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겨울 준비(4)
경찰을 막아선 저세상이 두 눈을 낮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비나리 고등학교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각성자들이 모이는 거 알고 있죠?”
경찰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저세상이 그런 그를 향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아직 힘을 다루는 데 많이 미숙하거든요. 그런데 아저씨가 저희를 갑자기 붙잡으려고 들거나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성큼, 그에게 다가선 저세상이 두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의 사지 중 하나가 무사하지 못하겠죠? 저희 모두 전투에 최적화된 힘을 가지고 있는 각성자라서요.”
저세상이 그렇게 말하고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렇지, 윤리사?”
“응? 으응, 뭐 그렇지.”
나는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하며 애매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재수없는 경찰 아저씨한테 엿을 먹였다.
세상에 저런 경찰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속으로 그를 한껏 욕하며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참고로 이 일은 아빠한테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 줄 생각이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나는 방긋 웃어 주고는 저세상과 우신우와 함께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자, 잠깐! 얘들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던 경찰이 뒤늦게 우리를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길을 돌아나왔다.
그렇게 경찰서와 멀어지자마자 나는 저세상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저세상, 나이스! 설마 네가 그렇게 나올 줄이야! 각성자도 아니면서 위협 잘 하더라?”
“누구한테 보고 배운 게 있어서.”
“그 ‘누구’가 나는 아니겠지?”
저세상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저세상이 가리킨 사람이 내가 맞는 모양이다.
“세상이 오빠, 내가 언제 협박같은 걸 했다고 그래?”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잖아.”
“그래? 이번에 처음 듣는데? 그치, 우신우?”
“으응? 어, 응…….”
우신우가 애매하게 대답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세상이 형.”
나도 저세상도 제자리에 멈춰섰다.
우신우가 저세상을 ‘형’이라고 부르다니!
‘저세상이 우신우보고 형이라고 부르라고는 했지만!’
설마 진짜 부를 줄은 몰랐다.
저세상도 우신우가 정말 그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우신우는 귓불을 빨갛게 붉힌 채 입술을 우물거렸다.
“대신 나서 줘서 정말 고마워. 세상이 형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경찰서를 나왔을 거야. 아! 윤리사, 너도 정말 고마워.”
“이것 가지고 뭘? 가장 중요한 우성운은 찾지도 못했잖아.”
“실종 신고도 못했고 말이지.”
저세상이 내 말을 뒤이어 입술을 씰룩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찾아 봐야지. 네가 그랬잖아? 우성운 찾자고.”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나는 뺨을 긁적인 후 물었다.
“신우야, 혹시 성운이가 갈 만한 곳 없어?”
“글쎄.”
우신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에게 저세상이 조언했다.
“잘 생각해 봐. 초등학생 때 이사 간 집이나, 그런 곳에 내려갔을 수도 있잖아.”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우신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인데 그런 곳을 왜 가? 무영 마을이라면 몰라도.”
“그래! 무영 마을!”
나는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거기 한번 가 보자!”
“야, 윤리사. 무영 마을은 지난번 대규모 화재 사건으로 출입 금지된 곳이잖아.”
“그러니까 가 보자고!”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불타 버린 마을!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인 장소잖아?”
그만큼 위험도 도사리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 가 보자.”
“우신우! 말리지는 못할망정 지금 윤리사 말에 동의하는 거야?”
저세상이 버럭 소리 질렀다. 우신우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리 생각해도 우성운, 그 자식이 갈 만한 곳은 그 마을밖에 없거든.”
그 말에 나는 저세상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 이렇게 정해졌네.”
“정해지기는 뭐가 정해져?!”
“불만이면 세상이 오빠는 그럼 여기 남아. 나랑 신우하고만 다녀올게.”
“그걸 말이라고 해?”
“응.”
그럼, 뭐라고 생각했담?
나는 저세상을 보며 싱긋 웃어 주고는 입을 열었다.
“가자, 신우야.”
그렇게 우신우의 손목을 잡는데.
“가기는 어디를 간다고 그러세요, 리사 아가씨?”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사, 사야 언니?”
사야렷다!
언제봐도 꽃 같은 외모를 지닌 사야가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황급히 정신을 챙겼다.
“어, 언니가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쌍둥이는 어쩌고요?”
“아이들은 아버지께 맡기고 왔답니다. 그보다 리사 아가씨, 세상 도련님. 두 분께서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요?”
사야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분명, 학교에 있을 시간으로 아는데 말이죠?”
“아, 하하! 그, 그게 말이죠!”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저세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는지 저세상이 외쳤다.
“잠시 선생님 심부름을 나왔어요!”
저기요, 저세상 씨!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흐음, 가방을 멘 채로 말이죠?”
사야가 던진 질문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세상이 뒤늦게 내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변명했다.
“그게, 선생님께서 심부름으로 시킨 물건이 꽤 커서요! 담아가려면 가방이 필요해서…….”
세상이 오빠, 그냥 변명하지 마. 오빠는 조용히 있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저세상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사야가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강호.”
제 마수의 이름을 불렀다.
-크르릉!
강호가 우리 뒤에 나타나서는 내 가방을 물어 뜯었다. 아니, 뜯은 것이 아니라 아예 지퍼를 내려 버렸다.
“야! 아, 안 돼!”
가방 안에는 허겁지겁 구겨 놓은 온갖 학용품과 교과서가 한가득 있단 말이야!
하지만 가방 지퍼는 이미 내려간 지 오래였고.
와르르-!
그 탓에 가방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그대로 쏟아지고 말았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가운데 사야가 적막을 깨웠다.
“선생님께서 시킨 물건이 크다고 했는데, 리사 아가씨의 가방이 꽉 차 있네요?”
웃는 낯으로 묻는 질문에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리사 아가씨, 세상 도련님. 그리고…….”
“우, 우신우에요.”
“네, 신우 군.”
사야가 다정하게 우리를 타일렀다.
“암만 놀기 좋아하는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이렇게 학교를 빼먹으면 안 되죠.”
그 말에 나는 황급히 사야에게 잘못을 빌었다.
“죄, 죄송해요. 부탁이니까 아빠한테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동시에 부탁도 했다.
“리오 형이랑 리타 형한테도요!”
나와 저세상의 간절한 목소리에 사야가 미소를 그렸다.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군요. 이미 리오 도련님과 리타 도련님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갔거든요. 물론, 길드장님께도요.”
진짜 망해 버렸군.
나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니까 사야가 여기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라는 거지?
‘뻔해. 나랑 저세상이 무단 조퇴한 게 윤사해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지. 망할!’
들어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암만 급해도 단아랑 도윤이에게 몸이 안 좋아서 양호실에 갔다고 선생님들께 말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였는데!
‘혹시 몰라 휴대폰도 꺼 놨는데.’
사야를 따라 돌아가면 얼마나 많은 잔소리가 쏟아질지 안 봐도 뻔했다.
그리고 외출 금지를 당하겠지.
‘그건 절대 안 돼!’
우성운의 실종 신고는 개뿔, 그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럼, 언니.”
“네, 리사 아가씨.”
“끌려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 말에 나는 꿀꺽 침을 삼킨 후.
“저희를 무영 마을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세요!”
냅다 손을 올려 사야의 뺨을 때려 버렸다.
찰싹!
사야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아니. 내 앞으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발동됩니다.】
【적용 대상은 ‘사야’입니다.】
예쓰!
언니, 정말 미안하지만 제가 지금 급해서요.
그렇게 속으로 열심히 사과하고 있는데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유, 윤리사! 너 지금……!”
“뺨 때렸어.”
“그러니까 왜 저 누나의 뺨을!”
“때려야 했으니까.”
그리고 신우야, 너도 한 대 맞았단다. 뭘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거야?
“리사 아가씨.”
“네? 네, 언니!”
“세상 도련님과 신우 군과 함께 무영 마을로 모셔다 드리면 될까요?”
나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네!”
원래 일은 저지르고 보는 게 최고였다.
어차피 돌아가면 엄청 혼이 날 게 뻔한데, 매도 먼저 맞기는 무슨! 최대한 늦게 맞는 게 최고지!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우성운이 무영 마을에 없으면?
‘찾기만 해 봐.’
한쪽이 퉁퉁 부을 정도로 뺨을 때릴 거다.
몇 번이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