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장맛비가 지나간 후에(6)
여름 방학이 끝났다.
여름 방학의 마지막 주, 친구들과 떠난 여행 역시 엉망진창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어쨌거나 여름이 끝났다.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지만, 가을이 시작됐다.
“아, 짜증나. 여름 방학 동안 물놀이를 한 번밖에 못하다니!”
“단예랑 단이 만나러 갔을 때, 물놀이 안 했어?”
“응, 안 했어. 그냥 걔네가 다니는 고등학교 구경하거나 박물관이니 뭐니 하는 곳에만 다녀왔어. 엄청 재미없었다고!”
저세상을 비롯한 친구들은 다행히도 무사히 몸을 회복했다.
다만.
“그보다 우성운은 결석인가 보네? 2학기 시작하자마자 결석이라니.”
“결석이 아니라, 아직 병원에서 회복 중이래.”
우성운과 우신우는 아직 몸을 회복하지 못했다.
비각성자인 저세상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앓아누워 있는 상태라니.
‘이상해.’
정말 이상했다.
윤사해의 말로는, 아이들이 아팠던 건 수박 안에 침투해 있던 독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도 그냥 독이 아니라, ‘성물’이라 불리는 것에서 떨어져 나온 독.
그게 그 수박에 있었던 모양이라면서 현재 조사 중에 있단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독을 집어넣은 걸까?’
범인이야 뻔했다.
‘로저 에스테라.’
내 감이 분명 그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
‘아아, 정말 짜증나.’
로저 에스테라, 『각성, 그 후』에서 꽤 광신도 캐릭터로 나와서 안 그래도 정이 가지 않았던 인물이었는데 말이지.
‘정은 개뿔, 완전 싫어.’
우신우에게 손찌검을 하는 모습을 봐 버린 탓일까? 그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혐오하게 됐다.
‘우신우한테도 그러는데, 우성운한테도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겠지.’
무엇보다 걱정인 건 두 사람이 아직 몸을 회복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단아에게 물었다.
“오늘 수업 일찍 끝나겠지?”
“그러지 않을까?”
안 그러면 수업을 땡땡이 칠 기세인 단아였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단아와 도윤이에게 물었다.
“그럼, 같이 우성운이랑 우신우 병문안 가지 않을래?”
“걔들 병문안을 왜 가?”
“나는 찬성!”
상반된 의견이 나왔다.
단아가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도윤이를 보고는 머리를 헤집었다.
“아오, 진짜! 그럼 나도 갈래!”
“단아야, 안 간다며?”
“시끄러! 안 간다고 말한 적 없거든?! 조용히 해, 백도윤!”
단아가 주먹을 휘둘렀다. 어릴 적부터 몇 번 맞아 본 적 있다고, 도윤이는 아주 가볍게 단아의 공격을 피했다.
나는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보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자, 다들 조용히 해 주세요.”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방학이 끝나고 맞이한 개학,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 3반으로 들어온 낯선 여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로 여러분의 담임을 맡게 된 설윤아라고 해요. 제인 선생님 대신 임시로 온 기간제 교사지만 잘 부탁할게요.”
“네, 선생님!”
아이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 그리고 하얀 눈처럼 맑고 고운 흰 피부.
마치 아래아의 길드장인 최설윤을 연상시키는 외모. 하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런 미인을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어디서 만난 것 같은데 말이지.’
그때, 새로 온 임시 기간제 교사인 설윤아가 우리에게 물었다.
“1학기 반장은 누구였죠?”
“아, 저예요!”
도윤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부반장은요?”
“저, 저요.”
나는 반쯤 손을 들며 말했다.
설윤아가 도윤이와 나를 한 번씩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는 우리에게 물었다.
“새로 학급 위원을 뽑을까요, 아님. 이대로 갈까요?”
“이대로 가요!”
나와 도윤이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반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리 말했다.
이 자식들, 귀찮은 일 맡고 싶지 않아서 저러지!
“좋아요, 그럼. 도윤아, 리사야.”
“네, 선생님.”
“2학기 동안 잘 부탁할게요.”
설윤아가 사람 좋게 웃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웃음이 내게는 꺼림칙하게 다가왔다.
어쨌거나 나와 도윤이는 대답했다.
“네!”
“네.”
그렇게 2학기가 시작됐다.
***
여름 방학이 끝나고 시작된 2학기의 첫 날.
“앗싸, 단축 수업!”
“단축 수업 안 한다고 하면 오후 수업 쨀 생각이었지, 단아야?”
“야, 백도윤!”
단아가 빼액 소리 지르고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정답이야. 똑똑해졌는걸?”
칭찬하는 목소리에 도윤이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윤리사? 야, 윤리사!”
“으, 응?”
“저세상도 같이 가?”
“뭐를?”
단아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우성운이랑 우신우 병문안!”
“아…….”
나는 얼빠진 소리를 한번 냈다. 나는 설윤아와의 조례가 끝난 후, 도윤이와 단아에게 우성운과 우신우의 병문안을 가자고 했었다.
그런데 저세상에게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네.
“지금 물어볼게.”
나는 휴대폰을 들어 저세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곧 답장이 왔다.
[저세상 : 안 가.]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내가 간다고 하면 같이 갈 줄 알았는데.’
나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말했다.
“안 간대.”
“역시.”
단아가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는 아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세상이 형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아쉽다.”
“아쉽기는 뭐가 아쉬워? 어차피 같이 가도 귀찮아죽겠다는 듯이 툴툴거리기만 할 텐데.”
“그건, 단아 너도 그러지 않아?”
“뭐야?!”
단아가 주먹을 들었다.
“악! 아야!”
이번에 도윤이는 피하지 못했다.
***
도착한 병원 앞.
“뭐야?”
“뭐가.”
그 앞에서 저세상이 심드렁하게 내 말에 대꾸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에게 물었다.
“안 간다며?”
“아아, 그거? 너희랑 같이 안 간다는 뜻이었어.”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멍하니 입술을 헤벌리는데 저세상이 뭐하냐는 듯이 재촉했다.
“가자. 안 갈 거야?”
하여튼 재수 없는 자식!
어차피 결국 우성운과 우신우의 병문안을 올 거면서 왜 그렇게 답장했는지 몰라!
나는 뚱하게 외쳤다.
“간다, 가!”
우성운과 우신우는 VIP병실에서 일반 2인실로 옮겨졌다.
두 사람이 바란 일이었다.
“몇 호라고 했지?”
“1303호.”
저세상이 내 말에 답해 주며 앞서 걸어 나갔다. 저 자식이 나보다 먼저 가는 건 용납할 수 없지!
나는 저세상보다 더욱 걸음을 빨리 해서 우성운과 우신우의 병실을 찾았다.
“야! 우성운, 우신우! 우리 왔어!”
밝게 외치자마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우성운과 우신우의 병실 안에 낯익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저 에스테라는 아니었다.
“어, 음, 서, 선생님?”
“어머, 얘들아.”
오늘 제인 아일리를 대신해서 우리 3반을 맡게 된 임시 기간제 교사, 설윤아.
그녀가 우성운과 우신우의 병실 안에 있었다.
설윤아가 싱긋 웃었다.
“성운이가 아프다고 해서 병문안을 잠시 왔어요. 리사랑 세상이, 단아도 병문안을 왔나 보네요?”
“네? 네에.”
나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윤아는 내 고갯짓에 싱긋 웃고는 물었다.
“그쪽 학생은 처음 보는 친구인데 이름이?”
“저세상이라고 해요.”
“세상이…….”
설윤아가 저세상의 이름을 중얼거리고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성이 ‘저’ 씨만 아니었다면 참 예쁜 이름이었을 텐데, 그쵸?”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내 마음을 대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동감이에요, 선생님!”
단아였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란 이름이 익숙하다 했는데, 4반 친구 맞죠?”
“네? 네, 맞아요.”
“그렇구나.”
설윤아가 여전히 웃는 낯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자리 비켜 줄게요. 성운이랑 신우, 두 사람 모두 다음 주에 퇴원한다고 했죠?”
“네, 선생님.”
“그래요, 그때 봐요.”
설윤아가 우성운과 우신우에게 인사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우리는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그렇게 설윤아가 떠난 자리.
“뭐야, 너희? 왜 왔어?”
우신우가 뾰족하게 물었다. 그 질문에 단아가 그의 침대 옆 간이 의자를 빼서 앉으며 말했다.
“못 들었어? 병문안 왔다고 했잖아. 병문안.”
“그러니까 너희가 왜?”
“궁금하면 윤리사한테 물어봐. 윤리사가 먼저 오자고 했거든.”
우신우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우성운도 제 사촌 형제와 마찬가지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우물쭈물하다 대답했다.
“그게, 걱정이 돼서 찾아왔어.”
“왜?”
그 질문은 마치, 로저 에스테라가 자신들을 그때처럼 때리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라도 한 거냐는 듯이 들렸다.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 때문일까?
“친구니까!”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친구니까 찾아왔다, 왜!”
아직은 무더운 여름날에 가까운 가을날, 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병실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