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남은 감은 까치에게 준다더니(1)
내 말에 우신우가 크게 당황했다. 우성운도 그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치, 친구라고? 우리가?”
이렇게 된 거, 나는 분한 마음을 토해내듯 물었다.
“그래! 같이 여행도 다녀온 마당에 친구 하면 안 돼?”
“비록, 그 여행은 하루 만에 끝났지만 말이지.”
“저세상, 닥쳐.”
이 자식이 기껏 분위기 좀 훈훈하게 끌고 가려는데!
저세상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으르렁거리며 그를 쳐다보는데 도윤이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보다, 자. 오는 길에 꽃 좀 사 왔어. 음료를 사 오려고 했는데, 몸이 얼마나 회복됐는지 몰라서…….”
“꽃?”
우성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단아랑 리사랑 같이 골랐는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로 가져갈게.”
도윤이의 말에 우성운과 우신우가 곤란하다는 얼굴을 보였다.
왜 그러나 했더니, 방금 막 사 온 것처럼 생생한 붉은 꽃들이 화병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차린 우성운이 변명하듯 다급하게 말했다.
“서, 설윤아 선생님이 병문안 선물로 가지고 오셨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도윤이가 아쉽다는 듯, 우성운과 우신우에게 내미려고 했던 꽃다발을 거두려는 찰나.
“그냥 줘! 이, 이것도 같이 꽂으면 되니까!”
우성운이 황급히 꽃다발을 가로챘다. 도윤이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붉은 꽃과 이름 모를 하얀 꽃이 어우러지게 되었다. 그것이 꼭 설원에 핀 동백꽃처럼 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세상이 그런 내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뭐야, 윤리사. 갑자기 왜 웃어?”
“아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제,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운 만큼 감정이 희석되어 더는 슬프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왜인지 모르게 씁쓸해졌지만,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나는 우성운과 우신우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빨리 나아. 학교 오면 필기한 거 보여 줄 테니까.”
“정말?”
“응.”
우성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에 우신우가 기대감 어린 얼굴로 저세상을 쳐다봤다.
저세상은 그 시선에 매섭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안 보여 줄 거야.”
“보여 줄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세상이 뾰족하게 물었다. 나는 두 눈을 올망졸망 뜨며 물었다.
“설마, 세상이 오빠. 그렇게 못되게 굴 생각이야?”
한 번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저세상은 내가 어릴 때처럼 ‘오빠’라고 하면 못 이긴 척 넘어갔다.
“아오……!”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저세상이 잔뜩 짜증 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단예와 단이의 빈자리를 우성운과 우신우가 채운 느낌이었다.
아니지.
단예와 단이의 빈자리를 채우기는 뭘 채워? 암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친구들인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성운과 우신우.
두 사람이 우리의 친구가 됐다는 거였다. 악연도 지나면 인연이 된다고 하더니, 딱 그 꼴이었다.
***
제인 아일리를 대신하여 비나리 고등학교 1학년 3반의 담임을 맡게 된 임시 영어 교사.
그게 ‘설윤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어머, 여기서 만나네요.”
우성운과 우신우의 병실을 나섰던 윤설아가 멈춰 섰다.
그녀의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로저 에스테라가 우뚝 멈춰서며 미소를 그렸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이름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잊으셨겠구나?”
여자가 싱긋 웃고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탈 하나를 로저 에스테라에게 보여 줬다.
할미탈.
그것을 알아본 로저 에스테라가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유랑단의 수장께서 곧 마주칠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하더니, 이런 뜻일 줄은 몰랐군요.”
“저도 이렇게 제가 선생 노릇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렇군요, 그보다.”
로저 에스테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앞에서 가식적인 연기는 집어치워 주셔도 된답니다, 자매님.”
그 말에 할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네? 어쨌든 고마워. 애새끼들 앞에서 말조심, 행동 조심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몰라!”
“비나리 고등학교에 잠입한 탈은 당신뿐입니까?”
“아니?”
할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역사 선생 자리도 하나 비어 있더라고. 다행히도 그쪽 분야에 해박한 녀석이 있거든.”
“그 해박한 분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는지요?”
“양반.”
할미는 명쾌하게 일러 주고는 말을 이었다.
“이전 대와 달리 멍청하지 않고 내 말에 착실하게 따르는, 말 잘 듣는 강아지같은 녀석이야.”
그러고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제 학교에서도 그 두 사람을 철저하게 고립시켜 줄 테니까, 부디 네 실험이 통하기를 바랄게?”
이전에는 윤설아. 그리고 지금은 설윤아인, 할미가 가리킨 두 사람은 우성운과 우신우였다.
할미는 그 말을 끝으로 그를 지나치려고 했으나.
“아, 그 전에.”
질문이 생각나 자리에 멈춰 서서는 로저 에스테라에게 물었다.
“애새끼들 중 누구의 피가 더 짙은지 알아냈어?”
“애석하게도 아직입니다. 하지만 곧 알아낼 것 같아서요.”
로저 에스테라가 싱긋 웃었다.
우성운과 우신우의 퇴원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로저 에스테라가 그 두 사람의 치료를 늦추고 있었던 탓이다.
아이들에게 사용된 독은 레메게톤의 조각 중 하나로, 자세하게 말하면 성물을 갈아서 만든 것이었다.
레메게톤은 악마들을 봉인한 것.
그것의 조각에 얼마나 많은 악(惡)이 담겨 있겠는가?
로저 에스테라는 그것을 갈아 아이들이 먹게끔 한 것이다. 일종의 실험 겸, 우성운과 우신우가 죄책감을 가지게끔 하기 위해서.
‘죄책감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질책 같은 것도 원했지만.’
그것은 친애하는 형제의 어린 딸에 의해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로저 에스테라가 당돌하게 자신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내지르던 아이를 떠올리고는 키득거렸다.
그 웃음소리에 할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하게 갑자기 왜 웃어?”
“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자매님.”
로저 에스테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자매님께서는 뺨을 맞아 본 적 있으신지요?”
“응, 그것도 엄청 많아.”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곧, 할미는 꿈에 잠긴 듯 목소리를 내었다.
“너, 우리 언니 손이 얼마나 매웠는지 모르지?”
“당연히 모르지요.”
“모르는 게 좋을 거야.”
할미가 해맑게 웃음을 터트리며 광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언니에 대한 건 나만 알고 싶거든. 그래서 이렇게 탈이 된 것 아니겠어?”
할미가 제 이름이 내걸린 탈을 로저 에스테라에게 보여 주며 웃었다.
“언니는 이제 내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언니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로저 에스테라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유랑단의 아홉 탈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군요.”
“돌팔이 신부에게 들을 이야기는 아닌데?”
할미가 비아냥거리고는 휙 몸을 돌렸다. 그렇게 우성운의 담임 선생님인 ‘윤설아’로 완전히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잠깐만요.”
로저 에스테라가 그녀를 붙잡았다. 윤설아가 한껏 얼굴을 찌푸리고는 그를 쳐다봤다.
어서 용건을 말하라는 듯이 말이다. 그 시선에 로저 에스테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성운과 우신우, 그 아이들을 학교에서 고립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여느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 주십시오. 수장님과는 제가 따로 이야기를 나눌 테니 말입니다.”
윤설아는 찌푸린 얼굴로 로저 에스테라를 쳐다봤다.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 얽힌 의문을 알아차린 그가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매님.”
윤설아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로저 에스테라를 노려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아, 그리고.”
“또, 뭐?!”
“당신들께서 탈을 쓰면 알아볼 재간이 없어서 말입니다. 암호를 하나 만들지요.”
“우리 사이에 그럴 필요가 있어?”
“이제 본격적으로 함께 움직일 동지니까요.”
“동지라니, 꽤 불쾌한데.”
윤설아가 픽 웃고는 말했다.
“음, 뭐라고 정할까?”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따악,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그래, 이렇게 정하자.”
윤설아가 성큼, 로저 에스테라에게 다가가서는 속삭였다.
“신부님, 당신의 신께서 기도에 응답하셨나요?”
로저 에스테라의 웃는 낯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윤설아는 그것이 보기 즐거운지 웃으며 물었다.
“어때?”
묻는 말에 로저 에스테라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무척이나 좋습니다.”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었던지라 김이 새 버리고 말았다. 윤설아는 쯧, 짧게 혀를 차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 버렸다.
덩그러니 병실 복도에 남겨진 로저 에스테라는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뒤 고개를 돌렸다.
우성운과 우신우의 병실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여러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티격태격하면서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말이다.
로저 에스테라는 그것이 참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눈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