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여름의 장맛비(6)
“아, 짜증 나.”
단아가 거실에 대(大)자로 누웠다.
“한단아, 짜증 난 거 알겠지만 짐부터 정리해. 그리고 여기에서도 물놀이 할 수 있거든?”
“정말?”
“그래, 여행 계획 짤 때 말했잖아.”
“그랬나?”
단아가 저세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거나 단아는 곧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영복으로 옷 갈아입어야지! 윤리사, 우리 방 어디야?”
“응? 같이 잘 거야?”
“당연하지! 우리 1층 쓰자! 남자애들은 2층 쓰라고 해!”
단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픽 웃고는 어처구니없어하는 남자아이들에게 말했다.
“들었지? 너희 방은 2층이야.”
“야! 네 명이 2층에서 어떻게 자!”
“2층에 있는 방 엄청 넓잖아. 다 알거든? 우는소리 하지 말고 저세상 너도 옷이나 갈아입어.”
저세상이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이고는 쿵쿵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하여튼, 성질하고는.
그보다.
“너희는 물놀이 안 할 거야?”
“어? 할 거기는 한데, 저세상이랑 백도윤 옷 갈아입고 난 다음에 옷 갈아입을래.”
우성운이 애매하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단아가 벌컥 문을 열고 나왔다.
“윤리사! 물놀이하러 가자!”
“잠깐만, 단아야! 나도 옷 갈아입어야지!”
나는 단아를 급히 진정시키고 방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 새로 산 레쉬가드를 꺼내 입었다.
그렇게 문을 열자마자.
“윤리사, 옷 다 갈아입었어? 왜 이렇게 굼떠?”
다시 닫아 버렸다.
상의를 탈의한 채, 하의만 입고 있는 저세상을 본 것도 있지만.
‘뭐, 뭐야? 몸 왜 저렇게 좋아?’
도저히 고등학생이라고 생각이 안 될 정도의 아주 훌륭한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리오랑 윤리타랑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암만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저런 몸매를 가질 수 있지?’
가만 생각해 보니 저런 몸매를 가진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바로, 우리 윤씨네 남정네들.
‘유전인가? 아니, 유전이 아니라 10년이란 세월에 그 영향을 받은 건가?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거지?’
멍하니 입술을 벌리는데.
“야, 윤리사. 괜찮아? 갑자기 문은 왜 닫아?”
똑똑, 저세상이 노크했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킨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바로 앞에서 있던 저세상이 나를 보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응? 응, 괜찮아. 다른 애들은?”
“벌써 옷 갈아입고 밖에서 너 기다리고 있었지.”
“그래? 그럼, 가자.”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팔과 다리를 함께 움직이며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저세상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밖으로 나오자마자 저세상이 입을 열었다.
“가자. 조금만 걸으면 근처에 계곡 있어. 여기 풀장에서 놀아도 되는데 아무래도.”
“계곡이 더 좋아!”
단아가 저세상의 말을 끊어 먹으며 빼액 소리 질렀다.
“그럴 줄 알았지.”
저세상이 픽 웃고는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분명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모기장 같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더, 사람의 뭔가를 자극한다고 해야 하나?
‘오, 신이시여.’
나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각성, 그 후』는 도대체 왜 저세상이 저런 근육질의 몸매를 가졌다느니 뭐니 하는 서술을 하지 않았었던 걸까?
‘내가 못 보고 지나갔나?’
그랬을 수도 있다. 저세상이 암만 근육질의 몸매로 서술되어 있다고 해도, 내 취향은 중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를테면 윤사해라거나, 우리 강산에 본부장님이라거나 하는 사람들 말이지.’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순간.
“윤리사, 뭐해! 빨리 가자!”
단아가 내 손을 덥석 잡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한단아! 너 길 모르잖아!”
“윤리사가 알겠지!”
정답이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계곡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고, 몸을 가볍게 풀고는 곧장 풍덩 물에 뛰어들었다가.
“아, 시바! 추워!”
바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계곡물이 아주 얼음장이었다. 내 모습을 보고 저세상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자식이? 그보다 단아는…….
“단아야!”
파랗게 질린 입술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단아를 부축하며 뭍으로 빠져나왔다.
그런 우리에게 저세상이 비딱하게 웃으며 물었다.
“괜찮냐?”
“괜찮아 보여?”
나는 벌벌 떨며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저세상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먼저 튀어 나가서 그랬어? 여기 계곡물 엄청 차가운 거 다 알면서.”
“그치만 지금까지 이렇게 차가웠던 적은 없잖아!”
“그거야 매번 해진이 형이 물을 덥혀 줬으니까 그러지.”
“아.”
얼빠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참고로 청해진은 이번에 윤리오와 윤리타와 함께 남해로 내려갔다.
일종의 휴가임과 동시에 임무라고 들었는데 자세히는 모른다.
어쨌거나.
“망할, 이제 좀 놀아 보나 했더니.”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그때 도윤이가 말했다.
“괜찮아, 리사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곡물의 표면 위로 화르륵,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계곡 주위의 수풀에는 불이 닿지 않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도, 도윤아. 지금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응. 물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네.”
도윤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물이 아직 차가울 수 있으니까 나 먼저 들어갔다가 나와 볼게.”
도윤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곡물에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다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저세상도.
도윤이는 해맑기만 했다.
“얘들아, 물 따뜻해! 들어와!”
그 목소리에 우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계곡에 천천히 들어갔다. 도윤이의 말대로 계곡물은 정말 따뜻했다.
그러니까 물놀이하기 딱 좋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신이 나게 놀고 있는데 보고 말았다.
우성운과 우신우가 얕은 물에서 우리가 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을 말이다.
“단아야, 쟤들 좀 봐봐.”
“우성운이랑 우신우? 왜? 마음에 안 들어? 때려 줄까?”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튀는 거니, 단아야.
나는 어색하게 웃고는 말했다.
“때려 줄 필요는 없고, 우리는 이렇게 놀고 있는데 얕은 물에서 발장난만 치고 있는 걸 어떻게 생각해?”
“흐음.”
단아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우성운과 우신우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나 역시 단아와 똑같이 웃어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란 건, 분명 나와 단아를 가리키는 말일 게 분명했다.
우리는 척척 우성운과 우신우에게 다가갔다.
“우성운, 우신우.”
“뭐야?”
나는 싱긋 웃었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게.”
“뭐? 무슨 소리를 하는……!”
“시, 신우야!”
풍덩! 우신우가 단아의 힘을 못 이기고 계곡물에 빠져 버렸다.
“자, 그 다음에는 너.”
“자, 잠깐마안!”
우성운이 비명을 지르며 단아의 손길을 피하려고 했지만.
“으악!”
결국, 단아에게 붙잡혀 계곡물 깊은 곳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푸하! 야! 한단아, 너 죽고 싶어?! 사람을 이렇게 물에 집어 던지면 어떻게 해!”
“콜록, 나 물 삼켰어.”
우신우와 우성운이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돌아온 건 그 둘을 놀리는 웃음소리가 아닌 정적이었다.
우신우와 우성운이 입고 있던 하얀 셔츠 아래로 드러난 흉터들 때문이었다.
어깨에서부터 가슴, 그리고 복부에까지 우신우의 몸 곳곳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등을 돌린 채, 콜록거리고 있는 우성운의 뒤도 마찬가지.
우리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의식한 우신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게, 왜 사람을 집어 던져서!”
“나, 나는……!”
“잠깐만, 단아야.”
나는 놀란 기색인 단아의 말을 멈춰 세우고는 입을 열었다.
“우신우, 우성운. 너희 괜찮아? 로저 신부님과 함께 지내고 있는 중이라고 했지? 그 흉터들, 혹시 신부님께서.”
“만든 거 아니야!”
우성운이 내 말을 잘라먹고는 빼액 소리 질렀다.
“로저 신부님은 아무 짓도 안 했어! 우리 몸에 새겨진 흉터는 모두 부모님이 만든 거야!”
우성운은 씩씩거리다 물었다.
“정답이 됐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성운이 치부라도 들킨 사람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으니까.
“나랑 우성운은 먼저 별장에 돌아가 있을게. 너희끼리 놀아.”
우신우는 그렇게 우성운을 데리고 별장으로 떠나 버렸다. 나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리사야, 괜찮아?”
“응? 응, 당연히 괜찮지.”
나는 도윤이를 향해 싱긋 웃었다. 도윤이는 다행이라는 듯 나에게 미소를 그려 보이고는 말했다.
“성운이랑 신우는 괜찮을까?”
“괜찮겠지!”
단아가 말했다.
“흉터 좀 들켰다고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이야기야?”
“단아야, 사람에게는 감추고 싶은 치부라는 게 있어.”
“치부가 무슨 말인데?”
도윤이가 잔잔히 미소를 그렸다.
“나중에 단예랑 단이한테 물어봐.”
“뭐?! 야, 백도윤! 너 지금 나 무시한 거지!”
“아악! 아니야!”
도윤이가 단아가 퍼붓는 물세례를 피하며 소리 질렀다. 그때, 저세상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윤리사, 괜찮아?”
“괜찮다니까?”
“전혀 안 괜찮은 거 알아.”
저세상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우성운이랑 우신우에 새겨진 흉터, 아니. 상처.”
저세상의 목소리에는 화가 묻어나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거야. 이제 막 딱지가 앉고 있는 거 다 봤어.”
너도 보지 않았냐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나는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로저 신부님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해서 괜찮겠거니 신경을 껐었어.”
아니,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성운과 우신우와는 나에게 있어 원수나 다름없는 녀석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잘 가, 신우야! 성운아!’
‘윤리사.’
‘……우신우? 아직 안 갔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부모님께 말하고 다시 돌아왔어. 1학년 때, 고마웠어.’
‘응? 뭐가?’
‘모르면 됐어. 그리고 너무 늦었지만 사과할게. 엄마 없다고 놀려댄 거. 저세상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 줘.’
문득, 떠오르는 어린 날의 기억에 나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