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서리 내린 날(3)
어쨌거나 에일린 리와의 통화가 마무리 됐다. 그녀한테서 휴대폰을 돌려받은 듯, 윤리오가 쩔쩔매며 사과했다.
-아버지, 죄송해요. 어머니가 자기 전화는 계속 안 받는다고 제 휴대폰을 빌려 달라고 해서요. 설마 어머니도 OACD에 참석하실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 미국 대표로 참석한다고 하더니, 소문이 맞았던 모양이구나. 참석 명단에도 이름이 없어서 헛소문인 줄 알았더니.”
윤사해가 쯧, 가볍게 혀를 차고는 아들에게 물었다.
“린이 다른 짓은 하지 않았고?”
-네? 네,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았어요. 그냥, 이매망량에서 힘들거나 좀 귀찮은 일은 남에게 떠넘기라고만 하셨어요.
그에 윤사해가 이를 으득 갈았다.
‘에일린 리, 그 빌어먹을 여자가 애한테 이상한 말을 하고 있어!’
윤사해가 짜증 나 죽겠다는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린 후 말했다.
“어쨌든, 네 엄마 상대한다고 수고 많았다. 회의는 다 끝났니?”
-네, 다 끝났어요.
“그럼, 태운에게 말해 이만 철수하라고 하려무나.”
-네, 길드장님.
‘아버지’로 시작됐던 호칭이 ‘길드장님’으로 바뀌었다.
윤사해는 이매망량의 일원답게 공과 사를 구분하는 아들의 모습에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어쨌든 간에 이매망량의 주요 임무는 끝났다.
‘나도 오랜만에 쉬어 볼까?’
요새 랑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윤사해였다.
딸아이와 자식이나 다름없는 저세상도 이매망량에 있겠다, 길드원들이 돌아오자마자 일찍 퇴근하려던 윤사해는.
[백시준 : 사해야 뭐해:)?]
날아든 메시지에 얼굴을 구겼다.
윤사해는 날아든 메시지를 무시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아빠! 아빠아!”
벌컥, 집무실의 문이 열어젖히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명랑하게 말했다.
“도윤이가 다 같이 외식하재!”
듣기 싫은 이름이 딸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윤사해가 책상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윤리사는 그것도 모르고 재잘거리며 웃었다.
“제인 선생님 애기도 데리고 온다고 했어! 그리고 소고기 사 준대!”
유독 고기, 특히 소고기에 약한 딸아이였다.
그리고 그건.
“야, 윤리사. 고기는 언제든 먹을 수 있잖아.”
“하지만 1++ 한우는 언제든지 먹을 수 없는 거잖아.”
“그건 그렇네.”
저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세상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딸아이는 자신의 어깨에 매달리며 졸랐다.
“아빠아! 나 고기 먹고 싶어! 도윤이네 아기도 보고 싶어! 그리고 오빠들도 오늘 힘든 임무 뛰었잖아! 단백질 보충시켜 줘야지!”
윤사해는 뒷말에 두 눈을 번뜩였다. 그래, 자신의 아들들은 오늘 별 볼 일 없는 VIP라는 것들의 뒤를 봐주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분명 그랬을 거다.
그러니까.
“그래, 리사.”
윤사해가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도윤이네와 함께 외식을 가지자꾸나.”
꼭 백시준의 지갑을 거덜내겠다고 다짐하며, 윤사해는 그리 대답했다.
윤리사는 윤사해의 대답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빠, 고마워! 아빠, 최고!”
딸아이가 최고라면서 뽀뽀를 해 줬는데 이보다 행복할 수가 있을까!
윤사해는 온몸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에 헤실거렸다.
서차웅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상사가 보이는 얼굴이 불경스럽게도 바보 같이 보여서 말이다.
***
앗싸, 고기! 그리고 세상을 이끌어 나갈 미래의 인재!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싹!
나는 소고기, 아니. 도윤이의 조카를 볼 생각에 싱글벙글 웃으며 가장 앞서 고깃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OACE VIP들의 경호를 하느라 정장을 쫙 빼입은 윤리오와 윤리타가 서 있었다.
“우와!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나랑 저세상 등교할 때까지만 해도 까치집을 짓고 있더니! 언제 쫙 빼입었대? 오빠들 아닌 것 같아!”
“윤리사, 그거 칭찬이지?”
윤리타가 짓궂게 물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칭찬이지!”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리오 오빠나 리타 오빠나 이매망량의 길드원이 아니라 연예계 쪽으로 나갔으면 어땠을까, 란 생각을 해.”
“절대로 안 될 소리.”
그렇게 말한 사람은 윤사해였다.
“연예계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데. 이 아빠는 절대로 용납할 수도, 그리고 응원할 수도 없단다.”
“아빠, 꼭 연예계에 한 번 진출했던 것처럼 들린다?”
“오, 어떻게 알았니, 리사?”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준이 삼촌!”
“안녕, 리사. 그리고 리오랑 리타, 세상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세 명의 남정네들이 우렁차게 인사했다. 백시준은 누구와는 다르게 인사성도 참 밝다면서 내게 재미있는 사실을 말해 줬다.
“너희 아빠, 고등학생 때 잡지 모델로 활동한 적 있거든. 그때 연예계 쪽에서 러브콜이 엄청 쏟아졌었는데, 못 볼 꼴을 꽤 많이 본 모양이더라고.”
“정말요?”
“그래, 정말이야.”
나를 비롯해 윤씨네 남정네들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뿐.
“백시준,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윤사해뿐이었다.
윤사해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백시준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말해 준 거야. 이매망량의 어엿한 길드장님께 재미난 과거가 있다는 걸 말이지.”
“하여튼 짜증 나는 놈.”
“칭찬 고마워, 사해야. 그보다 들어갈까?”
“삼촌, 도윤이는요? 그리고 제인 선생님하고 아기는요?”
“도윤이도 그리고 제인 씨도 모두 안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백시준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에 윤사해는 뾰족하게 백시준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 왜 굳이 밖에 나와 있던 거야?”
“밖에 나와 있던 게 아니라 나도 방금 막 도착한 거야. 오늘 너희도 엄청 바빴잖아?”
백시준이 윤리오와 윤리타와 마찬가지로 정장을 쫙 빼입은 상태로 싱긋 웃었다.
윤사해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참을 그를 노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들어갈까? 리오, 리타. 오늘 수고 많았어.”
“네?”
“VIP들 경호 서는 거 멀리서 잠깐 봤었거든. 지금 당장 장가가도 될 만큼 아주 멋지던데?”
그 말에 윤사해가 뾰족하게 두 눈을 떴다.
“장가 소리가 왜 나와? 요즘 애들 결혼 늦게 해.”
“그냥 말해 본 소리야. 사해야,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내가 언제 예민하게 굴었다고! 어서 방이나 안내해!”
“네네, 그럴게요.”
암만 생각해도 백시준은 우리 아빠를 놀리기 위해 만나는 것 같다. 착각이겠지?
하지만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윤사해가 놀리는 재미가 있기는 하지.’
하지만!
“응? 리사? 왜 그러니?”
나는 백시준의 옷자락을 잡아끌어 그가 고개를 숙이게 하고는 속닥거렸다.
“시준이 삼촌, 우리 아빠는 나만 괴롭힐 수 있어요.”
백시준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삼촌이 적당히 괴롭힐게. 그보다 우리 리사도 많이 컸네? 당장 시집 가도.”
“백시준, 그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다물어.”
“넵.”
백시준이 입을 다물었다. 참 사이좋은 친구 사이였다. 나이를 아주 조금 허투루 먹은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도윤이의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룸에 도착했다.
“도윤아!”
“리사야! 세상이 형!”
도윤이가 나와 저세상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를 백시진이 엄하게 혼냈다.
“백도윤, 그렇게 큰소리 내면 소라 운다고 했지?”
“헉, 맞다!”
도윤이가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는 우리에게 다가와 소곤거렸다. 제인 아일리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아기를 가리키면서 말이다.
“리사야, 세상이 형. 쟤가 바로 내 조카야. 이름은 백소라. 여자아이야. 엄청 귀엽지?”
도윤이의 말대로 엄청 귀여웠다.
류사하와 류홍랑, 두 꼬맹이는 하루가 다르게 훌쩍 자라서 갓난아기 시절의 모습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도윤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인 아일리에게 말했다.
“응! 선생님, 축하드려요! 첫째 딸은 무조건 아빠 닮는다는데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쿨럭……!”
제인 아일리의 옆에서 목을 축이고 있던 백시진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백시준은 유쾌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리사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도 우리 소라 보고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몰라.”
“형!”
“삼촌, 쉿! 그러다 소라 깨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도윤이가 백시진과 똑같이 말하며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제인 아일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소라가 저를 좀 많이 닮기는 했죠? 그보다 리사, 공부 잘하고 있니? 세상이도?”
“넵.”
나와 저세상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 두 사람 모두 공부는 놔 버린 지 오래였다.
완전히 놓은 건 아니고, 좋아하는 과목만 집중적으로 파기로 했다.
어차피 대학에 진학할 것도 아니고, 유급하지 않을 정도로 성적을 내면 되니까!
“리사, 새로 오신 담임 선생님은 어떤가요? 잘해 주나요?”
“새로 오신 담임 선생님이라면 설윤아 선생님이요?”
“네. 고심 끝에 고른 분인데, 리사랑 우리 도윤이 그리고 다른 친구들한테 잘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너무 미안하니까요.”
“누나! 설윤아 선생님은 엄청 잘해 주신다니까요?!”
“백도윤,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백시진의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것 같아 나는 황급히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설윤아 선생님께서는 엄청 잘해 주고 계셔요. 대신.”
“대신?”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수업이 조금 따라가기 벅차다고 할까요? 그치, 도윤아?”
“응? 나는 괜찮은데?”
도윤아! 여기서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그때였다.
“저도 설윤아 선생님 수업 따라가기 조금 벅차요.”
나이스, 저세상!
속으로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데 제인 아일리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리사랑 세상이. 리오와 리타처럼 영어에 약한 모양이네요.”
그녀의 말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움찔거렸고, 윤사해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 혹시 쉬는 동안 애들 영어 공부 좀 봐줄 수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윤사해 길드장님. 집사람 몸이 아직 충분히 회복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애가 이제 막 태어난 지 한 달을 넘은 참이라서요.”
백시진의 단호한 목소리에 윤사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우리 길드원들도 사내 연애 끝에 쌍둥이를 낳았는데, 한 달 만에 아주 걸어 다니고 쌩쌩하던데.”
“그건 거주자의 후손이라서 그런 거 아닙니까! 지금 사야 님과 류화홍 헌터의 자녀분들을 예로 든 거죠?! 그분들의 자녀분들은 예외로 쳐야죠!”
그 큰 목소리에 제인 아일리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삼촌! 소라 울리면 어떻게 해요!”
도윤이가 빼액 소리 질렀다. 그 목소리에 아기가 더 우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백시진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제인 아일리는 능숙하게 아이를 달랬다.
그리고 백시준은.
“자, 얘들아. 우리는 고기나 먹을까? 소고기는 적당히 익혀서 먹어야 하는 거 알지? 바싹 익히면 맛없으니까 어서 먹어.”
백시준이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윤 씨네 집안의 사 남매에게 고기를 권했다.
우리는 데굴 두 눈을 굴리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네엡!”
***
윤리사가 백도윤네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자, 선택하십시오. 기간은 가을이 끝나기 전. 그래, 첫눈이 내리기 전으로 하지요.”
누군가는 악몽을 눈앞에서 겪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