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서리 내린 날(1)
날이 부쩍 추워졌다.
그렇다고 겨울이 된 건 아니었고, 학교를 울긋불긋하게 물들였던 단풍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가을과 겨울의 사이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리고 지금.
“언니이!”
“형아아!”
류사하와 류홍랑은 사이좋게 말문을 텄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다섯 달째에 일어난 일이지만, 쌍둥이 남매는 두 살은 훌쩍 넘긴 아이들처럼 보였다.
정말 신기하지.
한 달 전에 태어난 도윤이의 조카, 그러니까 백시진과 제인 아일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직 손가락만 꼬물거릴 줄 안다는데 말이지!
“사하야, 홍랑아!”
나는 가방을 내팽개치고 아이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류화홍이 법석을 떠며 큰일이 났다고 나타나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는 류사하와 류홍랑을 품에 꼭 끌어안고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나 누군지 알겠어?”
“리사 언니이!”
“리사 눈나!”
아이들의 대답에 저세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얼굴을 내밀었다.
“사하야, 홍랑아. 나는?”
“세상이 옵빠아!”
“세상이 형!”
저세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세상도 은근히 애들을 좋아한단 말이야? 그때 류화홍이 아이들을 내 품에서 빼앗아 안아 들며 물었다.
“우리 사하랑 홍랑이, 누구랑 놀고 있었어?”
“강호!”
류사하와 류홍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사야의 마수인 금강호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에는.
“강호야!”
진이 빠진 채 바닥에 늘어져 있는 거대한 호랑이가 있었다. 류화홍이 놀라 금강호를 살피고는 아이들을 혼냈다.
“류사하, 류홍랑! 강호 너무 괴롭히지 말라고 했지?!”
“그치마안!”
“심심해써!”
어떻게 하지? 내가 낳은 아이들도 아닌데 사하랑 홍랑이가 너무 똑똑한 것 같다.
벌써 말문을 튼 건 물론,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 한다니!
그런데 이 기쁜 마음에.
“윤리사, 불쾌하게 왜 그렇게 기뻐하는 얼굴이야?”
“세상이 오빠는 내가 무언가에 기뻐하는 게 굉장히 불쾌하게 느껴지나 봐?”
빌어먹을 저세상이 초를 쳤다.
저세상이 ‘오빠’ 소리에 질린다는 얼굴을 보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오빠’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괜히 시비 걸지 마.”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어허, 애들 앞에서는 큰소리 내는 법 아니야! 그치, 화홍이 오빠?”
“그쵸, 아가씨.”
류화홍의 말에 저세상이 분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어주고는 류화홍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빠, 애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네요. 이러다 1년 지나면 웬만한 초등학생들보다 더 커 있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닐 거다.〗
머릿속으로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랑야!”
아니나 다를까?
랑야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이매망량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윤사해 못지않게 빛나는 그의 외모를 보며 불퉁하게 물었다.
“랑야, 아직도 미지 영역으로 안 돌아갔어요?”
〖그래.〗
랑야가 무슨 문제가 되냐는 듯 대답하며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윤사해의 따님께서는 내가 빨리 돌아갔으면 하냐?〗
“네! 랑야 때문에 아빠가 매일 피곤해한다고요!”
평소 윤사해는 이매망량의 업무를 일찍 끝내고 돌아온 날에는 항상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랑야가 바깥을 활보하고 있는 지금은.
‘미안하다, 얘들아. 아빠가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좀 자마.’
……라면서 방에 들어가 바로 잠들기 일쑤였다.
〖윤사해가 피곤해하는 게 왜 내 탓이냐? 정신력이 약한 네 아비 탓이지.〗
그걸 말이라고!
“하여튼, 랑야!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돌아가세요! 도대체 밖에서 할 일이 뭐가 있기에 안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건 네 아비한테 물어봐라. 나는 안 가르쳐 줄 거다. 그보다 좀 비켜 봐라.〗
“우왁!”
랑야가 나를 밀어내고는 류화홍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류화홍은 속수무책으로 장인어른에게 아이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사하, 홍랑.〗
“할부지!”
쌍둥이의 목소리에 랑야가 기분 좋다는 듯 실실 웃었다.
〖우리 똥강아지들, 내가 할아버지인 건 아느냐?〗
“네에!”
〖그래, 누구 딸이고 아들인데 똑똑해야지.〗
“그쵸? 저를 닮아서…….”
〖너를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으니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다.〗
“넵.”
류화홍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참 애잔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애처로워 보였으면 저세상이 류화홍의 어깨를 두드려 줄 정도였다.
어쨌거나 나는 랑야에게 물었다.
“그보다 랑야, 애들이 이제는 안 클 거라고요?”
〖그래.〗
랑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 상태로 2년? 3년? 하여튼 그동안은 안 클 거다. 사야가 그랬으니 이 녀석들도 똑같겠지.〗
“우와아…….”
나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가 곧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럼, 사하랑 홍랑이의 저 모습을 적어도 2년 동안은 계속 볼 수 있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다음은 인간과 다름없이 성장할 거다.〗
랑야가 제 품에 꼭 안겨 있는 손주들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보다 뭐하면서 놀았냐?〗
“강호랑 놀아써!”
“어흥 놀이해써!”
〖어흥 놀이?〗
“우리가 어흥 하면 강호가 우리 찾으러 다니는 거야!”
“그리고 강호가 어흥 하면 우리가 찾으러 다니는 거고!”
〖아하, 그래서 저 녀석이 저렇게 진이 빠져 있는 거군.〗
금강호가 정답이라는 듯 낑낑거리며 울었다. 하지만 랑야는 한심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체력 좀 길러라, 이 녀석아.〗
그 말에 곧장 풀이 죽어 버렸지만 말이다.
“랑야, 강호 좀 아껴 줘요.”
“그리고 화홍이 형도 좀 아껴 주시고요.”
내 말을 뒤이어 저세상이 말했다. 물론, 랑야는 우리의 말을 못 들은 척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아버지, 여기서 뭐하고 계셔요?”
사야의 등장에 그는 180도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
〖사야! 어디를 갔다 오는 거냐! 아직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몸이라면 진작 나았어요. 애들 낳는 거 별거 아니던데요.”
〖별거 아니었기는!〗
사야의 출산 과정을 지켜봤던 사야가 성난 얼굴을 보였다. 사야는 그가 화난 것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보다 아버지, 이매망량에 돌아온 것을 보면 길드장님께 보고할 것이 있어 오신 것 같은데…….”
사야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닌가요?”
〖젠장…….〗
“아버지, 애들이 들어요.”
〖애들한테 안 들리게 내가 어련히 알아서 조절했어!〗
랑야가 빼액 소리 지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할부지, 가?”
“벌써 가아?”
아이들의 동그란 눈에 랑야가 흠칫 몸을 떨고는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 결연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윤사해, 그 녀석한테 잠시만 들렀다가 금방 돌아오마!〗
랑야가 그렇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늑대로 모습을 바뀌었다. 얼마나 일을 빨리 끝내고 싶으면 저 모습으로 윤사해를 찾아가나 싶었다.
“정말이지, 아버지도 못 말린다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아가씨? 그리고 도련님?”
사야가 제 딸과 아들을 안아 들며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하하, 뭐,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에요. 사하랑 홍랑이가 제 애들이라면 하루 종일 집에 있고 싶을 것 같거든요.”
“맞아요, 일이든 뭐든 다 내팽개치고 얘들만 볼 것 같아요.”
내 말을 뒤이어 저세상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저세상이 의외로 애들을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저렇게 말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리사 아가씨, 세상 도련님. 사하랑 홍랑을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그보다 화홍, 강호는 왜 저렇게 기운이 없나요?”
“애들이 장난을 쳤나 보더라고요.”
그 말에 류사하와 류홍랑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 질렀다.
“장난 안 쳤는데!”
“마쟈! 장난 아니어써!”
그에 사야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뭐하면서 놀았나요?”
“어흥 놀이!”
“어흥 놀이?”
사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 준 건 류화홍이었다. 그가 자신과 똑같은 갈색 머리를 지닌 류사하를 안아 들며 말했다.
“술래잡기 비슷하게 놀았던 것 같아요.”
“그랬군요.”
사야가 푸스스 웃고는 진이 빠져 누워 있는 호랑이를 불렀다.
“강호.”
금강호가 끼잉, 우는 소리를 내며 사야에게 다가왔다. 사야가 곧장 호랑이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다독여 줬다.
“수고했어요, 우리 애들이랑 놀아 주기 힘들었죠?”
금강호는 끄응, 앓는 소리만 냈다. 그에 류사하와 류홍랑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강호, 힘드러?”
“우리가 힘들게 해써?”
금강호는 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끙끙거리기만 했다. 사야는 제 마수를 구해 주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사하와 홍랑은 이만 낮잠 자러 가 볼까요?”
“시러! 안 졸리는데!”
“마자! 더 놀고 시픈데!”
그 말에 사야가 류화홍과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곧 류화홍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길드 전체에 자장가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언니, 이건……?”
“쉿.”
사야 언니가 류홍랑을 안은 채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댔다.
왜 그러나 했더니.
‘자? 진짜 자는 거야?’
조금 전까지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떠들어대던 류사하와 류홍랑이 순식간에 잠들어 버렸다.
사야는 자신과 남편의 품에 안겨 단잠에 빠진 아이들을 보고는 류화홍에게 류사하를 넘겼다.
“부탁할게요, 화홍.”
“네, 누나!”
쌍둥이를 두 팔에 꼭 끌어안은 류화홍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나는 멍하니 물었다.
“언니, 이 노래는 뭐에요?”
“자장가랍니다. 길드장님께서 애들 재울 때 언제든 틀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거든요.”
뭐야, 이매망량. 복지 최고잖아.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길드 전체에 자장가를 틀어 줘도 된다니, 세상에 이런 길드가 어디 있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