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장맛비가 지나간 후에(2)
도저히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공간.
그 공간 속에서.
“아윽……!”
서차윤은 심장을 움켜잡으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고통이 꽤 상당한지, 그는 자리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며 장천의가 쯧 혀를 찼다.
“도대체 리사 양에게 말은 왜 건 겁니까? 아니, 애초에 스토커처럼 애들 노는 걸 보고 있었답니까?”
“시끄… 러……!”
서차윤이 이를 악물고는 장천의에게 말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 눈에는 간혹 보이거든.”
“뭐가 말입니까?”
“닥쳐올 불운이나 재앙 같은 거.”
“그게 리사 양한테서 보였습니까?”
태연했던 장천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서차윤은 그에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아니, 리사한테는 안 보였어. 리사가 먹으려고 했던 수박에 보였지.”
“수박이요?”
“그래, 수박.”
서차윤의 말에 장천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디 상했던 모양이군요. 암만 그래도 그렇지. 그런 몸으로 현실에 개입하려고 하다니.”
조금만 더 현실에 개입하려고 했으면 그 몸이 사라지고 말았을 거다.
서차윤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 장천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너야말로 리사에게 신경 좀 쓰지 그래?”
“제가 왜 신경을 써야 합니까?”
“리사가 살아 있는 건 모두 다 너 때문이니까!”
버럭 소리 지르는 목소리에 장천의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신경 쓸 사람은 지금 단 한 명뿐입니다.”
“누구? 저세상?”
“네.”
장천의가 정답이라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이 세계에서는 분명 없어야 할 녀석인데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오류가 벌어진 건지, 제 앞에 나타났지 뭡니까?”
그때의 충격과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했지만, 우리 친애하는 고객님께서 직접 거둬 가시는 바람에 그마저도 쉽지 않게 되어 버렸으니.”
“저세상이 지난 세계의 그 녀석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무슨 소리입니까?”
“오류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네가 버리고 온 세상의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말에 장천의가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이내 웃었다.
“당연히 제거해야죠.”
장천의가 무슨 대답을 바랐냐는 듯이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윤리사 양은, 지난 세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위해 실패한 주인공께서 걸어온 길을 보여 줬으니까요.”
“그래도 실패한다면?”
묻는 말에 장천의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서차윤은 그에 비웃음을 걸며 말했다.
“리사가 실패하면 어떻게 할 건데? 다시 말했듯, 더는 시작할 수 없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존재였던 자신은 더 이상 없다.
이곳에 존재하는 ‘서차윤’은 그저 죽어 떠돌아다니는 귀신과도 같은 존재일 뿐.
서차윤의 질문에 장천의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장천의가 아래턱을 긁적이고는 미소를 그렸다.
“그럼, 우리의 이야기는 정말 끝나지 않을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천의가 싱긋 웃었다.
“제가 어떻게든 완벽한 이야기로 결말을 맺게 만들 테니까요.”
“하하, 그렇다면 눈을 조금 다른 곳으로 돌리지 그래?”
서차윤이 한껏 장천의를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의 오류는 저세상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안 가르쳐 줄 거야.”
고통 속에서 벗어난 서차윤이 몸을 일으키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생각해 봐. 그 잘난 머리로.”
서차윤이 장천의의 이마를 툭툭 건드리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언제가 다시 만나자고.”
그 말을 끝으로 서차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장천의는 서차윤이 툭툭 두드렸던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만지고는 비딱하게 말했다.
“하여튼 간에 재수 없는 자식.”
끼익, 끼이익.
장천의의 주위로 펼쳐진 수십 개의 시계가 녹슨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돌아갔다.
그 소리가 시끄럽지도 않은지, 장천의는 공간 한가운데에 마련된 의자에 편안하게 몸을 기댈 뿐이었다.
‘리사가 실패하면 어떻게 할 건데? 다시 말했듯, 더는 시작할 수 없어.’
조금 전의 대화에 장천의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서차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특수 스킬을 스스로 제거해 버렸다.
“실패라…….”
장천의가 멍하니 읊조리고는 어조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럴 일 따위, 일어날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또한, 다시 되돌렸는데.
장천의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째깍, 돌아가고 있는 여러 개의 시계 사이에서 턱을 괴었다.
***
큰일 났다.
“단아야, 괜찮아?”
“죽겠어…….”
단아가 새벽부터 끙끙 앓기 시작했다. 화장실도 여러 번 오가며 진에 빠져 쓰러져 버렸다.
“할배가 저 멀리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어.”
“단아야, 네 할아버지 아직 살아계시잖아.”
그것도 아주 정정하게.
“아참, 그렇지.”
단아가 얼빠진 소리를 내고는 곧 울상을 지었다.
“어쨌든 죽겠어.”
“자, 여기 약.”
“싫어…….”
단아가 내 손에 얼굴을 부리며 칭얼거렸다.
“약 먹으려면 물이랑 같이 마셔야 하잖아…. 입에 뭐 넣으면 바로 토할 것 같아…….”
아무래도 단아가 많이 아픈 것 같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리사, 어디 가? 가지 마아.”
“금방 돌아올게.”
꽤 늦은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화홍이 오빠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황급히 방을 나섰는데.
우당탕! 누군가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누군가 하니.
“도윤아? 도윤아!”
도윤이었다.
나는 황급히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도윤아, 괜찮아?”
도윤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 도윤이를 붙잡고 어깨를 흔드는데, 도윤이가 힘겹게 눈을 뜨며 내게 물었다.
“엄마아?”
“엄마는 무슨! 나 리사야, 윤리사!”
“리사……?”
“그래! 너 괜찮아?”
도윤이가 내 말에 울상을 지었다.
“리사야… 죽겠어…….”
그러고는 배를 움켜쥐며 금방에라도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배가 너무 아파아.”
순간 단아가 생각났다. 나는 굳은 얼굴로 도윤이에게 물었다.
“다른 애들도 그래?”
“몰라… 다들 그냥 죽은 것처럼 누워 있기만 해…….”
아니, 그건 안 괜찮은 거잖아!
나는 힘겹게 도윤이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는 남자애들 방을 있는 힘껏 열어젖혔다.
“저세상! 우성운, 우신우!”
들려오는 목소리라고는 끙끙 앓아대는 목소리뿐이었다.
나는 도윤이를 벽에 기대어 앉게 만들고는 저세상을 먼저 찾았다.
다행히 저세상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가장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던 탓이다.
“야, 저세상. 괜찮냐?”
흔들기 무섭게 저세상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으으, 말 시키지 마. 머리 아파. 배 아파. 그냥 다 아파.”
“그래, 그런 것 같네.”
저세상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나는 저세상의 땀을 닦아 주고는 입을 열었다.
“우성운, 우신우!”
두 사람도 저세상이나 도윤이와 별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우성운이 힘겹게 눈을 뜨고는 웅얼거렸다.
“다들 미안… 우리가 가지고 온 수박이 뭔가 잘못된 거였나 봐…….”
“아니야, 성운아…. 내가 구운 고기가 잘못됐던 것 같아…….”
그 말에 우신우가 말했다.
“그럼, 윤리사도 멀쩡한 상태면 안 되잖아…….”
“아, 그것도 그렇네…….”
우성운이 허탈하게 웃고는 곧 앓는 소리를 냈다. 도윤이도 그와 똑같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성운아… 아무래도 내 탓인 것 같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아니야, 우리 탓이야…….”
“맞아… 수박을 안 먹은 윤리사만 멀쩡한 것 보니까 우리 탓인 것 같아…….”
우신우가 우성운의 말을 뒤이어 말했다. 아이고, 머리야.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가 그렇게 중요해? 다들 조용히 하고 가만히 누워 있어! 약은?”
“못 먹겠어.”
모두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단아와 다들 똑같은 증상을 겪다 진이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으음, 여보세요?
자고 있었던 듯, 류화홍이 꿈에 잠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화홍이 오빠! 지금 당장 별장으로 와 줘!”
-왜요……?
“묻지 말고 빨리! 애들 다 이상해! 많이 아파! 저세상도 지금 죽어가고 있으니까 어서 와! 아빠한테 죽고 싶지 않으면!”
-헉! 알겠어요!
류화홍과의 전화가 뚝 끊겼다.
곧 그가 올 거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우신우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윤리사, 너… 남 협박하는 소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우신우, 너한테 협박한 적 있어?”
“아마도……?”
나무 아픈 나머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있을 거야…….”
아니, 도윤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도윤이의 말에 우성운과 우신우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치……?”
“맞아… 그런 것 같았어…….”
아주 죽이 척척 잘 맞는다.
그 와중에 우리 중 유일한 비각성자인 저세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나는 저세상의 차가워진 뺨을 손으로 덥혀 주며 물었다.
“저세상, 괜찮아? 괜찮지? 조금만 참아. 화홍이 오빠가 금방.”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도착했네.”
밖에서 류화홍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