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서리 내린 날(6)
한참을 말없이 우성운을 쳐다보던 윤사해가 말했다.
“하지만 로저 신부가 해독제를 투여하면서 너희 모두 괜찮아졌지. 너는 그래도 꽤 앓았다고 들었지만.”
자신의 아이들이 아픈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
윤사해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다정하게 목소리를 냈다.
“로저 신부의 꿍꿍이를 알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겠니?”
다정한 부탁이었으나 우성운은 알았다. 윤사해는 지금 부탁이 아닌, 제게 명령을 하고 있다는 것을.
포식자 앞에 선 사냥감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우성운을 벌벌 떨다가 말했다.
“모, 몰라요.”
“모른다고?”
“네, 저, 정말 몰라요.”
모른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우성운은 ‘레메게톤의 조각’이라는 성유물도 처음 들었고,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온 수박에 들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윤사해는 아이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우성운. 부모 때문에 꽤 곤란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지? 네 사촌과 함께.”
그 말에 우성운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시, 신우는 아무 잘못 없어요!”
“너 역시 아무 잘못 없지.”
잘못이 있는 건, 우성운의 부모였다. 어떻게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물을 수 있을까?
어쨌거나 윤사해는 말했다.
“우성운, 마지막 기회다.”
윤사해는 짙은 보랏빛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말했다.
“로저 에스테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해 보도록.”
“저, 저는, 그게.”
우성운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곧, 그는 질끈 눈을 감으며 외쳤다.
“몰라요! 정말 몰라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파들파들 떠는 것이 살려 달라 비는 꼴인 사냥감이나 다름없었다. 윤사해는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 보다 픽 웃었다.
“그래,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구나. 그럼, 이제 가 보렴.”
“네?”
“나가 보라고 했단다.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던 거 아니었니?”
“아…….”
우성운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가 윤사해를 향해 황급히 고개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그의 집을 벗어나려고 했다.
“잠깐.”
하지만 윤사해가 그를 붙잡았다.
우성운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어느새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쳐든 윤사해가 그를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 우리 리사와 세상이와 어울리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구나.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우성운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 때문에 눈칫밥 꽤나 먹었던 그였다.
‘윤리사랑 저세상과 거리를 두라는 거겠지.’
우성운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저씨. 오늘 감사했습니다.”
곧, 그는 최대한 조용히 윤사해의 집을 떠났다.
***
날이 밝은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우성운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급하게 우성운을 찾는 나에게 윤사해가 말했다.
‘성운이는 아침 일찍 돌아갔단다.’
그 말에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더란다.
‘망할 우성운!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니야!’
학교에 오면 한 대 때려 주겠다고 다짐하며 도착한 교실에서 가방을 푸는데.
“윤리사! 야! 윤리사!”
“우신우?”
우신우가 다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우성운 어디 갔어? 왜 안 보여?”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우성운 네 집으로 데리고 간다고!”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나는 목 언저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 말로는 아침 일찍 돌아갔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우성운은 안 돌아왔어!”
그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게 진짜야?”
“그래!”
우신우가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발을 쿵쿵 굴렀다.
“망할!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어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뒤늦게 사춘기라도 온 건가?”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내 물음에 우신우가 움찔거리고는 말을 얼버무렸다.
“네가 알 바는 아니야.”
“아니, 알아야겠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 우성운, 거리에서 울고 있었거든. 세상 다 잃은 얼굴로.”
그리고 그 얼굴은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성불하지 못한 것 같은 웬 아저씨.
어릴 적 만났던 서차윤이 나를 보던 눈빛과 똑 닮아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 차마 우성운을 외면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러니까 말해.”
단호하기 그지없는 내 목소리에 우신우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어젯밤, 갑자기 묻더라고. 우리는 가족 맞느냐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우신우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촌이기는 하지만 우린 가족이 맞는다고 했지. 그런데 막 우는 것 같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어.”
우신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로저 신부님한테 우성운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냐고 물어도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니…….”
“우성운이 로저 신부님이랑 따로 만났었어?”
“응.”
우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로저 신부님이랑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이 안 가 미치겠다면서 우성운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신우야? 이제 조례 시간이란다. 어서 네 반으로 돌아가렴.”
새로 우리 반의 담임이 된 지도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설윤아가 반에 들어왔다.
“네? 네!”
우신우가 당황한 얼굴로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내게 속삭였다.
“우성운 오면 말해 줘.”
“응, 알겠어.”
나는 그에게 반으로 잘 돌아가라며 눈인사를 보냈다.
어쨌거나 설윤아가 반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우성운?”
그녀의 목소리는 우성운의 이름 앞에서 멈췄다.
“성운이 안 왔니?”
“네, 아직 안 왔어요.”
“그래?”
설윤아가 “흐음”하고 콧소리를 내고는 입을 열었다.
“반장?”
“네, 선생님.”
“성운이 오면 내가 부른다고 해줄래? 부탁할게.”
“네.”
“자, 그럼 오늘 하루도 힘차게 시작해 보자. 알겠지?”
“네, 선생님!”
반 친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나는 우성운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창가와 가까운 그의 자리에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다.
아니, 그의 자리에 서리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창문에 낀 것에 진 그림자가 그 위로 드리워진 것뿐.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설윤아가 나를 불렀다.
“리사?”
“네? 네!”
“요즘 선생님들 사이에서 우리 리사가 수업 시간에 한 눈을 많이 판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리던데…….”
설윤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리사도 오늘 하루 힘차게 시작해 보자, 알겠지?”
“네에.”
나는 마지못해 대답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언제 수업 시간에 집중을 안 했다고!’
어느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걸리기만 해 봐! 아주 그냥, 막 그냥.
‘뭘 할 수가 없지.’
뜬금없이 그런 말이 생각났다.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란 말이 말이다.
‘에휴, 내 팔자야.’
어쨌거나 설윤아는 조례를 끝낸 후 교실을 나갔다.
나는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머리 위로 단아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임 선생님, 마음에 안 들어.”
“응?”
“수업에 집중 안 하는 건 난데, 왜 네가 혼나?!”
“…….”
순간 할 말을 잃어 단아를 빤히 쳐다봤다. 단아는 정말 화가 난 모양인지 씩씩거렸다.
문제는, 도윤이도 단아와 똑같은 얼굴로 말했다는 거다.
“맞아! 수업에 집중 안 하는 건 리사가 아니라 단아인데!”
“뭐라고?! 야! 백도윤! 지금 나 놀려?! 이 망할 자식이!”
단아가 도윤이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악! 아야! 아니, 단아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사실을 말해도 얻어맞는 도윤이었다. 단아의 폭력은 1교시 수학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온 후에야 끝났다.
어쨌거나 우성운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조례가 끝난 후에도, 점심이 끝난 후에도.
그리고.
“자, 수업 끝! 설윤아 선생님께서는 일이 있어 오늘 종례 못한다고 하니 알아서들 가도록! 알겠지?”
“네에!”
학교가 끝난 후에도 우성운은 등교하지 않았다.
모든 수업이 끝났다는 것에 아이들이 화기애애하게 가방을 매며 교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우성운의 빈자리를 말없이 쳐다봤다.
“윤리사, 가자.”
“응? 으응.”
단아가 내 팔짱을 낄 때까지, 나는 그의 자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성운의 책상 위에 졌던 그림자는 한층 길어져 그의 자리를 모두 삼키고 있었다.
창가에 맺혀 있던 이슬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교실을 나온 후 알 수 있었다.
“후우, 춥다.”
“그러게.”
겨울에 한 발자국 다가섰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