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고하는 인사(1)
노을이 짙게 깔린 하늘.
그 아래에서 백시진은 잔뜩 초조한 얼굴로 아내인 제인 아일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백시진은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부장에게 갈굼을 당하며 AMO 업무를 끝내고 귀가한 백시진이었다.
그런 그에게 백시준은 말했었다.
‘축하해, 시진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형수님께서 말 안 했어?’
‘무슨 말?’
‘이런…….’
그에 백시진은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 제인 아일리와 저 사이에 새 생명이 탄생했음을.
그리고 그녀가 홀로 산부인과를 찾아가 그 사실을 알게 됐음을.
어쩐지 부쩍 잠이 늘고 피로함을 자주 느낀다 싶었다. 그걸 알아차렸으면 뭐해? 한 일이 없는데.
‘멍청이!’
백시진이 그렇게 스스로에게 욕을 퍼붓고 있을 때였다.
“시진아.”
“형.”
백시진이 저를 따라 밖으로 나온 백시준에게 음울하게 말했다.
“제인과 연락이 안 돼.”
“곧 돌아오실 거야.”
백시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도 곧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제인 아일리와 전화를 끝내고 벌써 30분, 그녀는 소식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찾으러 나갔다가 올게.”
백시준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조심히 다녀와. 제인 씨 만나면 딴 길로 새지 말고 곧장 돌아오고.”
“내가 애야? 알았으니까 도윤이 혼자 두지 말고 들어가 봐.”
“알았어.”
백시준이 싱긋 웃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백시진은 곧장 제인 아일리를 찾으러 떠났다.
‘제인은 매일 같은 길로 다니니까.’
그러니 백시진은 금방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인?”
그 생각은 금방 산산이 조각나게 됐다.
수풀을 뒹굴고 있는 제인 아일리의 구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인!”
백시진이 황급히 수풀을 뒤졌다. 하지만 제인 아일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다.
손에 쥐어진 제인 아일리의 구두 한 짝, 그것이 백시진에게 남은 제인 아일리의 흔적 전부였다.
“……제인.”
내뱉은 목소리가 떨렸다.
백시진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다시 한 번 더 소리 질렀다.
“제인!”
애타게 부른 목소리에는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경찰에 신고는?”
나는 저세상과 함께 간식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제인 아일리가 윤리오한테 사 줬다는 간식은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그래서 윤리오와 윤리타가 청해진을 만나러 간다고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이렇게 먹고 있는 거였는데.
“단순 가출?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더욱이…….”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던 윤사해가 나와 저세상을 흘긋거리고는 자리를 옮겼다.
나는 에그 타르트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보니까 시준이 아저씨한테 전화가 걸려 온 것 같던데.”
“시준이 삼촌한테?”
나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백시진 아저씨가 가출이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백시진이 제인 아일리만 두고 집을 나갈 리가 없었다.
“그럼, 무슨 일이지?”
경찰에 신고할 만한 일, 경찰 측에서 단순 가출이라고 치부할 만한 일.
나는 어렵지 않게 무슨 일이 생긴건지 유추할 수 있었다.
“백시진이 실종이라도 됐나……?”
저세상이 표정을 굳혔다. 나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에이, 그냥 해 본 말이야! 별일 아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저세상이 잔뜩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답하는 목소리였다.
‘괜히 말했다.’
그렇게 속으로 혀를 찰 때였다.
쾅쾅, 누군가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윤사해 길드장님! 저 백시진입니다! 윤사해 길드장님!”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종된 줄 알았던 백시진이 멀쩡히 나타나 남의 집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려댔기 때문이다.
저세상은 놀란 눈으로 현관 쪽을 바라봤다. 한없이 어두웠던 낯빛은 조금 밝은 빛을 띄고 있었다.
백시준과 전화를 나누고 있던 윤사해는 짧게 혀를 찼다.
“백시준, 잠깐 끊지. 네 동생이 나를 찾아온 것 같으니. 때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끊어.”
뚝, 전화를 끊은 윤사해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윤사해를 따라갔다.
“아빠, 백시진 아저씨가 왜 찾아온 거야?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단다. 가서 세상이랑 같이 간식 먹고 있으렴.”
윤사해가 애써 미소를 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암만 생각해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윤사해 길드장님!”
그것도 아주 심각한 일이.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윤사해가 현관문을 연 뒤에야 그쳤다. 윤사해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백시진을 반겼다.
“백시진 팀장, 상황은 들었네. 하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찾아오는 건 곤란하네.”
백시진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는 다소 겁에 질린 얼굴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급해서 그랬습니다. 제인이……!”
“알고 있네.”
윤사해가 차갑게 백시진의 목소리를 끊고는 말했다.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아무래도 제인 아일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이내 탁, 닫힌 현관문에 나는 저세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인 선생님께서 실종되셨나 봐.”
저세상이 미간을 좁혔다.
“제인 선생님, 오늘 오후에 조퇴하셨었지?”
“응, 하지만 그때부터 실종됐던 건 아닐 거야.”
제인 아일리는 길드 일을 끝내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갔던 윤리오에게 간식을 사다 줬으니 말이다.
“제인 선생님,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저세상이 굳게 닫힌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라면 제인 선생님을 금방 찾아내실 테니까.”
우리 주인공님께서는 윤사해를 너무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아, 아빠라면 제인 선생님을 금방 찾아 내겠지.”
그러니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면서 말이다.
***
뚝, 뚝.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제인 아일리의 뺨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인 아일리를 유심히 살펴보던 남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할미 님, 할미 님! 이 여자 홀 몸이 아닌데요?”
“그래?”
푸석한 검은 머리칼을 손으로 다듬고 있던 여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그렇게 저항을 했던 거구나. 살려 달라고.”
윤설아, 제인 아일리에게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던 ‘할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인, 일어나 봐요. 당신을 위해 기껏 마련한 무대인데, 이렇게 자고 있을 거예요?”
날카로운 손톱이 제인 아일리의 뺨을 콕콕 눌렀다. 그 손길에 제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으음…….”
제인 아일리가 앓는 목소리를 내고는 두 눈을 떴다.
“서, 설아?”
“안녕하세요, 제인.”
“설아!”
제인 아일리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윤설아의 두 팔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일 것 같나요?”
윤설아가 여상하게 웃으며 제인에게 물었다. 그 순간 제인 아일리의 눈에 포착된 것이 있었다.
“탈……?”
할미의 뒤로 보이는 탈.
그건 분명 ‘유랑단’의 아홉 탈이 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서, 설아. 도대체 왜 탈과 함께.”
“있느냐고요?”
윤설아가 씨익 웃었다.
“그야, 저 역시 탈이니까요.”
윤설아는 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곧장 그것을 제 얼굴 위에 덮어쓴 윤설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할미. 그게 저랍니다.”
제인 아일리가 희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거…… 거짓말.”
“이런, 제인. 가엾어라. 현실을 외면하는 거예요?”
할미는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그녀는 손가락 끝을 들어 제인 아일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어쩌나, 당신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은 모두 현실일 텐데.”
딱, 손가락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바뀌었다.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던 동굴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수풀이 잔뜩 우거진 숲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익, 킥킥.
-꺄하하.
-놀자… 같이 놀자…….
제인 아일리가 흠칫, 몸을 떨고는 제 배를 감싸 쥐었다.
“서, 설아…….”
“안녕, 제인.”
“설아! 안 돼! 가지 마요, 가지 마!”
설아!
외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백정과 함께 자리를 옮긴 할미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재미있어. 제인이 며칠이나 버틸까?”
“며칠이라고 갈 것도 없이, 하루면 끝날 것 같은데요.”
“그렇게 생각해?”
할미가 키득거렸다. 그녀는 얼굴 위에 뒤집어썼던 탈을 벗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에 백정 탈을 쓰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여자한테 무슨 특별한 힘이라도 있나 보네요.”
“특별한 힘이라…….”
할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모르겠지만, 우리 제인은 눈이 좋거든.”
나처럼.
할미가 키득거리며 제 붉은 눈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