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남은 감은 까치에게 준다더니(4)
하긴, 사야와 류화홍의 사이에서 난 아이들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 피가 짙으면 짙을수록 성장 속도가 남다른 후손들이지 않나?
‘애가 탈 만도 하지.’
많은 것을 놓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윤사해는 말했다.
“그럼, 부탁 좀 하지.”
〖망할, 우리 귀여운 똥강아지들 말하는 순간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려나 했더니.〗
“자네 손주들 이제 태어난 지 석 달이 조금 넘었다네.”
〖그 석 달이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걸 잘 알 텐데? 이미 걷기 시작한 녀석들이니 곧 말문도 트이겠지. 그 전에 돌아오도록 하지. 아, 맞아.〗
그대로 미지 영역으로 사라질 줄 알았던 랑야가 성큼성큼 윤사해에게 다가와서는 입을 열었다.
〖윤사해, 부탁 하나 하지.〗
“무슨 부탁?”
〖우리 손주 녀석들이 말하기 시작하면 녹화 좀 해 줘. 네가 자주 가지고 다니는, 그 뭐지?〗
“휴대폰, 다른 말로는 스마트폰.”
〖그래, 그거 가지고 녹화 좀 해 줘. 그럼, 이만 나는 가 본다.〗
윤사해가 어서 꺼지라는 듯 얼굴을 한껏 구겼다. 랑야는 어깨를 으쓱인 후 모습을 감췄다.
미지 영역으로 돌아간 것이다.
“후우.”
윤사해가 지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미간을 좁혔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인간은 없는데.’
윤사해, 자신도 그랬다.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한 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던가?
그건. 아마 로저 에스테라 역시 마찬가지일 터.
“서 비서.”
“네, 길드장님.”
윤사해와 랑야의 대화 동안, 쥐죽은 듯 조용히 입던 서차웅이 입을 열었다.
윤사해가 그에게 말했다.
“우성운과 우신우, 그 아이들과 관련해서 특별한 점을 발견했나?”
“아니요, 길드장님께서 아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군. 그럼, 서 비서. 그 아이들의 퇴원이 왜 늦어졌는지 알아볼 수 있나?”
“네, 알겠습니다.”
서차웅은 고개를 끄덕인 후, 윤사해의 집무실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윤사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인 모를 병으로 끙끙 앓던 아이들은 로저 에스테라의 등장과 함께 곧장 회복됐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수를 이용해서 회복한 것이라고 하지만, 똑같이 그것을 이용해 치료한 우성운과 우신우의 퇴원은 늦어졌었다.
‘왜일까? 로저 에스테라는 그 두 아이의 보호자인데, 설마 일부러 치료를 늦췄다거나 그런 건가?’
윤사해는 복잡해진 머리에 손가락을 튕겨 창문을 활짝 열었다. 곧, 시원한 가을바람이 날아와 머리를 식혀 줬다.
“천천히 생각하자.”
윤사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비나리 고등학교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나는 체육복을 입은 채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와아아! 김우재 선생님! 저희랑 짝피구 해요!”
“아니요, 선생님! 저희랑 축구 해요! 피구는 여자애들끼리 하라고 해요!”
“야! 우리도 축구 할 수 있거든?!”
그러면서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구경했다.
아이들이 싸우게 된 원인, 이번에 새로 부임한 역사 선생님인 김우재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반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하하, 얘들아. 진정. 조금만 진정하자.”
김우재는 대뜸 하늘을 보더니 날 좋다면서 수업 대신 밖에서 놀자고 했다.
그래서 이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자, 이렇게 하자. 먼저 피구로 승부를 가리는 거야. 남녀, 이렇게 편을 나누어서.”
김우재의 말에 도윤이와 우성운을 제외한 남자아이들이 픽 웃었다.
“선생님, 여자애들이 저희를 무슨 수로 이긴다고옥!”
겁 없이 외치던 남자아이가, 한 아이가 던진 배구공에 허벅지 사이, 소중한 그곳을 정통으로 맞고 바닥을 굴렀다.
김우재는 멍하니 두 눈을 끔벅이다가 방긋 웃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저희는 좋아요!”
단아를 앞세운 여자아이들이 활짝 웃었다.
“지, 질 수 없지! 저희도 좋아요! 우리한테는 반장이 있으니까!”
“여기서 나는 갑자기 왜 나오는 거야?! 나 단아한테 힘으로 안 돼! 절대로 안 된다고!”
“아니야, 반장! 우리는 너만 믿어!”
그렇게 남녀 간의 피구 시합이 시작됐다. 김우재는 한숨을 돌렸다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리사는 안 하니?”
“저는 다리 아파서 쉬려고요.”
“그럼, 성운이는?”
“저도요.”
내 옆에 앉아 있던 우성운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양호실 안 가도 되겠어?”
“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 그럼 쉬고 있으렴.”
김우재가 다정하게 말하고는 아이들의 피구 시합을 관전했다. 그의 관심이 우리한테서 멀어지자마자 나는 우성운과 투닥거렸다.
“우성운, 너 다리 안 아프잖아.”
“그러는 너도 안 아프잖아.”
“그건 그렇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우성운에게 물었다.
“피구가 싫어?”
“응, 맞는 거 싫어.”
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실은 맞는 게 싫어서 나왔어. 단아가 괜히 나 지키려고 하다가 다칠까 봐 그런 것도 있고.”
“가만히 보면 한단아는 너만 보는 기사님 같아.”
하하, 우리 단아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나는 실없게 웃고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너한테도 너만 보는 기사님이 있잖아?”
“누구?”
“우신우. 안 그래도 내가 너한테 뭔 짓 하나, 하지 않나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데? 저기 위에서.”
나는 4반을 가리키며 말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우신우가 두 눈에서 레이저라도 쏠 듯한 기세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성운이 그 모습을 보고는 당황하여 말했다.
“그, 그건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뿐이니까 그러는 거야!”
“그래? 우리는 어디 가고? 서로에게 너희뿐이라는 거야? 우리 친구 하기로 한 거 벌써 잊은 거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우성운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장난이야, 장난!”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김우재가 우리에게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리사야, 성운아. 다리 아프다고 하더니 둘이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신나게 하고 있어?”
“아…….”
나는 데굴, 두 눈을 굴리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냥 서로 응원 중이었어요.”
“리사는 여자애들 팀, 성운이는 남자애들 팀?”
“네.”
나와 우성운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뭐하고 계셨어요?”
“나?”
김우재가 내 질문에 싱긋 웃고는 제 어깨에 앉아 있는 새를 우리에게 보여 줬다.
“새랑 교류 중.”
“아하, 그러시구나.”
선생님께서는 조류랑 교류할 수 있는 특별한 스킬이 있나 보다.
‘……는 무슨.’
보면 볼수록 정말 괴짜 같았다.
여자애들도, 남자애들도 도대체 왜 이 선생님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얼굴이 잘생긴 축에 속하기는 하지만, 좀 많이 엉뚱한데.’
엉뚱하기만 할까?
왜인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 윤설아 선생님처럼.’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는 선생님.
그녀와 결은 다르나, 김우재 역시 내게 그렇게 달갑지 않은 선생님이셨다.
‘뭐, 그 망할 꼰대보다는 낫지만.’
나는 도하선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우성운이 김우재에게 말을 걸었다.
“까치네요?”
“오, 성운이. 어떻게 알았어?”
“어깨랑 배, 허리가 흰 색이잖아요. 다른 곳은 검은색이고요.”
“새에 관심이 많나 보네? 보통은 잘 모르는데.”
“그게, 관심이 많다기보다는…….”
우성운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DMO에 입사하는 게 꿈이거든요. DMO는 던전의 생태나 몬스터, 마수 등 여러 가지를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먼저 던전 밖의 자연 생태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나 보구나?”
“네.”
우성운이 부끄럽다는 듯이 목 언저리를 긁적였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우성운에게 그런 꿈이 있을 줄 몰랐다. 그것도 부모님과 똑같이 DMO에 입사하는 것이 꿈이라니.
“리사는?”
“네?”
“리사는 꿈이 뭐니?”
“어, 저는…….”
나는 목소리의 끝을 흐리다가 곧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매망량에 입사하는 거요! 오빠들이랑 똑같이 이매망량에 입사해서 열심히 일할 거예요!”
물론, 윤리오나 윤리타와 똑같이 던전을 공략하거나 그런 식으로 활동할 수는 없을 거다.
그렇지만 지하 길드 녀석들 뺨을 때리면서 다닐 수는 있겠지.
‘실전 경험이 풍부해지면 나도 오빠들처럼 던전 공략을 하거나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을 텐데.’
경험 없이 몬스터 뺨을 때리려고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저승 열차 끊을 테니까.
‘인지의 눈과 함께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스킬을 사용하는 데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 같은데.’
이 감을 어떻게 발휘하면 좋을지가 문제였다. 윤사해한테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안 될 게 뻔하지.’
윤리오나 윤리타는 비나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부터 전투에 있어 뛰어난 실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나는?
‘어떤 스킬인지 윤사해에게 제대로 보여 주지도, 그리고 알리지도 않았지.’
그런데 윤사해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에 대해 모두 알려야만 했다.
그 스킬을 연계해서 사용한 후에 찾아올 부작용에 대해서도.
그렇게 되면 윤사해가 기꺼이 내게 도움을 줄까?
‘도움은 무슨, 과보호가 더 심해질 거야.’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상황에 머리가 절로 아파 왔다.
“후우.”
나도 모르게 내쉰 한숨이었다. 그 한숨에.
“리사,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김우재가 관심을 가졌다. 어깨 위에 여전히 까치를 얹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