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능력 증명(4)
테이커의 길드장, 얀은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분명, 은행을 털고 유랑단의 도움을 받아 내뺄 작정이었는데…….
‘망할 유랑단 놈들!’
그들은 끝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뒤를 봐준다고 했으면서!’
그 말만 믿고 일을 저지른 건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말았다.
윤사해의 딸이 그곳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욱이 그녀에게 그런 힘이 있을 줄 몰랐다.
‘얕보는 게 아니었는데!’
암만 어린 계집이라고 해도 윤사해의 딸이다. 그의 자식인 만큼 가진 힘을 철저히 경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S급인 줄 몰랐으니까!’
윤리사가 S급 각성자인 줄 알았더라면 그녀를 상대하는 대신 도망치는 걸 선택했을 거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
얀은 과거를 후회하는 대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우선 도망부터 치고!’
이대로 붙잡히면 다음이고 뭐고 AMO의 지하에서 썩게 될 거다.
‘그럴 수는 없다.’
얀이 이를 으득 갈고는 다리를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이대로 서울을 벗어나, 잠적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얀은 그러지 못했다.
인적 드문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얀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무기는 윤리사에 의해 박살 난 지 오래, 맨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적이라면 말이다.
얀이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랑단이 보낸 녀석이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얀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테이커의 얀이라고 한다.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는지 이유는 묻지 않겠다. 대신,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하는군.”
이번에 남자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당연히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얀이 으득 이를 갈고는.
“유랑단의 인간이라면 뭐라 말 좀 해 보지 그러나!”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앞의 남자가 암만 유랑단의 인간이라고 해도 말단일 터. 아홉 탈 중 하나만 아니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다.
얀은 그렇게 생각했다.
“끄…… 끄아아악……!”
어리석게도 말이다.
순식간에 팔이 꺾여 버린 얀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너희는 분명 우리의 뒤를 봐준다고 했을 텐데! 그런데 이렇게 공격이라니!”
“공격은 댁이 먼저 했지 않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얀은 당황했다. 들린 목소리가 생각보다 앳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유랑단이다!’
얀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는 남자를 향해 손을 들었다.
가지고 있는 스킬로 신체를 강화했으니, 남자에게 타격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얀의 손은 남자에게 닿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아니, 잘려 날아가 버렸다.
“아아아악!”
얀이 피가 솟구치고 있는 왼쪽 손목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사슬이 얀의 목숨을 앗아 갔기 때문이다.
“더러워졌네…….”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뱉는 순간.
“우왓! 뭐야?”
불청객이 찾아왔다.
얀의 흔적을 쫓아 이곳에 도달한 이운조가 얼굴을 찌푸리며 남자에게 물었다.
“저거 네가 이런 거야?”
이운조가 얀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 몸을 돌렸다.
“어디 가?”
파지직!
푸른 전격이 남자를 멈춰 세웠다.
이운조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내가 물었잖아. 저 자식, 네가 저렇게 만든 거냐고. 대답하기 전까지는 못 갈 줄 알아.”
“……당신 질문에 대답하면 보내 주실 겁니까?”
“네가 어떤 식으로 대답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이운조가 비릿하게 웃었다.
“자, 이제 말해 보지 그래? 저거, 네가.”
“네.”
남자가 이운조의 말을 끊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그랬습니다.”
파지직―!
이운조의 주변으로 스파크가 격렬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한 듯, 싱글벙글 웃고 있던 얼굴도 굳어 있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왜 이러는 거냐고?”
이운조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 지금 사람을 죽인 거야.”
“네, 압니다.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쓰레기를 죽였죠.”
그 말에 이운조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 자식이 쓰레기인 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남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고요해진 그의 모습에 이운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유랑단이냐?”
남자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하하, 이운조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긍정으로 생각할게?”
그 말과 함께 그녀가 순식간에 남자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파앗!
이운조가 다시 나타난 건, 남자의 코앞에서였다.
파지직!
남자가 가까스로 그녀가 날린 푸른 전격을 피했다. 그에 이운조가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남자를 향해 전격을 날렸다.
이번에는 그녀의 공격이 정확하게 남자에게 들어갔다.
파지직!
스파크가 튀는 몸에 이운조가 웃으며 말했다.
“몸 성하게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곧,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짓씹듯이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유랑단 녀석들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말이지.”
그 말에 남자가 웃었다.
“당신은 유랑단뿐만이 아니라 지하 길드에 속해 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모두 싫어하지 않습니까?”
이운조가 불쾌하다는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식으로 지껄이는 건지 궁금한데?”
“하긴, 궁금해하실 만도 하죠. 그렇지만 이운조 씨.”
남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생각 따위 없습니다.”
촤르르륵!
남자의 주위로 여러 개의 쇠사슬이 나타났다.
***
콰광―!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욱하게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 비서님.”
―네, 길드장님.
내가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물었다.
“제가 있는 곳 근처에 혹시 사고가 일어났다거나, 그런 신고가 들어온 게 있을까요?”
나는 그렇게 질문하면서 서차웅에게 내 위치를 알렸다.
―있습니다. 폭발 사고나 그런 건 아니고, 각성자들 간에 전투가 이뤄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각성자들 사이에서요?”
설마, 테이커의 길드장과 이운조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난 건가?
이곳은 테이커의 길드장이 남긴 흔적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운조라면 테이커의 길드장과 전투는 무슨, 순식간에 그를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서 비서님, AMO 쪽에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이곳으로 인력을 보내 달라고 해 주세요.”
아무래도 이운조는 테이커의 길드장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싸움을 시작한 것 같았다.
그녀가 쉽게 제압하지 못하는, 꽤 강한 상대와 말이다.
나는 서차웅과의 연락을 끊은 후, 빠르게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갔다.
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사람들이 울고불고하며 나와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각성자로 보이는 몇몇이 그들의 대피를 돕고 있는 게 보였다.
‘좋아. 내가 도와줄 필요는 없는 것 같네.’
나는 대피하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시선을 돌린 후 빠르게 움직였다가.
“으악!”
나를 향해 날아온 사람을 붙잡게 됐다. 나도 모르게 행한 조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어쨌든 사람을 구했으니 괜찮은가 살펴보려고 했는데.
“운조 언니?!”
나를 향해 날아왔던 사람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운조가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 리사. 나이스 캐치.”
“나이스 캐치고 자시고 무슨 일이에요?”
“아아, 그게 말이야.”
이운조가 푸석한 머리칼을 긁적이는가 싶더니 내 멱살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리사, 피해!”
덕분에 이운조와 사이좋게 바닥을 구르게 됐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저걸 좀 보라고.”
이운조가 위를 가리켰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건가 싶어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니.
“사슬?”
웬 사슬이 꽂혀 있었다.
“저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
이운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유랑단에 그런 성가신 녀석이 있는 줄 몰랐어. 보아하니 탈도 아닌 것 같던데.”
“유랑단이랑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테이커의 길드장은요?”
“죽었어.”
“뭐라고요?!”
죽었다니!
테이커의 길드장이 자살을 했을 리는 없다. AMO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도망을 쳤는데 자살했다니!
“도대체 누가 죽인 건데요?”
“저 새끼가.”
이운조가 앞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살포시 미간을 좁히며 그녀와 같은 방향을 쳐다봤다.
조금 전,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인지 자욱하게 연기가 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연기가 걷히며 나는 이운조가 가리킨 사람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됐다.
“……저세상.”
복면이 반쯤 벗겨진 남자가 내 부름에 싱긋 웃었다.
“안녕, 윤리사.”
그는 그대로 너덜해진 복면을 벗어 버리고는 나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