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장맛비가 지나간 후에(4)
병실에 들어온 사람은 윤사해였다. 그의 곁에 서차웅도 함께 있었지만 그는 관심 밖이었다.
‘서차윤이랑 닮았으면 조금 관심이 생겼을 텐데.’
암만 이복형제라고 해도 저렇게 닮지 않을 수가 있을 정도로 서차웅은 그와 많이 다른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윤사해에게 달려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빠! 한태극 의원님은?”
아참, 대표님이지. 하지만 여기서 그걸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윤사해야, 뭐.
“적당히 잘 진정시켰단다. 세상이는 어떠니?”
나나 저세상, 그리고 윤리오나 윤리타 말고는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지.
윤사해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나는 말했다.
“자고 있어.”
윤사해가 내 말에 저세상을 꼼꼼하게 살폈다.
“상태가 많이 호전된 모양이구나.”
“응, 그런 것 같아.”
내 말에 윤사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의사 선생님이 애들이 왜 저렇게 됐는지 아직도 원인을 모르겠대?”
“그래.”
원인은 물론, 병명도 모르겠다고 했다면서 윤사해는 의사 선생님들을 욕했다.
못 들은 척 해야지.
그때 윤사해가 내게 물었다.
“리사야,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뭐니?”
“나? 나는 고기! 다른 애들은 수박 먹었어.”
“수박?”
“응, 우성운이랑 우신우가 챙겨 왔거든. 로저 신부님이 같이 먹으라면서 말이야.”
“그렇단 말이지.”
윤사해가 아래턱을 만지작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서 비서, 로저 신부한테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
“다시 한번 더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형제님.”
로저 에스테라가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아니. 정확히는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형제님의 어린 따님분?”
“아… 안녕하세요…….”
로저 에스테라가 붉은 눈을 반짝 빛내며 미소를 그렸다. 그런 후에야 윤사해에게 알은체를 했다.
“이것 참 미안합니다, 형제님. 아무래도 제가 아이들한테 설익은 수박을 준 모양입니다.”
“그걸 먹고 애들이 저렇게 됐단 말인가?”
“그 수박 때문에 어린 양들께서 저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윤사해가 로저 에스테라의 멱살을 잡으려고 들었다. 나는 황급히 그를 말렸다.
“아빠, 안 돼! 잠깐만!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애들이 왜 저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괜히 엄한 사람 잡으면 미워할 거야!”
“리사…….”
윤사해가 앓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는 로저 에스테라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로저 에스타라가 흐트러진 옷차림을 바로 하고는 나를 칭찬했다.
“친애하는 형제님의 따님분께서는 마음씨가 참 곱군요.”
“헛소리 그만하고 이만 꺼지시게. 자네가 보호하고 있는 두 녀석이 어느 병실에 입원해 있는지는 말 안 해줘도 알겠지?”
“물론이죠.”
로저 에스테라가 사람 좋게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사해는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이내 내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리사. 네 앞에서 그런 험한 모습을 보이려던 것 아니었는데. 많이 놀랐니?”
“아니, 괜찮아. 하지만 사람 멱살 함부로 잡고 그러면 안 돼! 내가 보고 배우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아빠는 괜찮단다.”
“뭐가?”
“우리 리사가 재수 없게 시비 터는 녀석 멱살 잡아도 좋다고.”
아니, 잠깐만요. 조금 전에 로저 에스테라는 아빠한테 재수 없게 시비 털거나 그러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세상이 오빠 자고 있으니까 쉿!”
“그래, 쉿.”
윤사해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저기, 길드장님.”
로저 에스테라가 병실에 들어선 직후, 자리를 피해있던 서차웅이 조심스럽게 윤사해를 불렀다.
“서 비서가 뭔가를 알아낸 모양이구나. 세상이 옆에 잠시만 있으렴.”
“응! 저세상이 자고 있는 거 구경하고 있을게!”
“그래.”
서차웅이 왜 윤사해를 불렀나 했더니, 안절부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있는 저세상의 주치의가 보였다.
‘광혜원도 있네.’
하긴, 광혜원은 이매망량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매번 러브콜을 받는 실력 좋은 힐러라고 했다.
윤사해가 그녀를 부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저세상이 잠들어 있는 걸 구경하려고 했다.
그랬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세상?”
나는 놀라 물었다.
“자고 있던 것 아니었어?”
“시끄러워서 깼어.”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줬다.
“그냥, 아빠랑 로저 신부님이랑 잠깐 싸움이 붙어서 말렸어.”
“아저씨랑 로저 신부가?”
“응, 로저 신부님께서 자신이 챙겨 준 수박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하니까 아빠가 엄청 화냈어.”
“그러실 필요 없는데…….”
저세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런 그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때려줬다.
“아야! 갑자기 왜 때려?!”
왜 때리기는!
나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너는 아빠가 너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모르지?”
“알거든?”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
“내가 뭐?!”
저세상이 빽 소리 질렀다가 앓는 목소리를 냈다. 나는 쯧쯧 짧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다시 두 눈 꼭 감고 자기나 해. 곧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가 남해에서…….”
“세상아!”
“괜찮아?!”
“……올라올 테니까.”
어쩜, 저 두 사람은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게 잡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윤리오와 윤리타가 후다닥 저세상에게 달려와 그를 살폈다.
“괜찮아? 갑자기 쓰러졌었다며!”
“맞아, 이야기 다 들었어! 독에 당한 거야?!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우리 세상이한테!”
윤리오와 윤리타가 잔뜩 화난 모습으로 저세상의 얼굴을 붙잡아 이리저리 살펴봤다.
“아, 아니, 형들. 잠깐만.”
나는 당황해하고 있는 저세상의 모습에 픽 웃고는 윤리오와 윤리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단아랑 도윤이는 어떤지 살펴보려고 가려는 찰나.
쫘악-!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뺨을 때리는 것이 분명한 소리가.
무슨 일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그야, VIP병동은 이매망량이 모두 빌린 상태였고 이곳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친구들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맞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것.
‘도대체 누구지?’
단아와 도윤이일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태극 의원과 시준이 삼촌이 제 손주와 제 아들을 얼마나 생각하는데 뺨을 때린단 말인가!
그러니까 지금, 맞고 있는 사람은.
“우성운! 우신우!”
우성운과 우신우였다.
황급히 그 두 사람이 입원해 있는 병실에 들어서자, 우신우의 멱살을 잡고서 손을 올리고 있는 로저 에스테라가 보였다.
“뭐하는 짓이에요?! 그 손 놔요!”
“친애하는 형제님의 따님분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잔말 말고 그 손 놓으라고요!”
나는 성큼성큼 로저 에스테라에게 다간 후 직접 그의 손을 우신우로부터 떼어냈다.
“뭐하는 짓이에요?”
“벌을 주고 있었을 뿐입니다.”
“벌이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로저 에스테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신우와 성운이가 가지고 간 수박으로 여러분이 이렇게 아픈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 수박, 신부님이 주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신부님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아하, 그렇군요.”
로저 에스테라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벌.”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서 나타난 웬 해골이 앙상한 뼈를 움직였다. 로저 에스테라의 얼굴을 향해 말이다.
후두둑, 그의 뺨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자, 됐습니까? 잘못한 자는 벌을 받아야지요. 그래서 이렇게 저를 벌했답니다, 리사 양.”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미친 사람.’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 와중에 우성운과 우신우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벌벌 떨 뿐이었다.
‘설마, 이런 상황이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닌 건가?’
그런 게 분명해 보였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자 나는 이를 까드득 깨물며 물었다.
“로저 에스테라, 당신. 우성운과 우신우 학대하고 있는 중이죠?”
“무슨 소리인지?”
로저 에스테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우성운과 우신우에게 물었다.
“성운 군, 신우 군. 제가 당신들을 학대했습니까? 리사 양에게 말해 주시지요.”
그 말에 우성운과 우신우가 흠칫 몸을 떨고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맞아, 아니야! 신부님이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 주는데!”
“어떻게 잘해 주는데?”
우성운과 우신우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잘해 주고 있는지 말해 봐, 우성운. 그리고 우신우. 하지만 이것 하나 알아둬.”
나는 로저 에스테라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암만 보호자가 잘해 준다고 해도, 그 보호자가 아이를 마음대로 때린다거나 그래서는 안 돼.”
절대로.
나는 단호하게 뒷말을 덧붙이며 우성운과 우신우를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내 시선에 두 사람이 흠칫 어깨를 떨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우성운, 우신우.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아빠한테 말할 거야. 아빠한테만 말할 줄 알아? 그보다 더 높은 사람한테 말할 수도 있어.”
내 말에 로저 에스테라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형제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당연히 AMO의 본부장님이죠.”
내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로저 에스테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AMO의 본부장님께서 그 어느 길드보다 약자를 보호하고 수호할 가호의 길드장님이 애들을 학대하고 있었다는 걸 안다면 어떻게 나오실지 참 궁금하네요.”
내 말에 로저 에스테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벌은 아이를 훈육하는 방법 중 하나로.”
“뺨을 때린다는 말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어요.”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이렇게요.”
쫘악-!
로자 에스테라의 뺨을 경쾌하게 때려 버렸다.
“애들한테 당장 사과해, 로저 에스테라. 이 빌어먹을 새끼야.”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손맛, 아니.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의 사용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대상에게 스킬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