는 않은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선비가 얼굴을 구겼다.
“누구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상처를 입혀야만 저희가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아님, 이대로 계속 시간을 질질 끌 생각입니까?”
언제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니!
선비가 자신을 향해 날아온 전격을 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부수려면 빨리 부수십시오! 그게 싫다면 억지로라도 이 공간을 비틀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안 돼.”
그랬다가는 윤리사가 내상을 심각하게 입고 말 거다.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짜증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저세상이 대답했다.
“내가 부술게, 이 공간.”
저세상이 사슬을 움직였다.
촤르륵!
의지를 가진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기에 윤리사가 소리 질렀다.
“언니!”
푸른 전격이 저세상의 사슬을 강타했다. 주춤거리며 잠시 물러난 무기를 보고 윤리사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세상!”
쐐액!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는 검을 저세상이 가뿐하게 피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윤리사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공격에 저세상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윤리사, 검은 감정을 담아서 휘두르면 안 되는 물건이야.”
“닥쳐!”
윤리사가 사납게 일갈했다.
“나한테 훈계하지 마.”
그녀 역시 자신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감정보다 이성이 앞선다고 생각했지만, 저세상의 앞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망할!’
윤리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발, 진정하자. 이대로라면 저세상이 이 공간을 부수고 선비와 함께 탈출하고 말 거야. 그걸 눈 뜨고 지켜볼 생각이야?!
윤리사가 스스로를 타박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차갑게 머리를 식힌 것이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빈틈이 없어진 그 모습에 저세상이 입술을 오므렸다가 미소를 그렸다.
“그래, 그거야.”
“칭찬도 하지 말아 줄래?”
자신이 그의 적이란 자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윤리사가 짧게 혀를 차고는 걸음을 박차 움직였다. 저세상의 앞에 빠른 속도로 다가선 그녀가 곧장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윤리사의 검은 저세상에게 닿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검을 피한 저세상이 싱긋 웃었다.
“계속 그런 식으로 성장해 줘. 다시 만날 그날까지.”
그렇게 머지않은 미래에서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도록.
“알겠지?”
다정하게 건네진 목소리에 윤리사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기껏 머리를 차갑게 식혔건만, 다시 감정이 들끓어 이성을 잡아먹고 말았다.
“저세상!”
부르짖는 목소리에 저세상이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는 사슬을 움직여 윤리사가 만들어 낸 공격을 파괴해 버렸다.
“쿨럭……!”
윤리사의 몸이 기울어졌다.
저세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선비.”
“나 참!”
이운조를 상대하고 있던 그가 순식간에 저세상의 옆으로 이동했다.
“진작 좀 부술 것이지!”
“어쨌든 부쉈으니 됐잖아. 잔소리할 시간에 빨리 이동하기나 하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니 명령하지 마십시오.”
선비가 불쾌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저세상을 붙잡았다.
“거기 안 서?!”
이운조가 뒤늦게 그들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다음에 봅시다. 그 전에 죽어 주시면 더 좋고.”
선비는 그녀를 놀리며 저세상과 함께 모습을 감춰 버렸다.
“망할!”
이운조가 욕설을 지껄이고는 윤리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
윤리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이운조가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 어차피 곧 AMO 녀석들이 올 테니까.”
그 말에 윤리사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쳤다.
기껏 찾은 저세상을, 나의 세상을 무너뜨린 그를 너무나도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윤리사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
‘계속 그런 식으로 성장해 줘. 다시 만날 그날까지.’
저세상이 남기고 떠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 자식은 내가 그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긴 한 건가?
그 전에.
‘유랑단이라니.’
선비는 분명 말했다.
저세상이 유랑단의 귀한 손님이라고 말이다.
‘도대체 왜?’
왜 하필 유랑단인 거야?
저세상의 멱살을 붙잡고서 그렇게 묻고 싶었다.
『각성, 그 후』에서 그토록 전멸시키고자 했으면서, 가장 최악인 악(惡)으로 규정했으면서.
“도대체, 왜……!”
왜 그들과 손을 잡은 걸까?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두 손을 들었다.
저세상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그와 보낸 짧은 해후가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했다.
“으…… 흐윽…….”
나는 억눌린 숨을 토해 내며 비명 대신 울음을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