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서리 내린 날(4)
우성운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황급히 말을 쏟아냈다.
“시, 신부님. 아니에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성운 군.”
로저 에스테라가 우성운의 어깨를 감싸며 싱긋 웃었다.
“신우 군한테도 똑같은 선택지를 줬답니다. 그리고 신우 군은 망설임 없이 이 칼을 받아 들었죠.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테니까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신우가 그럴 리가 없어요!”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칼이 날선 소리를 냈다. 그 날카로운 소음에 로저 에스테라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우성운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성운 군.”
우성운이 흠칫 몸을 떨었다.
로저 에스테라는 그에게 나긋하게 속삭였다.
“제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주제를 알라고요.”
우성운이 꿀꺽, 침을 삼켰다.
로저 에스테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성운 군을 밑바닥 인생에서 끌어올려 준 사람이 누구이지요?”
“로, 로저 신부님이요.”
“그리고 집을 잃었을 때, 아니. 온 마을이 불에 타 버렸을 때 갈 곳 없는 당신을 거둬 준 사람이 또한 누구지요?”
“로저 신부님이요…….”
“그렇습니다, 저지요.”
로저 에스테라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다시 우성운의 손에 쥐어줬다. 우성운은 당장에라도 칼을 떨어트릴 듯 벌벌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렇지만, 저는 못해요.”
우신우는 자신에게 남은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사촌이라고 해도 같은 고통을 겪고, 함께 자란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란 말씀.
그런 그를 죽이라니?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시, 신부님, 차라리 고해성사를 할게요.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를 차라리 제가 고하게 해 주세요. 채찍이라면 얼마든지 맞을게요. 하지만, 그렇지만. 안 돼요. 저는 신우 못 죽여요.”
“성운 군,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는 겁니까? 그런 거리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성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무섭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제 형제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형제가 로저 에스테라로부터 칼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곧, 우성운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로저 에스테라가 그것을 다정하게 닦아 주며 말했다.
“그저 주어진 선택지를 고르는 것뿐입니다. 믿었던 형제에게 배신을 당해 죽거나, 아님. 형제의 거짓된 믿음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하거나.”
우성운이 히끅거렸다.
로저 에스테라는 그의 어깨를 단단하게 잡고는 말했다.
“성운 군, 첫 눈이 내리기 전에 선택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신우 군도 그리고 당신도 죽게 될 테니까요. 알겠습니까?”
우성운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금방에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로저 에스테라를 쳐다볼 뿐이었다.
로저 에스테라, 그는 우성운이 처한 상황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슬프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형제를 죽이는 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역시 당신을 언제 죽일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테니까요.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로저 에스테라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방을 나가 버렸다. 우성운은 제 손에 쥐어진 칼을 보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아아…….”
왜 자신들에게, 아니.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어릴 적에 윤리사를 괴롭혀서? 아님, 우신우가 저세상을 놀리던 걸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해서?
하지만 어린 날의 일로 이렇게까지 고통 받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우성운이 흐느낌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우성운, 여기 있어?”
우신우가 찾아왔다.
우성운이 다급하게 눈물을 닦는 순간, 문이 열렸다.
“시, 신우야.”
“뭐야, 너 울어?”
“어? 아, 아니. 안 울어.”
우성운이 황급히 칼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우신우가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보다 로저 신부님이랑 무슨 이야기 나눴어? 신부님이 왜 너와 따로 보자고 한 거래?”
우성운이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신우야, 너도 알지 않아? 내가 로저 신부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너도 알 거 아니야?
‘그리고…….’
우신우는 로저 에스테라가 넘긴 칼을 받아 들었다고 했다.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선택지를,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고.
‘아니, 그랬다고 했나?’
순간 헷갈렸지만 어쨌거나 우성운은 목구멍 너머에서 맴도는 말들을 꾹 삼키고는 애써 웃었다.
“별일 아니었어.”
“그래? 그럼 어서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곧 있으면 배식 시간 끝나.”
“으응.”
우성운이 훌쩍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물었다.
“신우야.”
“응?”
“우리는 가족이지?”
“그럼, 세상에서 단 둘밖에 남지 않는 가족이자 형제지. 비록 사촌 지간이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그, 그치?”
“응.”
우신우의 대답에 후두둑, 우성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성운은 눈물을 감추고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지냈던 우신우는 귀신같이 우성운이 우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야, 너 울어?”
“아니, 안 울어.”
“거짓말! 우는 것 같은데? 어디 나 좀 봐.”
“우는 거 아니라니까?!”
우성운이 빼액 소리 지르고는 입을 열었다.
“나, 나 오늘 별로 배도 안 고프고, 생각할 게 있어서 먼저 방으로 가 볼게. 미안해.”
“성운아? 야! 우성운!”
우신우가 다급히 그를 불렀지만, 우성운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방으로 가지 않았다.
시설을 나가, 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흑, 으흡.”
우성운은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님이 서로를 죽였을 때, 그때 자신도 죽는 게 옳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괴로워…….”
또한, 미웠다.
“이 세상이, 사람이, 사람들이, 너무 싫어! 밉다고!”
거리를 내달리던 우성운이 멈춰 서서는 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쿠르릉, 하늘이 울렸다.
이윽고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성운은 골목 한쪽에 쭈구려 앉고선 엉엉 울었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우성운을 보고는 흠칫, 놀라 걸음을 서둘렀다.
그에게 우산을 내밀며 괜찮느냐고 묻는 사람 따위 없었다.
아니.
“야, 우성운. 괜찮아?”
딱 한 사람이 있기는 했다.
“윤리사……?”
우성운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내리던 빗방울이 노란 우산에 가로 막혔다. 우성운은 자신을 향해 우산을 기울인 윤리사를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는.
“윤리사!”
“우왁!”
그는 윤리사가 자신의 구원자라도 된 것처럼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
“우, 우성운?”
저기요? 지금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죠?
나는 당황하여 두 눈을 데굴 굴렀다. 이성은 지금 당장 우성운을 떼어 놓으라고 하고 있는데.
“야, 괜찮아?”
몸이 그러지를 않았다.
우성운의 위로 누군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우성운을 토닥였다.
“윤리사, 리사야…….”
우성운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성운, 일단 진정 좀 하고.”
자리를 좀 피하자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리사?”
“윤리사?”
사실 나는 도윤이네와 함께 정답게 저녁을 먹고 간식거리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윤리오와 윤리타와 함께 말이지.
윤리타가 내 품에 안겨 있는 백도윤을 날선 시선으로 보며 물었다.
“아이스크림 들고 신나게 가더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맞아, 리사. 뭐하고 있는 거야?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윤리오가 내 품에 꼭 안겨 파르르 떨고 있는 우성운의 위아래를 훑고는 살기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리사가 지금 웬 사내새끼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오빠. 내가 안겨 있는 게 아니라 얘가 안겨 있는 거야.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나는 황급히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변명했다.
내가 왜 이 상황을 두 사람에게 변명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둘이 살인을 저지르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오빠! 그게 말이지! 얘는 내 친구인데!”
“알아.”
윤리오가 내 말을 끊고는 차갑게 식은 목소리를 냈다.
“우성운, 맞지?”
“맞네, 맞아. 어릴 적에 우리 리사 괴롭힌 녀석 맞네.”
윤리오의 말을 뒤이어 윤리타가 스산하게 말했다. 우성운이 흠칫 몸을 움츠리며 파들파들 떨었다.
나는 황급히 그를 내 뒤로 숨기고는 말했다.
“맞기는 한데! 우리 이제 친구야, 친구! 저세상한테도 물어봐! 친하게 지낸지 오래 됐다구!”
“정말?”
“응!”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에 윤리오가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 리사. 네 말대로 친한 친구라고 해. 그런데 왜 그 친한 친구한테 안겨 있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안겨 있던 게 아니라, 얘가 갑자기 안긴 거라고!
하지만 윤리오의 말을 그렇게 정정해 줬다가는.
‘우성운이 죽겠지.’
말 그대로 윤리오가 우성운을 죽이려 들 게 뻔했다.
‘어떻게 말해야 이 상황을 잘 넘겼다고 나를 칭찬할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철퍽,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지척에서 말이다.
그리고 쓰러진 사람은 바로.
“서, 성운아?! 야! 우성운!”
우성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