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고하는 인사(2)
달이 기울어가는 늦은 밤, 나는 이마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빠……?”
“더 자렴.”
윤사해가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스르륵 잠이 들려고 했지만.
후웅, 작게 일어난 바람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아빠?”
윤사해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스킬이라도 사용한 건가?”
윤사해에게는 <[S, 숙련 불가] 장승 행차>라는 이동 스킬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걸 이용해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지?”
라고 고민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곧 백시진한테 생긴 일을 떠올렸다.
‘제인 아일리, 아직도 찾지 못한 걸까?’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왕 잠에서 깬 거, 부엌에서 시원한 물이나 한 잔 마시고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인영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악! 깜짝아!”
〖뭘 그렇게 놀라?〗
“불 꺼진 부엌에 웬 남자가 앉아 있는데 놀랄 수밖에 없죠!”
나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히고는 쨍하니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랑야?!”
〖네 아비를 찾으러 왔는데 잘못 찾아온 모양이야.〗
랑야가 뚱하게 말했다.
“아빠는 조금 전에 나가셨어요. 장승 행차를 이용해서요.”
〖그래, 그런 것 같군. 나한테 일은 일대로 맡겨 놓고 뭘 그렇게 쏘다니는지, 나 참.〗
“……아빠가 랑야한테 맡겨 놓은 일, 혹시 제인 선생님을 찾는 거예요?”
〖제인? 글쎄다, 이름은 모르지만 네 아비의 친구의 동생의 부인을 찾는 건 맞아.〗
제인 아일리를 가리키는 명칭 한 번 참 길었다. 어쨌거나 랑야가 제인 아일리를 찾는 건 맞는다는 말씀.
“찾았어요?”
〖아니.〗
랑야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암만 찾아도 흔적이 보이지 않아. 마치, 그때와 같은 느낌이야.〗
“그때라면 언제요?”
〖네가 사라졌을 때.〗
나는 놀란 눈을 보였다.
내가 사라졌을 때라면, 일곱 살. 선비에 의해 납치를 당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할미.’
어쨌거나 좋지 않은 일이었다.
“설마, 제인 언니가 할미의 숲에 끌려갔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그거야 모를 일이지.〗
랑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거나 나는 이만 다시 제인인지 뭔지를 찾으러 가 보마. 윤사해의 따님께서는 잠이나 자도록.〗
“그렇게 말해도요…….”
제인 아일리의 행방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랑야에게 물었다.
“랑야, 저도 같이 따라가면 안 되겠죠?”
〖네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나를 따라온다는 거야? 허튼 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
랑야가 내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먹였다.
“아야……!”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울상을 지었다.
“아빠한테 다 일러바칠 거예요!”
〖그러던가.〗
랑야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랑야가 늑대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보였다.
이내 굳게 닫힌 현관문에 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제인 아일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랑야가 말하기로는 내가 탈쟁이들에게 잡혀갔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했다.
순간 떠오른 것은 『각성, 그 후』에서의 제인 아일리가 맞이한 최후였다.
사령의 숲에서 끝내 사령에게 잡아먹혀 원혼이 되고 만 그녀는 종엔 연인이었던 백시진 역시 잡아먹고 말았었다.
아무리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이라고 하지만 참으로 끔찍한 결말이었다. 그 결말을 내가 깨부순 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애써 무시했던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초조하여 손가락 끝을 깨물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인 아일리는 괜찮을 거야.’
그녀는 비나리 고등학교의 영어 선생님 이전에 각성자였다.
‘분명, 통찰 계열의 각성자였지?’
어릴 적, 윤사해의 변장을 한 번에 알아본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제인이 정말 『각성, 그 후』에서처럼 사령의 숲에 끌려간 거라면…….’
그 힘이, 살아남는데 도움이 될까?
나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기껏 떨쳐냈던 불안감이 다시금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나가 봤자 제인을 찾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움직이고 싶었다.
어린 날에 구했던 제인 아일리였다. 그런 그녀가 다시 위험에 처했다는데 발 뻗고 얌전히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제인 아일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도윤이가 슬퍼할 게 뻔하니까.
그러니까……!
“윤리사, 이 야밤에 어디가려고.”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치켜들었다.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 손은 허공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나한테 스킬 쓰려고?”
“이거 놔, 저세상!”
“싫어. 놓으면 때릴 거잖아.”
망할, 어떻게 알았지?
나는 두 눈을 뾰족하게 뜨고는 저세상을 노려봤다. 저세상은 그런 내가 무섭지도 않은지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제인 선생님 찾으러 나가려고?”
“네가 알 거 없어.”
“리오 형이랑 리타 형 깨워도 되나 보네?”
윤리오랑 윤리타는 청해진과 만나 진탕 술을 마신 후 늦게 귀가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세상이 비명을 지른다면 바로 일어날 두 사람이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럼, 순순히 말해 주지 그래? 고래고래 소리 질러서 형들 깨우기 전에.”
치사한 자식!
나는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였다.
“제인 선생님 찾으러 나가려는 거 맞아.”
“진작 말해 줄 것이지.”
저세상이 내 손을 놓아 줬다. 나는 저세상에게 붙잡혔던 손을 어루만지고는 그에게 말했다.
“방해할 생각이라면 꺼져.”
“꺼지라니, 말이 너무 심하네.”
그렇게 말하는 저세상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가 이대로 나를 방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나 내 걱정은 기우였다.
“나하고 같이 가.”
“뭐?”
저세상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겉옷 챙겨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줘.”
“야, 저세상! 잠깐만! 같이 가자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인 선생님, 같이 찾자고. 왜, 싫어?”
싫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윤리오와 윤리타를 깨울 기세였다.
나는 결국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그가 겉옷을 챙겨 입고 나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집 밖으로 나오게 됐다.
“아저씨가 알면 엄청 놀라겠지?”
“놀라기만 할까? 우리, 엄청나게 혼날걸?”
“하긴, 그렇겠네.”
‘하긴, 그렇겠네’라니! 우리 주인공님께서는 너무 태평하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제인 선생님을 어떻게 찾을 생각이야? 이 늦은 밤에 제인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댈 생각은 아니겠지?”
“민원 신고 들어올 일 있어? 나도 생각이란 게 있거든?”
“무슨 생각?”
저세상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째 갈수록 재수 없어지는 저세상이었다.
‘『각성, 그 후』에서는 저런 성격이 아니었을 텐데.’
나는 저세상을 내려다보며 내 계책을 말해 줬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한테 도움을 요청할 거야.”
“설마, 랑야 님한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야?”
“아빠한테 들킬 일 있어?”
“그럼, 네가 아는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누가 있다고 그래?”
“한 명 있잖아.”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가람.”
저세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람이라면, 청해솔 누나와 함께 있는 이무기를 말하는 거지?”
“응.”
“그 이무기한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그러는 거야?”
“아주, 잘.”
저세상이 미간을 좁혔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람이 그랬어. 자신의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와주러 오겠다고.”
“하지만 너는 그 이무기의 계약자가 아니잖아.”
“그렇지.”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가람은 미지 영역의 거주자이지만 그 영역에 속하지 않은 거주자라는 것이다.
즉, 계약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를 자유롭게 부를 수 있다는 말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크흠, 흠! 가, 가람…? 제 말 들려요? 응답하라, 가람……!”
가람을 부르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였다. 저세상이 뭐하는 짓이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 몇 번이고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렇게 다시 가람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리사, 그리고 세상아. 이 늦은 시간에 밖에서 뭐하고 있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저세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해솔이 언니?”
“오랜만이야,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언니는 더 예뻐지셨어요.”
“칭찬 고마워. 그보다 밖에서 뭐하고 있는 거니?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청해솔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었다.
“혹시, 가출?”
“아니요!”
우리는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그게, 아빠를 찾으러 나왔어요.”
“윤사해 길드장님을? 이 시간에?”
청해솔이 못미덥다는 눈길을 보냈다. 나와 저세상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믿을까? 믿어 줬으면 좋겠는데!
청해솔의 저 고운 뺨을 때리면서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곧, 청해솔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