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여름의 장맛비(3)
에일린 리는 윤사해의 이성이 고장 난 것도 모르고 재잘거렸다.
-자기도 참 고생이 많아. 다 큰 애들 뒷바라지한다고.
“자. 잠깐, 뭘 봤다고? 뭘 잘해?”
-수영. 정확히는 한강 횡단이라고 해야 할까?
키득거리며 웃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가까스로 이성을 찾았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장천의 회장이 너한테 그걸 보내 줬을리는 없고. 도대체 어디에서 그걸…….”
-자기는 알 필요 없어.
“에일린!”
버럭 지르는 목소리에 에일린 리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내가 우리 애들 기분 좋게 한강에서 수영하고 있는 사진이랑 동영상 좀 가지고 있겠다는데, 뭐 문제 될 거 있어?
윤사해는 할 말을 잃었다. 에일린 리는 답이 없는 것이 재미있는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윤사해에게 물었다.
-그래서 애들은 괜찮아? 리오랑 리타가 갑자기 그런 기행을 벌였을 리가 없잖아?
“던전 내 새로운 식물체를 조금씩 맛봤다더군.”
-그걸 왜?
“내가 어떻게 알아? 어쨌든 지금 치료 중이다.”
-후유증이 남는다거나 그럴 가능성은? 있어?
윤사해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설마, 에일린 리의 입에서 자식들 걱정하는 소리를 들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자기야?
“아, 응. 후유증이 남는다거나 하는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말도록.”
-다행이네. 아, 참! 우리 딸한테 말 좀 전해 줄래?
“말?”
-응, 우리 딸 친구들이 얼마 전에 놀러 왔었거든. 즐거운 대화였다고 전해 줘. 소개해 줘서 고맙다고. 그럼 이만 끊을게!
뚝, 윤사해가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윤사해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다가 픽 웃었다.
“길드장님, 린 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냥, 별말 하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 리사는?”
“로비에서 놀고 계실 겁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군.”
손주 녀석들을 봐서 즐거운지, 랑야의 한껏 들뜬 기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간간이 화가 차오르는 감정도 느껴졌지만.
‘그건 사야나 우리 리사가 놀려서 그런 거겠지.’
윤사해는 정답을 맞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차웅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어깨에 하얀 두루마기 코트를 입혀 줬다.
“겁 없는 녀석들이 리오와 리타에 대한 기사를 써내면 바로 연락 놓도록. 로비에 있을 테니.”
“네, 알겠습니다.”
윤사해는 서차웅의 대답에 만족스러워하고는 곧장 집무실을 벗어나 로비로 향했다.
***
“리사, 세상아.”
“아빠!”
“아저씨!”
나는 저세상과 함께 윤사해에게 후다닥 달려갔다가 멈춰 섰다.
“아빠, 몸에서 물비린내 나.”
“크흠, 흠. 그러니?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물비린내가 나다니. 향수라도 뿌릴 걸 그랬구나.”
〖향수 좋아하시네. 그런 거 제일 싫어하는 놈이.〗
딴죽을 거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잔뜩 짜증 난 얼굴로 말했다.
“랑야, 자네는 이만 돌아가지 그러나? 할 일도 끝났는데.”
〖할 일이 끝나기는 왜 끝나?〗
랑야가 씨익 웃었다.
〖우리 손주 녀석들이 이렇게 걸음마를 뗐는데 잘 걷나 봐야지!〗
그러니까 잠시 밖에 좀 머물고 있겠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랑야에게 있어 그 ‘잠시’란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윤사해가 눈가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랑야.”
〖뭐.〗
랑야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로 듣지 않겠다는 얼굴을 보였다.
윤사해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항복 선언이었다.
나는 뚱한 얼굴로 랑야를 향해 말했다.
“랑야, 우리 아빠 좀 괴롭히지 마세요!”
〖누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냐? 애초에 나를 불러낸 건 네 아비다.〗
“그건, 리오랑 리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러냈다고 해도 밖에 있는 건 내 자유지. 혹시라도 억지로 돌려보내려고 하면 알지?〗
랑야가 각오 단단히 하라는 듯 싱긋 웃었다.
정말이지, 유치한 협박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야 언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이런 유치한 아버지를 두고 있어서.”
〖무슨 소리냐, 사야! 누구보고 유치하다는 거야!〗
“아버지요.”
사야가 무심하게 말했다.
어쨌거나 윤리오와 윤리타가 환각으로 인해 한강에서 벌인 기행은 일단락됐다.
이매망량과 각 언론사 사이에서 작은 실랑이가 몇 번 벌어진 것 같지만 무사히 수습된 것 같았다.
그리고 윤리오와 윤리타는.
“한강물, 정화 좀 해야 할 것 같아.”
“맞아, 청(淸) 가문에서 좀 나서서 한강물 좀 정화시켜야 할 것 같아.”
배앓이를 조금 했다. 한강 횡단을 벌이려고 하다 물을 조금, 아니. 꽤 많이 마셨던 모양이었다.
***
어찌 됐든 윤리오와 윤리타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은 무사히 끝이 났고, 나와 저세상의 방학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아빠, 나 친구들이랑 별장에 놀러 가고 싶은데 그래도 돼?”
나는 윤사해에게 조심스럽게 친구들과의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저세상은 지금 윤리오와 윤리타와 운동을 간답시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별장? 친구들이랑 말이니?”
“응, 왜, 그 있잖아. 강원도에 있는 거. 해바라기 가득 피는 곳에 있는 별장.”
“아…….”
윤사해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강원도에 있는 별장, 그곳은 매년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찾아가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고민하는 듯 굳은 얼굴인 그에게 우물쭈물 말했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도윤이네 집에 가서 하룻밤 파자마 파티하면서 놀게.”
“아니.”
“응?”
“그건 절대 안 돼.”
윤사해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내게 물었다.
“별장에 갈 친구들은 총 몇 명이니? 백도윤, 그 녀석은 당연히 같이 갈 테고.”
“그리고 단아!”
내게서 들린 이름에 윤사해가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단아라면, 한태극 의원의.”
“막내 손녀딸!”
윤사해는 나의 좁은 인간관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저세상의 좁은 인간관계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별장에 함께 놀러갈 친구들은 도윤이와 단아가 마지막일 거란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말씀!
“친구들이랑 언제 갈 거니? 관리인에게 미리 청소를 부탁해 놓으마.”
“정말?! 우와! 아빠, 고마워!”
나는 윤사해를 와락 끌어안으며 까르르 웃었다.
자, 그럼 허락도 받았겠다.
쇼핑 좀 하러 가 볼까?
***
쇼핑을 하러 찾은 곳은 CW의 백화점이었다. 장천의가 사라졌다고 해도 CW는 건재했다.
‘『각성, 그 후』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거야.’
현재 CW의 회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윤리타가 비나리 고등학생일 적 알고 지냈던 학생회장 언니라고 했던가?
‘장천의 못지않게 능력이 좋은가 보지.’
그러니까 CW는 몰락하지 않은 거겠지. 갑작스럽게 주인을 잃었는데도 말이야.
어쨌든 다행이었다.
CW가 주인을 잃었음에도 이렇게 우뚝 대한민국의 재계를 주름잡고 있다는 건…….
‘『각성, 그 후』의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니까. 물론, 내가 모르게 내부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거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옷부터 살까?”
이렇게 혼자서 쇼핑을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가족끼리 아니면 저세상과 함께 쇼핑을 나왔었던 나였다.
‘그런데 혼자서 쇼핑이라니!’
그것도 인터넷 쇼핑이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상품을 구매하고 즐기는 쇼핑!
‘너무 신나!’
두근두근 가슴이 설레었다.
쇼핑을 하러 가겠다는 말에 윤사해가 따라나서겠다고 했으나,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그러지 못하게 됐다.
저세상은 여전히 윤리오와 윤리타를 따라 운동 중인 것 같았고.
그래서 이렇게 혼자서 쇼핑을 나오게 된 거였다.
‘뭐, 아예 혼자는 아니지.’
분명 보이지 않는 어디에서 이매망량의 길드원들이 나를 지키고 있을 테였다.
이를테면 경호지.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경호원이 있는 게 든든하기는 했다.
나 혼자서 유랑단의 탈쟁이라도 만났어 봐. 뺨이나 한 대 때리고 죽어라 도망만 쳤을걸?
‘암만 생각해도 실전 경험이 필요할 것 같은데.’
윤사해에게 나도 오빠들처럼 싸우고 싶다고 말하면 난리 날 게 뻔하고, 그렇다고 저세상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당장 윤사해한테 일러바치겠지.’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힘 좀 길러 보겠다는데 왜 이렇게들 과보호를 하는 건지!
“에이, 몰라! 쇼핑이나 하자!”
나중에 심심하면 단아도 부르고 도윤이도 불러야지. 겸사겸사 아빠가 여행을 허락해 줬다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분명, 좋아하겠지.’
그렇게 활짝 웃으며 여행에서 입을 옷을 보고 있을 때였다.
“응?”
바캉스 기념 할인 목록을 구경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무시하고 지나쳐도 될 얼굴들이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귀신에라도 홀린 듯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야, 너희 여기서 뭐해?”
“으아악!”
“와악!”
“우와악!”
마지막으로 비명을 지른 사람은 나였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너야말로 뭐야! 놀랐잖아!”
바캉스 용품을 구경하고 있던 우신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성운은 그보다 훨씬 놀란 듯, 심장을 부여잡고는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쇼핑하러 왔지. 너희도?”
우성운과 우신우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시금 물었다.
“쇼핑하러 온 거 아니야?”
“아니, 맞아!”
우성운이 황급히 대답했다.
“어디 해변이라도 가? 로저 신부님이랑 같이 놀러 가는 거야?”
우성운과 우신우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미간을 살포시 좁히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우성운, 우신우. 사람 기분 나쁘게 무시하지 말아 줄래?”
“무시하는 거 아니거든?”
“그럼?”
우신우가 입을 다물었다.
아오, 저 자식이 또 사람 말을 무시하네?
‘내 말이나 들어라’ 스킬 좀 오래간만에 사용해보려고 할 때.
“신우는 아니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야.”
“뭐?”
“야, 우성운!”
우성운이 입을 열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이다.
“우, 우리 해변에 놀러 안 가. 이번 방학에는, 아, 아무 데도 안 가.”
우성운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바다 본 지가 오래돼서 구경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그, 그러니까 너는 신경 끄고 쇼핑이나 마저 해. 신우야, 가자.”
“잠깐만.”
나도 모르게 우성운과 우신우를 불러 세웠다.
아니, 왜 불러 세운 거야?!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나는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다가.
“바다 본 지가 오래돼서 구경하고 있었다고 했지? 그럼, 나랑 같이 바다 보러 갈래?”
반쯤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