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달갑지 않은 인사(8)
점심시간, 학교를 나서던 도하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어떻게 아냐고?
오늘 제인 아일리 선생님이 급하게 자리를 비우면서 영어 수업을 대신 맡았었거든.
“엄청 끔찍했어.”
“맞아, 진짜 끔찍했어.”
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수업 안 해서 좋았잖아.”
“그건 그렇지마는!”
수업 대신 만난 사람이 도하선이란 게 문제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도윤이에게 물었다.
“도윤아, 제인 선생님은 무슨 일로 자리를 비운 거야?”
“그건 나도 모르겠어.”
도윤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심각한 일로 자리를 비운 건 아닐 거야. 그랬다면 삼촌이 제인 누나를 데리러 왔을 테니까.”
꿀이 떨어지는 신혼 생활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교문을 나오는데.
“도윤아.”
“아빠? 아빠!”
백시준이 보였다.
일 때문에 외국으로 출장을 나간 지 수년이라 못 본 지 오래됐었는데.
“삼촌, 오랜만이에요!”
“그래, 리사. 오랜만이구나. 안 그래도 주변 좀 정리하고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딱 만났네?”
“도윤이랑 같은 반이니까요!”
내 말에 백시준이 방긋 웃었다.
“도윤이랑 하교 중이었니? 세상이나 다른 애들은?”
“4반 애들은 오늘 좀 늦는대요. 반 애들 중 한 명이 사고 쳐서 다 같이 벌 받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사고를 친 그 녀석은 지희준이었다.
전에 급식소에서 만났던 비각성자 친구를 괴롭히다가 4반의 담임 선생님한테 걸린 모양인 듯했다.
‘아주 된통 혼나라.’
어쨌든.
“제인 선생님 일로 도윤이 데리러 온 거예요?”
“응, 어떻게 알았니?”
“선생님께서 급하게 자리를 비우셨으니까요.”
그리고 제인 아일리는 백시진과 함께 여전히 백시준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들었다.
“제인 선생님, 어디 아프시거나 그런 거예요?”
“아니, 그런 일은 아니야. 오히려 좋은 일 때문에 도윤이를 데리러 온 거란다.”
“좋은 일이요?”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윤이도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시준에게 물었다.
“아빠, 좋은 일이라니요?”
“집에 가 보면 알 거야.”
백시준은 나와 단아에게 인사하고는 도윤이를 데리고 떠났다.
“좋은 일이라니 뭘까?”
“글쎄.”
백시준 앞에서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던 단아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백도윤 아저씨는 예나 지금이나 늙지를 않는 것 같아. 우리 할배는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푸훕!”
나도 모르게 터트린 웃음이었다. 나는 황급히 헛기침을 두어 번 터트리고는 말했다.
“단아네 할아버지, 아직 정정하시잖아? 그보다 이렇게 된 거, 4반 애들 마칠 때까지 기다리자.”
“그래도 돼?”
“응, 아니면 단아 혼자서 단예랑 단이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 저세상도 기다릴 겸 같이 저기 벤치에 앉아 있자.”
“응!”
단아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렇게 우리는 4반 친구들이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4반 친구들은 비나리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후에야 교문 밖으로 나왔다.
다들 지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가운데에서 저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야! 저세상!”
“윤리사?”
저세상이 놀란 얼굴을 보였다.
“백도윤이랑 같이 하교한 줄 알았더니?”
“도윤이는 시준이 삼촌이랑 먼저 갔거든!”
“그래서 한단아랑 같이 나 기다린 거구나?”
단아는 단예와 단이한테 왜 이렇게 늦었냐면서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자, 어서 집에 가자. 오늘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 일찍 돌아온다고 했잖아.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응.”
저세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가방을 대신 챙겨 들었다. 나는 한태극네 세쌍둥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단아야, 단예야, 단이야! 우리는 이만 가 볼게! 내일 만나!”
“잘 가, 리사.”
“저세상! 윤리사 잘 챙겨!”
단아의 말에 저세상이 픽 웃었다.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잘 챙기거든?”
누가 누구를 챙긴다는 거야?
어찌 됐든 우리는 집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다다른 집에서.
“윤리사, 저세상!”
다녀왔다고 인사하기도 전에 윤리오의 벼락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전화는 또 왜 안 받아!”
그야, 단아랑 같이 4반 애들 기다릴 때 신이 나게 휴대폰 게임 했었거든. 그러니까 그 탓에 배터리가 다 돼서 전원이 꺼져 버렸다는 말씀.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휴대폰 사 줬더니 게임만 하는 거냐면서 잔소리 날아올 게 뻔하니…….
“미안해, 리오 오빠! 오늘 아침에 충전시키는 걸 깜빡했지 뭐야? 하교할 때 전원이 꺼져 버려서 연락할 수 없었어!”
나는 두 손을 합장한 후 고개를 숙였다. 저세상도 나를 따라 두 손을 합장하며 고개 숙였다.
“그게, 오늘 같은 반 친구가 사고를 쳐서요. 그것 때문에 다 같이 혼이 난다고 하교가 늦었어요. 윤리사는 저 기다리다가 같이 늦은 거고요. 그러니까!”
“혼내려면 너만 혼내라고?”
윤리오의 날카로운 물음에 저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이다.
윤리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세상아, 내가 혼내기는 왜 혼내?”
“그치만…….”
저세상이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였다. 윤리오는 그런 저세상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너희가 하도 안 돌아와서 걱정돼서 그런 거야.”
“맞아, 너희 안 돌아온다고 윤리오가 엄청 난리였거든. 경찰에 신고를 해야한다니 뭐니 얼마나 난리던지.”
“시끄러, 그러는 너는 청해진 불러서 애들 찾으러 가려고 했잖아?”
“내가 언제!”
윤리타가 빼액 소리 질렀다. 윤리오는 그 목소리를 간단히 무시하고서 말했다.
“그보다 리사도 세상이도 배고프지? 간식 만들어 줄 테니까 둘 다 어서 손 씻고 거실에 앉아 있어.”
“네에!”
나는 활짝 웃으며 욕실로 달려갔다. 저세상 역시 윤리타한테 가방을 넘기고는 제 방의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손을 씻고 나오니 맛난 간식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에그 타르트에 딸기 타르트, 여기에 초콜릿 케이크까지!
“리오 오빠, 이걸 다 만든 거야? 그 짧은 시간에?”
“아니, 오는 길에 제인 선생님을 만났었거든. 선생님께서 사 주신 거야. 기분이 많이 좋아 보이시더라고. 좋은 일이 있나 봐.”
“시준이 삼촌도 그러더니, 진짜 무슨 일이지?”
어쨌거나 이렇게 맛난 간식을 공짜로 먹을 수 있게 되다니!
“잘 먹겠습니다!”
나는 기분 좋게 딸기 타르트를 베어 물었다. 윤리오가 저세상에게 에그 타르트를 쥐여 주며 말했다.
“내일 제인 선생님께 잘 먹었다고 꼭 인사 드려야해. 알겠지?”
“응!”
겸사겸사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도 물어봐야겠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제인 아일리가 윤리오에게 간식을 한가득 사 준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질 줄은.
***
웅, 우웅-!
울리는 진동에 집으로 돌아가던 제인 아일리가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자기?”
-제인, 지금 어딥니까?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는 몇 달 전 결혼식을 올린 남편의 것이었다.
제인 아일리가 눈앞에 남편인 백시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웃는 낯으로 말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에요. 돌아가던 길에 리오를 만나서요. 이것저것 사주다 보니 시간이 늦었네요.”
-데리러 가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곧 집인걸요?”
제인 아일리가 황급히 백시진을 말렸다. 하지만 백시진은 이미 겉옷을 챙긴 양 굴었다.
-집 앞이라고 해도 데리러 가겠습니다. 홀몸도 아니잖아요!
그 말에 제인 아일리가 눈웃음을 지었다.
요 며칠 몸이 이상하기는 했었다.
잠이 부쩍 늘었다거나,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해진다거나 하는 등.
하지만 일이 많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임신이라니.’
오늘 급식으로 나온 것에 구역질을 한 것이 이상하여 찾아간 산부인과였다.
그런데 듣게 된 것은 제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는 말이었다. 제인 아일리가 괜히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자기. 알겠죠?”
-하지만…….
“다 왔어요, 끊을게요! 사랑해요, 자기!”
-제인, 잠깐만요! 제인!
제인 아일리는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뚝 끊어 버렸다. 우웅, 다시 진동이 울렸지만 제인 아일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투덜거렸다.
“시준 씨한테 괜히 알렸어!”
산부인과를 나온 후, 들뜬 마음에 백시진한테 전화를 걸었었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일이 바쁘겠거니 하여 다시 전화를 건 사람은 백시준.
백시진과 결혼하면서 그녀의 ‘아주버님’이 된 그지만, 백시준은 평소처럼 부르라면서 미소를 그렸었다.
어쨌거나 제인 아일리는 그대로 집에 들어가려고 했다.
“제인.”
저를 부르는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설렌 마음을 가득 안고 엘리베이터에 올라갔을 테다.
“……누구?”
“나예요, 제인.”
제인 아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여자였다.
푸석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틀어 올린, 붉은 눈을 가진 여자. 제인 아일리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놀라 외쳤다.
“설아? 윤설아, 맞죠?!”
불린 이름에 여자가 싱긋 미소를 그렸다.
“오랜만이에요, 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