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혹독한 겨울맞이(1)
“……로저 에스테라?”
저세상이 놀란 눈으로 남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안녕하십니까, 형제님?”
로저 에스테라가 싱긋 웃으며 저세상에게 인사했다.
“형제님께서는 분명 비각성자라고 들었습니다만…….”
붉은 눈이 휘게 접혔다.
“아무래도 아니었나 봅니다? 그것도 아니면 일부러 모두에게 숨기고 있었던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이제 와서 각성이라도 했단 소리입니까? 그렇다면 신기하군요.”
로저 에스테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부분의 각성자는 열일곱 때 자신의 힘을 깨우치죠. 그보다 늦게 각성을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로저 에스테라가 우성운의 등을 짓밟고 있던 발을 내리고는 말했다.
“형제님처럼 스물에 가까운 나이에 각성을 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저세상은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그 시선에 로저 에스테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저는 형제님을 해칠 생각 따위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보이기는 했다.
로저 에스테라라면 지금의 자신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한테서는 아무런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 모를 불쾌감에 기분만 언짢아졌을뿐.
‘그러고 보니 이 불쾌감.’
저세상이 기절한 듯 두 눈을 감고 있는 우성운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을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우성운한테 저 칼을 쥐어준 사람, 당신이에요?”
“오, 바로 알아보는군요.”
로저 에스테라가 기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형제님께서는 저와 동족인가 봅니다.”
저세상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당신이랑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저는 사실을 말한 것 뿐이랍니다, 형제님.”
로저 에스테라가 저세상의 날선 목소리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형제님께서도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이 이 세상에 강림하는 걸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런 걸 원할 리가 없잖아! 나는 오히려……!”
저세상이 목을 붙잡았다.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봉인의 일부가 해제됐다고 해서 제약이 풀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로저 에스테라가 그런 그를 보며 히죽거렸다.
“그거 아십니까, 형제님? 저는 형제님을 볼 때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답니다. 먼발치에서 볼 때든, 가까이에서 얼굴을 맞대든 그날은 항상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죠.”
정말이지 황홀했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에 저세상이 얼굴을 찌푸리는 찰나.
“형제님께서는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가족이라도 기꺼이 죽이겠지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세상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저는 말입니다. 수 년 전부터 세상이 불타는 것을 봤답니다. 처음에는 신께서 이를 막으라 예지를 보여주는 건가 싶었지요.”
하지만 아니었다면서 로저 에스테라가 나지막하게 말을 덧붙였다.
“신은 자신이 보여 주는 미래를 현실로 행할 것을 제가 알려주고 있었던 겁니다.”
미래라니.
저세상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로저 에스테라를 쳐다봤다. 로저 에스테라는 웃는 낯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미래를 엿볼 때면 항상 시체에 둘러싸여 있는 남자를 봤었답니다. 그게 누구였을 것 같습니까?”
붉은 눈이 번뜩였다.
“덥수룩하게 자라있는 검은 머리카락, 눈가 아래의 점 하나. 햇볕이라고는 본 적 없는 것 같은 하얀 피부를 가진 채 사슬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각성자.”
저세상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저는 조금 전, 그 남자가 형제님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저세상은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자신이 언제나 시체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지난 세계에서의 일이었을 뿐.
이 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었다는 거다.
“제가 물었지요? 형제님이라면 가족이라도 기꺼이 죽일 거라고.”
“나는……!”
“부정하지 마십시오.”
차가운 목소리가 저세상의 말을 끊었다.
“제가 본 시체 무리에는 몬스터와 인간, 그리고 신이 뒤섞여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로저 에스테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는 저세상의 귓가에 속삭였다.
“---.”
저세상이 숨을 멈추고는.
“헛소리 지껄이지 마. 네가 본 건 미래 따위가 아니야.”
로저 에스테라의 목을 향해 사슬을 움직였다. 그는 저세상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로저 에스테라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기절해 있는 우성운을 어깨에 들쳐멨다.
“형제님께서 지금 저를 막는다면 그 미래가 현실로 이뤄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해 주지.”
저세상은 로저 에스테라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세계에서 분명 그가 가진 힘이라고는 신벌(神罰)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미래라니?
못 미더운 소리였지만, 이미 지난 세계와는 다르게 바뀔 대로 바뀌어버린 세계.
로저 에스테라가 지난 세계에서 얻지 못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저세상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뒷일은 나중에.
윤리사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한테 배운 거였다. 그렇게 저세상이 힘을 사용하려고 할 때였다.
【계약에 따라 행동에 제약이 이뤄집니다.】
갑자기 나타난 붉은 시스템 창에 저세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가 다시 힘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발이 땅에 붙은 듯 꼼작도 하지 않았다.
‘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건데?’
저세상이 이를 악 물고는 눈 앞의 남자를 노려봤다.
‘왜!’
로저 에스테라가 싱긋 웃었다.
“형제님, 미래란 것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몇 번이고 바뀌는 거라고 하지요 형제님께서는 어떨 것 같습니까?”
로저 에스테라가 저세상을 향해 한껏 웃어 보였다.
“제가 본 미래가 현실로 들이닥칠 것 같습니까?”
아님.
“바뀔 것 같습니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저세상은 그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거짓말…….”
비틀거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로저 에스테라가 한 말은 사실이 아니야. 거짓이야. 저 미친 신부 새끼가 헛것을 본 거라고.”
저세상이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왜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내가 왜!”
저세상이 형편없이 얼굴을 구겼다.
“왜…….”
***
날이 밝았다.
“리사, 학교 다녀오렴.”
“싫어.”
“리사.”
다정하게 나를 타이르는 목소리에 빼액 소리를 질렀다.
“저세상은 어쩌고!”
저세상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그의 행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이는 아빠가 열심히 찾아보마. 안 그래도 이매망량의 모든 인력을 동원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윤사해의 말을 끊고는 얼굴을 구겼다.
“그 말, 새벽에도 했어.”
“리사.”
윤사해가 나를 타일렀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렴. 꼭 세상이 찾아낼 테니까.”
“길드장님, 저 왔어요!”
“마침 류화홍 헌터도 왔구나. 어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렴.”
단호하면서도 엄한 목소리에 나는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교복을 입고 나오니 윤사해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세상을 찾으러 나간 모양이었다.
대신 집을 지키고 있던 류화홍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이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못 찾았잖아.”
저세상이 사라졌음을 알린 새벽부터 지금까지 그를 찾지 못했다.
“탈쟁이 새끼들한테 잡혀간 거라면 어쩌지? 어릴 때처럼 할미가 숲에 가둬 버린 거라면?”
“아가씨, 유랑단은 기본적으로 길드장님은 절대 건드리지 않아요. 길드장님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물론, 아가씨도 리오 도련님도 리타 도련님도 유랑단의 탈쟁이 녀석들한테 숱한 위험을 받았죠. 하지만 아가씨.”
류화홍이 상냥하게 나를 달랬다.
“지난 몇 년간 유랑단의 탈들이 찾아온 적 있었나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유랑단의 빌어먹을 탈쟁이 녀석들이 지난 몇 년간 나를 찾아온 일은 없었다.
물론, 저세상도.
윤리오와 윤리타야 이매망량에 입단한 후 줄곧 던전 공략만 다녔으니까 그들을 만날 일이 없었을 테고 말이지.
“그러니까 세상이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길드장님께서 랑야 님을 비롯한 거주자분들을 모두 밖으로 불러냈으니까요.”
계약 중인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을 모두 밖으로 불러냈다니!
“아빠가 그랬단 말이야?”
“네.”
류화홍이 싱긋 웃었다.
“세상이도 길드장님의 자식이나 다름없잖아요. 최선을 다해서 찾고 싶을 거예요.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어서 학교 가요.”
“으응.”
나는 류화홍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기 무섭게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비나리 고등학교에 도착한 거다.
학교에 입학한 후, 난생처음으로 나 혼자서.
“……화홍이 오빠.”
“네?”
“저세상 찾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데려와 줘. 그 자식, 한 대 때려야 분이 풀릴 것 같으니까.”
내 말에 류화홍이 싱긋 웃었다.
“네, 알겠어요.”
하지만 그가 그 말을 지키는 일은 없었다. 며칠이 지나 이른 첫눈이 내릴 때까지도…….
그 누구도 저세상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