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남은 감은 까치에게 준다더니(3)
2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났다.
푸르던 녹음은 옷을 갈아입었고, 아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단풍 아래에서 추억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 좀! 협력 좀 해!”
저세상을 교실 밖으로 끌어내는 중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단풍 아래에서 추억을 만들고자 말이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주인공님께서는 협력할 생각이 없었다.
“싫어! 귀찮게 사진은 왜 찍어? 어차피 내년에도 볼 단풍인데!”
“내년이랑 올해가 같아?! 야, 우신우! 너도 좀 끌어 당겨 봐!”
“어? 응, 알겠어.”
“뭘 알겠다고 하는 거야!”
저세상이 우신우의 말에 빼액 소리 질렀다.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경고 어린 목소리를 말했다.
“내 몸에 손대기만 해 봐?! 아주 그냥!”
“아주 그냥, 뭐?”
저세상이 입을 다물었다.
저세상뿐만 아니라, 때 아닌 소란에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4반의 모두가 조용히 우리한테서 시선을 돌렸다.
비나리 고등학교에서 완력으로는 세상 최강, 단아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도윤이랑 우성운이랑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왔나 보다.
단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세상이 오빠,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자? 응? 그리고 지희준.”
저세상이 단아의 ‘오빠’ 소리에 쩌적 돌로 굳었을 때, 지희준은 난데없이 불린 이름에 흠칫 몸을 떨며 단아를 쳐다봤다.
“너는 뭘 그렇게 야려 보고 있어? 눈깔아, 확 그냥.”
“내, 내가 언제 야려봤다고.”
지희준이 그렇게 말하면서 두 눈을 내리 깔았다. 그 모습이 마치, 깨갱 꼬리를 내린 강아지…… 는 무슨, 그저 하찮기 그지없어 보였다.
단아는 그렇게 지희준을 기로 찍어 누르고는 방긋 웃으며 저세상에게 말했다.
“세상이 오빠, 갈 거지? 지금 밖에서 백도윤이랑 우성운 기다리고 있거든? 그리고 나도 기다리고 있었거든? 좋은 말로 할 때 가자, 응?”
“아, 알겠으니까 그 망할 ‘오빠’ 소리 좀 그만해! 내 손이랑 발, 둘 다 사라질 것 같으니까!”
“사라지게 해 줄까?”
단아의 말은 즉, 정말로 ‘손과 발을 으스러뜨려 줄까?’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저세상이 경악하며 외쳤다.
“미쳤어?! 절대 안 돼!”
“그럴 생각도 없었어. 겁먹기는.”
단아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겁먹었다고 그래?!”
저세상이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그러면서 앞장서서 쿵쿵, 걷는 것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단아는 깔깔 웃으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우신우, 우리도 가자.”
“응? 아, 응.”
우신우가 멍하니 있다가 내 말에 황급히 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벌써 한 달이 지나도록 어울려 다녔는데 여전히 함께하는 것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세상이 형,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도윤이가 저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 걱정에 저세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없어. 그런 걸 왜 물어봐?”
“그야, 단아가 기다리다가 짜증난다고 직접 데리러 간다고 했거든.”
어디 한 대 맞고 올 줄 알았다면서 도윤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세상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백도윤, 너는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냐? 한단아의 힘에 맥없이 밀릴 것처럼 보여?”
“아니야?”
저세상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비나리 고등학교 내에서 날고 긴다는 웬만한 각성자도 두려워하는 단아인데, 비각성자인 저세상이 그녀를 무서워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크흠, 흠.”
저세상이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그래서 사진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기서 찍을 거야! 여기가 명당 자리인 것 같더라고!”
“사진 찍어 달라고 누구한테 부탁할 건데?”
“아, 맞네.”
그걸 생각 못했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저세상은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뭐! 그냥 지나가는 애들한테 찍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내가 찍어 줄까?”
“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는 환하게 인사했다.
“회장 선배님!”
“그냥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비나리 고등학교의 전교 학생회장, 진달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올해 단풍도 참 예쁘게 물들었네. 내년에도 그러겠지.”
“회장 언니는 내년에 졸업이죠?”
“그렇지.”
비나리 고등학교는 특이하게도 3학년이 학생회장과 부회장을 맡았다.
‘입시하느라 바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입시가 뭐가 중요한가 싶었다.
‘중요한 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좋은 길드에 들어가느냐.’
어떻게 보면 내가 ‘마리아’였던 대한민국과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입시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
하여튼.
“자, 다들 중앙으로 모여 봐. 내가 예쁘게 찍어줄게.”
“네에!”
우리는 학생회장인 진달래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옹기종기 서로 붙었다.
사진은 내 휴대폰으로 찍기로 했다. 진달래는 여러 번, 사진을 찍고는 내게 넘겨 줬다.
“어때?”
“엄청 예쁘게 나왔어요!”
나는 활짝 웃으며 다른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여 줬다.
“우와, 진짜 잘 나왔다!”
도윤이가 감탄했다. 단아도 동그랗게 두 눈을 뜨고는 사진을 연신 살폈다.
우성운과 우신우, 그리고 저세상은 보지 않는 척 사진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그냥 마음 편하게 보면 될 텐데.
나는 픽 웃고는 진달래에게 꾸벅 인사했다.
“회장 언니, 감사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그냥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줘.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너희도 곧 수업 시작할 테니까 들어가 보도록 해.”
“네엡!”
나를 비롯해 모두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진달래가 떠난 후, 단아가 내게 당부했다.
“윤리사, 사진 전송해 줘! 알겠지?”
“당연하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있는 우성운과 우신우에게 말했다.
“우성운, 우신우. 너희한테도 사진 전송해 줄 거야.”
“누, 누가 뭐래? 우리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우신우가 펄쩍 뛰며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그렇다고. 어쨌든 각자 교실로 이만 돌아가자! 곧 종 치겠어!”
그 말에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느긋하게 사진을 확인하면서 걸었다.
“진짜 잘 나왔네.”
‘이 사진에 단예랑 단이도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예랑 단이한테 보내 줘야겠다.’
나는 단풍을 배경으로 찍힌 우리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야! 윤리사! 안 뛰고, 뭐해?! 다음 수업 윤리라고!”
“진짜?!”
윤리 선생님은 학년 부장으로,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애들이 저렇게 뛰었었구나!
나는 황급히 친구들을 따라 뛰며 단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세상이랑 우신우는 왜 뛰는 거래?”
“다음 수업 영어래.”
대답해 준 사람은 단아가 아니라 우성운이었다.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우리 담임 선생님, 그러니까 영어 선생님이기도 한 윤설아의 수업은 빡빡하기로 유명했다.
수업에 조금에라도 늦는 순간, 벌점 추가. 벌점이 쌓이면 여러모로 불이익이 가득했으므로 아이들은 그녀의 수업 시간만 되면 군기가 바짝 들었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뛰자!
나는 왜인지 모르게 신이 나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윤리사, 지금 웃음이 나와?!”
저세상이 투덜거렸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
윤리사가 학교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있는 것과 다르게, 윤사해의 낯빛은 한없이 어두웠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그래, 찾은 거라고는 로저 에스테라. 그 녀석이 꽤나 지독한 신앙을 가진 신부님이라는 것뿐이었지. 미지 영역의 ‘신’ 행세하는 녀석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더군.〗
그 말에 윤사해가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아, 하나 더 있군.〗
“뭔가?”
윤사해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가 교황이란 녀석한테서 꽤 예쁨을 받고 있다는 것 말이야.〗
이어진 랑야의 말에 곧바로 실망했지만 말이다.
로저 에스테라, 그가 바티칸의 교황에게 온갖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잠깐.’
윤사해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번쩍였다.
“그래, 교황.”
〖응?〗
“랑야, 자네. 혹시 대한민국을 벗어나 교황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건 무리야.〗
랑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한테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나는 미지 영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 그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
랑야가 비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윤사해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지 영역이 있지 않나?”
〖응?〗
“미지 영역에서도 너는, 아니. 너희는 나를 볼 수 있지. 그렇지 않나?”
윤사해가 가리킨 것은 미지 영역에 거주하고 있는 거주자들이었다. 윤사해의 질문에 랑야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기는 한데, 그게 왜?〗
“그럼, 미지 영역으로 돌아가 바티칸의 교황청 좀 살펴보고 와 줬으면 하는군.”
〖장난해?〗
랑야가 한껏 얼굴을 찌푸렸다.
〖나와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윤사해?〗
분명, 로저 에스테라를 뒤를 밟아 주는 것으로 한 달 남짓의 시간 동안 바깥에서 머물기로 했었다.
그런데 미지 영역으로 돌아가라고 하다니?
랑야의 분노 섞인 목소리에 윤사해가 말했다.
“안 잊었어.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랑야. 미지 영역으로 돌아가 잠시 대한민국 바깥의 상황 좀 살펴보고 와 줬으면 하는군.”
〖이봐, 윤사해. 미지 영역에도 각 구역이 나누어져 있어. 신으로 불리든 어떻게 불리든 각 구역 간에 사는 거주자들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가 않다고.〗
“그래도 내 이렇게 부탁하지. 정 힘들겠다면 바깥으로 나와 있는 시간을 두 달로 해 주겠네. 그래도 안 되겠나?”
〖당연히 되지.〗
들려온 대답에 윤사해는 순간 맥이 빠졌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손주 녀석들에 미친 도깨비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