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다가온 여름에(5)
“왜 그래, 리사?”
“아니, 저세상이 자기 반으로 잠깐 올라오라고 해서.”
나는 시계를 흘긋거렸다. 쉬는 시간 종료까지 5분.
위층인 4반까지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왜 굳이 오라고 하는 걸까?
“가보자.”
“응?”
“세상이 형이 와 보라고 했다며?”
“그렇기는 한데…….”
“그럼, 가 보자!”
도윤이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는 4반으로 함께 올라갔다.
우리 도윤이, 가만 보면 저세상을 정말 ‘형’처럼 잘 따른단 말이지.
‘형제가 없어서 그런가?’
그게 아니라면 어릴 적부터 자주 봐 왔던 탓일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우리는 4반에 도착했고.
“말 다했냐?!”
“아직 다 안 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별 볼 일 없는 빽만 믿고 설쳐대는 꼴 그만 보고 싶으니까 나대지 좀 마! 알아들었냐?!”
“뭐? 너, 이……!”
지희준과 우신우가 싸우는 광경을 맞닥뜨리게 됐다. 나는 도윤이와 함께 멍하니 있다 저세상을 찾아갔다.
“저세상, 이게 무슨 일이야?”
“보면 알잖아?”
저세상이 픽 웃으며 말했다.
“철부지 도련님이랑 철부지 도련님이었던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들이 한창 싸우고 있는 중이지.”
“그러니까 이 광경을 보라고 올라오라 한 거야?”
“응.”
저세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우신우, 참 웃기지 않아?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나자마자 나나 너한테 한 말이 그거였잖아.”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저세상이 말했다.
“엄마 없는 사람.”
그 말은 우신우가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저세상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부모도 없는 천애 고아.”
그건 저세상을 향해 놀려대던 우신우의 말이었다. 저세상이 지희준과 함께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일이란 게 참 신기하단 말이야. 별 볼 일 없는 빽만 믿고 설쳐대던 애가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다니.”
“자업자득이지, 뭐.”
그보다.
“저세상, 너 성격 진짜 나쁜 거 알지? 애들 싸우는 꼴 보라고 올라오라고 했을 줄이야.”
“너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좋아해?”
“그야, 너 우신우한테 악감정 많았잖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케케묵어 삭아 내린지 오래였다.
“내가 옛날의 어린 아이도 아니고, 저런 꼴 보면서 좋다고 싸워라 응원할 줄 알았어?”
“응.”
이 망할 주인공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저세상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먹여 줬다.
“갑자기 왜 때려?!”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리지! 너,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싸움 구경하라고 네 반으로 불렀다고!”
“그러니까 그건.”
“나 좋으라고 한 거 알아!”
나는 저세상의 말을 끊으며 빼액 소리 질렀다.
“하지만 하나도 안 좋아! 오히려 화만 난다고!”
어린 날이었다면 좋다고 이기는 편 우리 편을 외쳐댔을 거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신우는 어릴 적, 나와 저세상을 괴롭혔던 벌을 충분히 받았다.
그러니까 그가 여기에서 더욱 괴로운 일을 당하는 걸 보는 꼴은 사양이었다는 말씀.
“지희준, 우신우! 그만 싸워!”
나는 교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 질렀다.
“어린애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야?”
내 말에 지희준이 우신우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 질렀다.
“너는 꺼져! 우리 반도 아닌 주제에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거야 내 마음이지?”
나는 지희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우신우의 멱살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거 놔.”
“싫은데?”
지희준이 어디 한 번 내 힘으로 이 손을 놓아 보라는 듯이 비웃음을 한껏 입가에 걸쳤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쫘악-!
망설임 없이 지희준의 뺨을 때려 버렸다.
“우신우의 멱살을 잡고 있는 이 손, 지금 당장 놔.”
지희준의 두 눈에 일순 초점이 사라졌다. 곧, 내 앞으로 푸른 시스템 창이 떴다.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발동됩니다.】
【적용 대상은 ‘지희준’입니다.】
지희준은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다가 우신우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 줬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우신우에게 손을 건넸다.
“뭐해? 잡고 일어나.”
“응? 아, 응!”
우신우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지희준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글쎄, 무슨 짓을 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지희준을 향해 능글맞게 씨익 웃었다.
“지희준, 잊고 있나 본데. 나도 각성자야. 네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A급 못지않은 각성자.”
사실, A급 각성자보다 한 단계 더 높은 S급 각성자이기는 하지. 하지만 굳이 이 사실을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도윤아, 가자.”
“응? 아, 알겠어!”
도윤이가 황급히 나를 따랐다. 나는 그대로 4반의 문을 열어젖히고 나가려고 했으나.
“저세상.”
멈춰 서서는 저세상을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앞으로 이런 일에 나 부르지 마. 그리고…….”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각성, 그 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라는, 튀어나오려던 말을 억지로 집어 삼켰다. 그 말을 지금 이 순간에 내뱉으면 저세상과의 관계가 어그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참, 우리 주인공님께서는 어떻게 가면 갈수록 인성이 파탄나는 것 같은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가자, 도윤아. 지희준, 너는 반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헛짓거리 좀 그만해. 내가 다 부끄러우니까.”
“뭐?!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중2병 같은 짓 좀 그만하라고 했다, 왜! 불만 있으면 언제든 3반으로 쳐들어와.”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경고하듯 말했다.
“단아가 엄청 반겨 줄 테니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도윤이와 함께 4반을 나섰다.
그러기 무섭게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리는 후다닥 3반으로 달려가 자리에 앉았다.
“윤리사, 백도윤. 둘이서 어디 갔다 오는 거야?”
교무실에 반성문을 작성하러 갔던 단아가 돌아와 있었다. 나는 헤실거리며 말했다.
“잠깐 4반 좀 다녀왔어. 저세상이 불렀어.”
“나는 교무실에서 반성문을 적고 있었는데 윤리사, 너랑 백도윤은 4반에서 놀고 왔다 이거지?”
“아니, 놀고 온 건 아닌데.”
어쩌지? 단아가 삐친 것 같다.
나는 도윤이와 빠르게 시선을 교환한 후 말했다.
“단아야, 이제 곧 점심시간이잖아? 점심 먹고 편의점 가지 않을래? 내가 쏠게!”
“나도 쏠게!”
나를 따라 도윤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뚱했던 단아의 얼굴이 조금 풀린 것 같다.
우리 단아, 이럴 때 보면 애가 참 단순해서 다행이라니까.
아, 흉보는 게 아니라 칭찬하는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어쨌거나 맞이한 점심 시간.
나와 도윤이는 약속대로 편의점에서 단아가 좋아하는 과자를 왕창 사 줬다.
그런데 말이지.
“저세상, 너 왜 은근슬쩍 과자를 올려 놓는 걸까?”
“나도 사 주는 거 아니었어?”
“사 주겠냐?!”
나는 빼액 소리 지르며 저세상의 과자를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손을 막는 사람이 있었으니.
“리사야, 세상이 형 과자는 내가 계산할게.”
우리 착한 도윤이었다.
“도윤아, 저세상 너무 생각해 주지마. 그러다 애 버릇 나빠져.”
“야, 윤리사. 너 지금 내가 열아홉 살이란 걸 자꾸 잊는 모양인데.”
“네네, 내년에 스무 살인 거 아주 잘 알고 있죠. 하지만 그래서 뭐? 스무 살이라고 해도 고등학교 2학년생일 텐데?”
저세상이 내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할 말 없지?”
“그래, 할 말 없다.”
저세상이 내 이마를 꾹 누르고는 도윤이가 사 준 과자를 들고 먼저 편의점을 나가 버렸다.
나는 저세상의 손가락이 닿은 곳을 어루만지며 씩씩거렸다.
“저세상, 저 망할 새끼!”
“리사야, 세상이 형한테 ‘새끼’라니. 그러면 안 돼.”
“돼! 그치, 단아야?”
“움?”
단아가 빵빵하게 부푼 두 뺨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사 준 간식을 먹느라 우리의 대화를 못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천천히 먹어.”
“웅!”
단아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단예와 단이와 한 배에서 나온 세 쌍둥이라는 게 가끔 믿기지가 않는단 말이지.
‘뭐, 그게 단아의 매력이지만.’
나는 픽 웃고는 말했다.
“우리도 나가자. 오늘 점심 든든하게 먹었으니까 소화시켜야지.”
“응!”
도윤이가 활짝 웃었다. 단아는 여전히 간식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람에게는 식사용 배와 디저트 용 배가 따로 있다더니, 단아가 딱 그 꼴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저세상을 제외하고 운동장을 여러 번 걸은 뒤에 3반으로 향했다.
***
그리고 수업이 끝난 시간.
“리사 아가씨! 세상아!”
류화홍이 밝은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태어났어요! 우리 딸이, 아들이 태어났다고요!”
“네?”
딸이랑 아들이요?
나와 저세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류화홍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