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겨울 준비(9)
“아빠!”
저세상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윤사해에게 물었다.
“아빠, 지금 많이 바빠?”
-그렇게 바쁘지는 않단다. 무슨 일이니? 지금 학교일 텐데…….
왜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는 거냐는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리고 지금 점심시간이야!”
-그렇구나.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이니? 아빠 도움이 필요한 일이야?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우신우 알지?”
-우신우라면…….
“성운이 사촌 형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 귀가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뒤 말했다.
“로저 신부님한테 감금당해 있어.”
-뭐? 리사,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을 것 같아?”
묻는 말에 끄응 앓는 소리가 들렸다. 곧 윤사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리사, 아빠가 함부로 스킬 사용하지 말라고 했잖니.
“그렇지만 신우가 걱정됐는걸!”
-어쨌든 알았단다. 아빠가 알아볼 테니 신우 일은 걱정하지 마렴.
“응, 고마워! 수업 잘 듣고 말썽 안 피우고 있을게!”
-그래.
그 대답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나는 다시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아저씨가 뭐래?”
“알아보고 전화 준대.”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괜찮아, 괜찮아!”
나는 저세상의 걱정을 덜어 준 뒤 활짝 웃었다.
“오늘 저녁에 아빠 어깨 꾹꾹 주물러 주면 되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저세상이 그렇게 말하면서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가 가라앉은 곳, 귀수산.
그곳의 한가운데 있는 이매망량의 주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가씨께서 뭐라십니까?”
윤사해가 서차웅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나한테 부탁 좀 했네. 큰 일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니 다행이지.”
윤사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랑야.”
〖뭐야?〗
손주들을 보며 헤벌레하고 있던 랑야가 얼굴을 찌푸렸다.
“쌍둥이 녀석들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잠시 밖에 좀 다녀와 주겠나?”
〖미안하지만 오늘은 귀수산에 있고 싶은데? 그동안 바깥을 너무 돌아다녔거든.〗
“로저 에스테라의 일이라네.”
〖또 그 자식이야?〗
랑야가 질린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우리 딸의 친구가 그 녀석한테 감금당해 있다더군.”
〖뭐? 설마, 우성운이라는 놈을 말하는 거야?〗
놀라 묻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자네가 그 아이는 어떻게 아나?”
〖네 녀석 따님께서 나한테 부탁했었거든. 우성운이란 놈을 좀 찾아 달라고.〗
“그런…….”
윤사해가 뭐라 더 말하려고 하다가 관자놀이를 짚은 후 물었다.
“그래서 찾았나?”
〖아니.〗
랑야가 고개를 저었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전혀 쫓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지금 반쯤 포기 중이야.〗
“그러지 말고 못 찾을 것 같으면 리사한테 솔직하게 말해 주게. 리사는 지금 자네가 그 아이를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 말에 윤사해가 짧게 혀를 찼다.
“어쨌든 로저 에스테라에게 잠시 다녀와 주게. 그 녀석이 눈치챌 수 없도록.”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지. 우신우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정말 광신도 녀석한테 감금당해 있는지 확인하고 오면 되나?〗
“그래.”
윤사해의 대답에 랑야가 손주들을 품에서 내려놓았지만.
“할부지 어디 가?”
“어디 가아?”
사야와 류화홍의 아이들이 곧장 그를 붙잡았다.
〖사하, 홍랑. 저 녀석이랑 잠시 있거라. 금방 다녀오마.〗
랑야가 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를 내고는 곧장 모습을 바꿨다.
“할부지 늑대!”
“늑대 돼써!”
류사하와 류홍랑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랑야의 털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이녀석들아, 아프다!〗
앓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랑야한테서 떼어놓았다.
“다녀오게.”
〖그래.〗
랑야가 아이들이 울기라도 할까 싶어 곧장 모습을 감췄다.
“할부지 사라져써!”
“사라져써!”
류사하와 류홍랑이 윤사해의 품에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금방 돌아올 거다.”
윤사해가 아이들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
“서 비서.”
“네, 길드장님.”
“로저 에스테라에 대한 정보는 모두 정리됐나?”
“곧 끝납니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 주게. 아무래도 그것들을 가지고 가서 AMO의 본부장님과 긴히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으니.”
윤사해가 아이들을 서차웅의 품에 안겨 주고는 미간을 좁혔다.
“로저…….”
윤사해의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다 둔 조각으로 향했다. 영롱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은 바로 레메게톤의 조각이었다.
‘분명 교황청에서 관리하고 있어야 할 물건이 왜 그 자식 손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물론, 윤사해가 말한 ‘그 자식’이란 로저 에스테라를 말했다.
“최설윤 길드장이 예전에 저 물건을 애타게 찾아다녔던 것 같은데.”
그녀에게 협조를 요청해 봐야 하나?
윤사해가 짧게 혀를 찼다.
***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저세상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빠한테서 소식이 없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암만 아저씨라고 해도 상대가 로저 에스테라잖아. 로저 신부는 장천의 못지 않게 자신을 숨기는 데 철저한 사람이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저세상이 조용히 입을 닫았다. 내 저럴 줄 알았지.
나는 픽 웃고는 말했다.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이해해 줘서 그것참 고맙네.”
망할 주인공님께서 비아냥거리며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재수 없어라!
나는 그를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땅 꺼지겠다. 나이도 어린 게 왜 그렇게 한숨이야?”
“나 그렇게 어리지 않거든?”
이렇게 보여도 속은 열아홉 살이다.
‘윤리사’로 산 세월을 합하면 그보다 배는 더 됐고.
하지만.
“저세상, 나는 생각보다 꽤 충동적으로 움직여.”
여기서 말하는 ‘나’란, 윤리사가 되기 이전의 나를 말하기도 했고 윤리사인 지금을 말하기도 했다.
내가 ‘마리사’일 적, 나는 철이 덜 든 것 같다는 말을 항상 들었었다.
함께 보육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철이 일찍 들었다니 뭐니 그런 말을 들었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이 싫었다.
그리고 아마 일찍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건 ‘윤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나 보다.
<[C, 숙련 가능] 윤리사는 미운 ?? 살>이 발동 중이지만, ‘마리사’였을 때나 지금에나 똑같이 행동하는 걸 보면 말이다.
더욱이 <[C, 숙련 가능] 윤리사는 미운 ?? 살>에서 그랬다.
-남아 있는 ‘윤리사’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당 나이에 맞는 아이들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그것에 맞게 행동하게 합니다.
라고 말이지.
해당 나이에 맞는 아이들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그것에 맞게 행동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토대가 되는 건 ‘윤리사’의 데이터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 모습은 ‘윤리사’가 열일곱 살 때 보여 줄 모습이란 말씀.
괜히 마음이 심란해져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는데.
“그걸 이제 알았어?”
저세상이 비웃음을 한껏 입가에 걸치면서 나를 놀렸다.
“그래도 괜찮아. 네가 암만 충동적으로 행동해도 해결 가능한 범위에서 일을 저지르잖아?”
“그거 꼭 내가 사고뭉치라는 것처럼 들린다?”
“알아들었으면 다행이네.”
이 자식이?
나는 저세상의 발목을 냅다 걷어차 버릴까 하다가 그만뒀다.
대신 말했다.
“고마워.”
“뭐?”
“고맙다고.”
저세상이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네가 우리 가족이라 다행이야.”
저세상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누구의 가족이라고! 나는 너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이거든!”
“누가 뭐래? 그보다 그 말, 아빠랑 오빠들한테 어디 한 번 그대로 해 봐. 볼 만할 것 같으니까.”
“윤리사, 너. 진짜 성격 나쁜 거 알지?”
“당연히 알지!”
나는 활짝 웃었고 저세상은 얼굴을 구겼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이좋게 집에 도착했고.
“리사, 세상아. 왔어?”
윤리오의 보충 학습이 시작됐다.
빌어먹을.
***
“후우, 피곤해.”
저세상이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윤리오와의 보충 학습이 끝나자마자 저녁을 먹고 그와 체력 훈련을 하러 나갔다.
“고작 몇 분 뛰었다고 이렇게 피곤하다니.”
몇 분이 아니라 몇 시간이었다.
저세상은 윤리오와 함께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뛰었었다.
각성자라고 해도 충분히 힘든 훈련이었지만 저세상은 지친 기색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고 뛸 뿐이었다.
“뭐, 리오 형이랑 하는 훈련도 곧 끝이겠지만.”
저세상이 허공을 빤히 쳐다봤다.
【봉인이 풀리기까지 앞으로 ‘43일’ 남았습니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 말은 곧…….
‘게이트.’
이 세상에 혼란이 들이닥치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는 말.
저세상이 두 눈을 꼭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윤사해한테 말하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 게이트가 터질 거라고.
그 때문에 무지막지한 피해가 일어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세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지난 세계에서의 일을 봉인이 풀리기 전까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이 세계로 건너오는 조건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아빠, 왔어?”
“리사.”
윤사해가 집에 돌아왔다.
저세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오늘 힘들었지?”
“우리 딸 얼굴 보니 피로가 싹 풀리는구나.”
부녀의 다정한 대화에 그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보다 리사, 미안하단다. 우신우라고 했지? 그 친구와 관련해서 로저 신부에게 접근을 시도해 봤다만…….”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저세상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로저 에스테라에게 접근하는 것이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가 우신우를 감금하고 있다는 근거를 찾지 못했거나.
‘윤리사가 암만 스킬을 사용해서 봤다고 해도.’
윤리사만 본 광경이지 않은가?
로저 에스테라는 장천의가 사라진 지금,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자였다.
기부 등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도 똑같이 그러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윤리사, 오늘 또 밤잠 설치겠네.”
저세상이 한숨을 푹 쉴 때였다.
【봉인의 일부가 일시적으로 해제됐습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스템 창에 저세상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