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서리 내린 날(5)
“그래서 우성운을 집까지 데리고 온 거란 말이야?”
먼저 집에 와 있던 저세상이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거리에서 쓰러졌던 우성운을 집으로 데리고 온 길이었다.
윤리오와 윤리타와 함께 말이다.
암만 두 사람이라도 열이 올라 쓰러진 아이를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지만.
“로저 신부한테 데려다 줬으면 됐잖아. 아니면 병원 앞에 버려 놓고 와도 됐고.”
문제는 저세상이었다.
나는 저세상의 말에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야, 저세상! 너는 애가 왜 그렇게 못됐냐?! 아픈 애를 병원 앞에 그냥 버려두라고?”
내 말에 저세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정 마음이 쓰였으면 병원에 로저 신부 쪽으로 연락해 달라고 하고 버려두고 나왔으면 됐잖아.”
심드렁한 목소리에 나는 저세상의 발을 콱 밟아 버렸다.
“악! 내 발!”
저세상이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혔다. 나는 그대로 그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아윽! 야, 윤리사!”
“뭐!”
저세상이 당장에라도 나한테 달려들 듯이 굴었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우성운이 로저 신부님한테는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다고 우성운, 저자식을 우리 집에……!”
목소리를 높이던 저세상이 돌연 움찔거리더니 황급히 말했다.
“어쨌든, 지금에라도 로저 신부한테 연락해!”
“로저 신부님 번호 몰라.”
“내가 알아.”
뭐야, 저세상. 네가 그 신부님 번호를 어떻게 알아?
당황하여 두 눈을 끔뻑이는데 저세상이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에 나도 모르게 그의 휴대폰을 바닥에 내쳐버리고 말았다.
“무슨 짓이야?”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헤실거리며 웃고는 말했다.
“오늘 하루만 재워 주자.”
“로저 신부가 걱정할 텐데?”
“우성운이 그걸 몰라서 나한테 로저 신부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했겠어? 분명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리고 너도 전에 봤잖아.”
“언제?”
“여름 때!”
여름 방학 때, 저세상도 나도 똑똑히 봤었다.
우성운과 우신우의 살갗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들을 말이다.
“우성운, 오늘 하루만 우리가 돌봐 주자.”
내 말에 저세상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우신우도 걱정하고 있을 거야.”
“신우한테는 지금 내가 연락할게. 그러면 됐지?”
“아저씨한테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알아서 잘 설명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셔요.”
나참, 저세상 이 자식은 왜 이렇게 걱정이 많은 거람?
어쨌든 간에 나는 우신우한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우성운을 찾고 있느라 정신이 없는 건지, 아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우성운을 오늘 하룻밤만 우리 집에서 재우겠다는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 놓았다.
‘좋아, 다음은 윤사해.’
가장 큰 복병에게 이제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
“후우.”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리사, 아버지한테는 전화하지 않아도 돼.”
“리오 오빠?”
우성운을 빈 방에 눕히고 나온 윤리오와 윤리타가 내 걱정을 덜어 줬다.
“아빠한테는 우리가 설명해 놨어. 괜찮대.”
“정말? 다행이다!”
설마 윤사해가 흔쾌히 허락해 줄 줄 몰랐다.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윤사해는 『각성, 그 후』에서 로저 에스테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와 사이가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 딱 한 명 있었다.’
나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인 저세상을 쳐다봤다.
“뭘 봐?”
“그냥, 우리 세상이 오빠는 왜 이렇게 못생겼나 싶어서.”
“너는 꼭 놀릴 때 ‘오빠’ 소리 하더라?”
“원하면 매일매일 ‘오빠’라고 불러 줄게.”
“싫어, 징그러.”
이 자식이?
저세상을 향해 다리를 들려고 할 때, 윤리타가 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윤리사, 세상이 괴롭히지 말고 여기 앉아 봐.”
지은 죄는 없지만, 나는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꾹 닫고는 윤리타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앉자마자 그로부터 질문이 날아들었다.
“우성운이랑 무슨 사이야?”
“응?”
“무슨 사이냐고.”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냥… 친구인데……?”
“그냥 친구인데 그렇게 안겨 있었단 말이야?!”
윤리타의 성난 목소리에 저세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쳐다봤다.
마치, 저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나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억울해!
“리타 오빠! 우성운이랑은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그냥 친구일 뿐이라고!”
“그냥 친구인데 왜 그렇게 애틋해 보였던 걸까? 응? 리사.”
윤리사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그의 웃음이 굉장히 소름 끼쳤다.
‘저세상이 『각성, 그 후』에서 만났던 윤리오가 딱 저런 느낌 이었겠구나!’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애틋해 보였다니! 리오 오빠, 눈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혜원이 누나 불러 봐.”
“하지만, 리사.”
“나는 진짜 우성운이랑 아무 사이 아니란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말이다.
내 말에 윤리오와 윤리타의 두 눈이 빠질 듯이 동그래졌다.
“좋아하는 사람?”
“그게 누구인데?”
윤리오와 윤리타가 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는 물었다.
“나랑 윤리타가 아는 새끼야?”
“윤리오, 애들 앞에서 욕하지 마.”
“지금 그게 중요해?! 우리 리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잖아! 리사! 어떤 새끼야! 당장 말해!”
말하면 그 사람의 목을 자를 기세였다.
‘어쩌지?’
그냥 내뱉은 소리였는데 아무래도 망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다.
나는 저세상을 쳐다봤다. 내 시선에 저세상이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얼굴로, 그러지 말라는 듯이 다급하게 말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단다.
그렇게 저세상의 이름 석 자를 말하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이 몸이 음료수와 술과 간식거리와 함께 등장하셨다! 다들 반기도록! 너희, 나만 빼고 고기 먹었겠다?! 나랑도 놀아 줘!”
청해진의 등장이었다. 그 탓에 나는 황급히 이름을 바꿨다.
“해진이 오빠!”
“응?”
웃는 낯으로 들어오던 청해진이 갑작스럽게 불린 자신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빼액 소리 질렀다.
“나는 해진이 오빠 좋아해!”
투두둑.
청해진의 양 손에 가득 들려 있던 검은 봉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입 역시 바닥에 닿을 듯이 쩌억 벌어져 있었다.
“청해진.”
“이 망할 새끼야.”
윤리오한테 우리 앞에서 욕하지 말라 했던 윤리타가 두 눈에 살기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 진정해 봐. 나는 리사가 나한테 그런 마음을 품고 이, 있을 줄 몰랐어! 응?!”
그렇겠지, 나도 조금 전에 깨달은 내 마음…… 은 개뿔.
미안해, 해진이 오빠. 지금 상황을 타파하려면 오빠의 희생이 필요해.
“청해진, 이 도둑놈 새끼야!”
“죽어! 나가 죽어!”
윤리오와 윤리타가 무기를 들고는 청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악! 잠깐만! 리사야, 해명 좀! 해명 좀 해 봐! 너 아니지?! 네가 왜 나 같은 걸 좋아해!”
청해진이 쌍둥이를 피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집 안에서, 저세상이 나한테 다가왔다.
“윤리사, 너 나중에 해진이 형한테 꼭 사과해.”
“응, 안 그래도 그럴 거야.”
나는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청해진의 비명에 안타까운 눈을 보였다.
미안해, 해진이 오빠.
내 마음 알지?
***
어쨌든 간에 사건은 가까스로 일단락됐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정말 청해진을 죽일 듯이 구는 순간에 윤사해가 집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윤리사는 말했다.
청해진에게 마음을 품었던 건 어릴 적뿐이며, 지금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청해진을 제외하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진 후 자리를 파했다.
그렇게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우성운은 힘겹게 눈을 뜬 후, 몸을 일으켜 방을 나왔다.
그는 잠시 놀란 눈으로 으리으리한 저택을 둘러보고는 결연하게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어디 가니?”
“……!”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그의 다리가 굳고 말았다.
탁,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윤사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저 에스테라, 그 녀석한테는 알리지 말라 했단 소리를 들었단다. 맞니?”
윤사해가 소리도 없이 우성운에게 다가왔다. 우성운이 귀신같이 움직인 그의 모습에 겁에 질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 맞아요…….”
“이유는?”
“그, 그게.”
우성운이 파들파들 떨며 윤사해의 눈치를 살폈다. 윤사해는 고개를 기울었다가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하지만.”
윤사해가 우성운에게 푸른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보여 줬다.
“이게 뭔지 아니?”
우성운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너와 세상이, 그리고 네 사촌.”
우성운이 움찔 몸을 떨었다.
“여름 방학 때 함께 아팠던 것 기억하지? 한태극 의원의 손주 녀석과 다른 놈 한 명이랑도 같이 아팠었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나는 일이었다.
우성운이 입술을 달싹였다.
“네, 기억해요…….”
그 말에 윤사해가 말했다.
“이건, 너희를 아프게 만들었던 거란다.”
“이, 이게 뭔데요?”
“레메게톤의 조각을 액체화 시킨 것.”
“네?”
놀라 묻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해서 성유물이란다. 성유물이 뭔지는 알지?”
“네, 알아요…….”
성유물.
그것은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이 세상에 남긴 그들의 유산이었다.
우물쭈물 대답한 목소리에 윤사해가 말했다.
“너희가 먹은 것에 이게 섞여 있던 모양이더구나. 그래서 그렇게 아팠던 거고.”
우성운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가지고 온 수박은 로저 에스테라가 준 것이었다. 그런 과일에 성유물이 섞여 있었다니?!
윤사해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