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겨울 준비(10)
‘봉인이 일시적으로 해제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저세상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는 곧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설마,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 정말로?!’
저세상이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펼쳤다.
파스슷-!
손바닥을 중심으로 일어난 검은 연기에 저세상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정말 힘을 사용할 수 있어.’
봉인이 해제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43일.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왜 인제 와서 봉인의 일부가 풀렸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저세상은 지난 세계에서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무기를 구현해 봤다.
절그럭, 그의 손바닥에서 일어난 검은 연기가 쇠사슬로 변했다.
제 손에 쥐어지는 무게에 저세상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정말이야……?”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 그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비각성자로 살아왔다.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세상은 애초에 비각성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지난 세계에서 10년이란 시간을 각성자로 살아왔던 자였다.
그런 그가 다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무력하게 살게 된 것이다.
저세상이 손에 쥔 사슬을 꽉 끌어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밖으로 나가 윤사해에게 말하고 싶었다. 윤리오에게도, 윤리타에게도.
그리고.
‘윤리사.’
그녀에게도 밝히고 싶었다.
자신이 각성자가 됐노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봉인이 풀렸다고 해도 나한테 남아 있는 제약은 여전할 터.’
그렇기에 그들 앞에서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밝히고자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색하게 웃고 말겠지.
그리고 걱정을 끼치게 될 거다.
그러고는 싶지 않은 저세상이었기에 그는 생각했다.
‘일단 밤이 깊어지면 몰래 집을 빠져나가 보자. 그런 후에 힘이 제대로 돌아온 게 맞는지 확인해 보는 거야.’
저세상이 사슬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거짓말같이 검은 연기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저세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힘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윤사해 역시 자신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 그림자를 다뤘다.
‘나처럼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연기가 아니라.’
저세상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검은 연기를 사라지게끔 만들었다.
“후우.”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이야.’
저세상은 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정확히는 윤사해가 자신의 방을 확인한 후 나가기를 기다렸다.
윤사해는 밤늦게 집에 돌아올 때면 언제나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윤사해는 침대에서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자신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저세상은 꼭 닫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나가자.’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 중에는 이동 스킬도 있었으니까.
‘이 스킬의 봉인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정말 곤란했을 거야.’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방에서 숨죽인 채 자신의 힘을 다뤄 봤을 테다.
‘어쩌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자신이 헛것을 본 거라며 그렇게 치부했을 거다. 그만큼 저세상에게 벌어진 일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가자.’
저세상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에 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렇기에 그는 알지 못했다.
“저세상, 자?”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윤리사가 자신을 찾아온 것을 말이다.
***
“저세상?”
뭐야, 이자식 어디 갔어?
나는 놀란 눈으로 저세상의 방을 살폈다.
“저세상? 야? 장난치지 마!”
저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싶어서 침대 밑도 살펴보고 옷장 문도 열어 봤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저세상! 야!”
이 자식, 윤사해 모르게 가출이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윤사해가 자기를 기다리느라 귀를 쫑긋 세워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씨네 중 누군가 밖으로 나가는 건 들은 적이 없단 말씀!
그런데 저세상이 사라져 버렸다.
“호, 혹시…….”
납치를 당한 건 아니겠지?
윤사해가 암만 집안 곳곳에 침입자를 대비한 온갖 아이템을 배치해 뒀다고 해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다시 한번 더 저세상을 찾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이번에도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저세상의 방을 뛰쳐나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아빠!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리사? 무슨 일이니?!”
“리사! 무슨 일이야?!”
“윤리사, 밤 중에 그렇게 시끄럽게 굴면 어떻게 해?!”
내 고함에 윤사해와 윤리오, 윤리타가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나는 윤씨네 부자들을 보며 울먹였다.
“세상이 오빠가 사라졌어!”
***
쏴아아-!
불어오는 찬 바람에 저세상이 코를 훌쩍였다.
“코트라도 입고 나올 걸 그랬나?”
그럴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날이 춥네.”
그동안 날씨가 추워졌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다.
‘오랜만에 혼자라서 그런가?’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혼자 지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그동안 자신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항상 제 곁을 지켜줬던 사람은 윤리사.
그녀의 빈자리를 몰래 집을 나온 지금 느끼고 있다니.
저세상이 피식 웃었다.
“빨리 힘을 확인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자.”
혹시라도 윤씨네 중 누군가 자신의 공백을 알아차리면 곤란했다.
분명 큰일이 일어날 텐데, 도대체 어떻게 변명한단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에 저세상이 격하게 고개를 젓고는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파스슷-!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연기가 일어났다. 이내 한 데 점으로 모인 것이 둥근 형태를 이뤘다.
따악!
저세상이 손가락을 튕겨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형성된 구체가 곧장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우지끈-!
나무가 반으로 쪼개졌다.
저세상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가 벅벅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이렇게 조절이 안 되는 힘이었나?”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 때문에 AMO의 감시하에 4대 길드에 돌아가며 맡겨졌었지.’
저세상이 짧게 혀를 차고는 무기를 구현해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주변으로 형성된 사슬을 보고는 미소를 그렸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이 제 무기에 묻힌 수많은 피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지나간 일이야.’
이 세계 역시 지난 세계와 똑같이 지하 길드의 빌어먹을 놈들에 의해 엉망이 될 터.
자신은 이번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의 피를 묻힐 테다.
지난날과 다르다면, 이번에는 죽여야 할 녀석들만 죽일 거라는 것.
윤사해가 제 손에 죽을 일은 없을 거란 거였다.
‘그래, 그럴 거야.’
꼭 그렇게 만들 거다.
저세상이 무기를 꼭 끌어 쥐며 크게 숨을 들이마실 때였다.
“으아아악!”
“도, 도망쳐!”
“꺄아악!”
공원 안쪽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저세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몰라 무기를 두 손에 쥔 채 말이다.
그렇게 다다른 곳에서.
“너……!”
저세상은 놀란 눈을 보였다.
“우성운?!”
종적을 감춘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우성운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입고 있는 교복은 색이 바랜 채 곳곳이 구겨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 그 칼 당장 버려! 지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방금 막 사람을 찌른 듯,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이 우성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우성운이 물끄러미 저세상을 쳐다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저세상!”
그가 보이는 맑기 그지없는 표정에 저세상이 움찔거렸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저세상은 일단 자신이 느낀 감각을 묻어 두기로 하고 우성운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너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서 뭐하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우리……?”
우성운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었다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자괴감 섞인 목소리에 저세상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거짓말이라니?”
“거짓말이잖아.”
우성운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도 조금 전에 도망간 그 새끼들도 나 걱정한 적 없잖아! 오히려 비웃느라 바빴겠지!”
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우성운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신우한테서 버림받았다고. 신우가 나를 버림받았다고! 그렇게 비웃어대고 있었을 게 뻔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시끄러! 그 입 닥쳐!”
우성운이 짓씹듯이 목소리를 내뱉으며 저세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 쥐고 있는 칼을 들어올리며 말이다.
저세상이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말로 해서 들을 정신머리가 아니다.
‘어쩔 수 없지.’
저세상이 사슬을 움직여 우성운을 기절시키려고 할 때였다.
“이런, 성운 군. 친구를 해치려고 들면 안 되죠?”
누군가 우성운의 등을 짓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