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달갑지 않은 인사(7)
다행히도 그 목소리의 주인은 도하선이 아니었다.
“화백이 오빠!”
비나리 고등학교에서 교생 실습 중인 최화백의 것이었다. 반갑게 인사하는 내 목소리에 최화백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오빠가 아니라 선생님.”
“네, 쌤! 엄청 오랜만인 것 같네요!”
“그야, 비나리 고등학교에 교생으로 온 첫 날 이후로 너희를 보러 간 적이 없으니까.”
자랑인가 싶었다.
다른 반의 부담임 선생님들께서는 담임 선생님 못지않게 이것저것 챙겨 준다고 하던데 말이지.
“그나저나 선생님, 오늘 엄청 피곤해 보이시네요.”
“수업 준비할 게 너무 많아서. 3학년 자식들, 얌전히 길드나 들어갈 것이지 왜 미술을 전공으로 한다고 난리인 건지.”
최화백이 짧게 혀를 찼다.
단예가 짜증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은 진 선생님 보조만 해주면 되는 거 아니세요?”
최화백은 미술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교생이었다.
미술 수업을 전담하는 선생님을 도와 수업을 준비하고 참관하면 된다는 말씀.
하지만 최화백은 내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진 선생님 다음 주까지 병가거든.”
“아하, 그러니까…….”
“내가 다음주까지는 미술 수업을 완전히 담당하게 됐다는 거지.”
그 말에 나는 입술을 오므렸다. 최화백이 왜 이렇게 피로에 찌들어 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파이팅.”
“그래, 마음에 없는 소리라고 해도 고맙다.”
최화백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에 저세상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선생님, 저쪽에 자리 있는데요.”
“알아.”
“아는데 왜 윤리사 옆에 앉으시는 거예요?”
“여기가 가까워서.”
저세상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화백 쌤 많이 피곤하신가 봐. 우리가 저쪽으로 자리 옮기자.”
그렇게 일어나려고 하는데.
“도하선 선생님 말이야.”
최화백이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도 내가 비나리 고등학교에서, 아니.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선생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나는 미간을 좁혔다.
“도하선 선생님은 갑자기 왜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뭐 본 거라도 있어요?”
내가 물은 건, 도하선에 대한 미래였다. 최화백은 상대방의 미래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최화백 역시 내 질문에 담긴 뜻을 파악했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글쎄, 도하선 선생님에 대한 미래를 한 번 그려 보려고는 했는데.”
“그런데요?”
“그냥 검게 칠해지기만 했어.”
“그게 무슨 소리세요?”
내가 던진 질문이 아니다. 조금 전 최화백에게 물은 사람은 저세상이었다. 저세상의 질문에 최화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 그대로 도하선 선생님의 미래는 까맣게 칠해지기만 했다고.”
그 말에 저세상이 표정을 굳혔다. 최화백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뭐,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선생님. 아주 지독한 비각성자 차별주의자 같더라고. 본인 역시 비각성자인데 말이야.”
“뭐라고요?”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세상 역시 나와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단예는 알고 있던 눈치였다.
최화백이 나와 저세상을 보곤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뭐야, 너희 몰랐어?”
“네, 몰랐어요!”
비나리 고등학교의 선생님 중 비각성자가 여럿 있는 건 안다. 하지만 설마 도하선이 비각성자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저세상한테 그딴 식으로 군 거야?’
같은 비각성자면서?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최화백이 나와 저세상을 보고는 뺨을 긁적였다.
“괜히 말했나? 한 귀로 흘려 버려. 어쨌든 그 선생님 괜히 자극하지 마. 찍히면 골치 아파질 거야.”
“이미 찍혔는데요.”
나는 뚱하게 말했다.
“저런, 윤사해 길드장님한테 내가 대신 말해 줄까? 아님, 우리 고모한테 이야기 대신 전해 줘?”
사실, 최화백이 그래 줬으면 해서 그에게 도하선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아이들 싸움에 어른들 끼는 거 아니잖아요?”
“도하선 선생님은 어른인데?”
“애처럼 구니까 아이예요.”
내 말에 최화백이 피식 웃었다.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야.”
최화백이 그렇게 말하고는 벤치에 늘어졌다.
“쌤, 그렇게 주무실 거예요?”
“응, 광합성 좀 할래.”
광합성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다.
“알겠어요, 쌤, 하지만 수업에 늦지 않게 들어가셔야 해요?”
“학생이 선생 걱정을 다하고, 세상 참 좋아졌어.”
나는 웃어넘기며 저세상과 단예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그대로 비어 있는 벤치에 가려고 했지만, 때를 맞춰 도윤이와 단아가 돌아왔다.
“야아! 밖에 더우니까 교실 가자! 백도윤이 너희 간식도 샀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단아 옆으로 빈털터리가 된 도윤이가 애매하게 웃고 있었다. 저세상이 쯧, 혀를 찼다.
“백도윤, 저 멍청이.”
“도윤이가 왜 멍청이야?”
“사 달라는 대로 족족 사주니까 멍청이지. 지금도 뻔해, 한단아가 분명 우리 것도 사야 한다고 백도윤을 닦달했겠지.”
그렇게 보이기는 했다.
저세상은 구시렁거리며 도윤이와 단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거절할 줄도 알아야지, 백도윤 쟤는 어릴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애가 왜 저렇게 착한 거야?”
“그건 인정.”
내 말에 단예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단예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도윤이가 멍청할 정도로 착하다는 것에 인정하는 눈치였다.
어찌 됐든 그렇게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어, 도하선이다.”
교문 밖을 나가는 도하선이 보였다. 지금이 암만 점심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저렇게 혼자 교문 밖을 나가다니.
“급한 일이라도 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저세상이 말했다.
“병원이라도 가나 보지. 윤리사, 네가 말했잖아. 도하선 선생님 어디 아프신 것 같다고.”
“아하.”
두통 때문에 병원이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진 선생님처럼 저대로 병가 냈으면 좋겠어.”
“동감.”
저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는 사이, 도하선은 교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저대로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나 참, ‘윤리사’에 빙의되기 전 19살이었던 나인데 여전히 생각하는 게 어리다 싶었다.
어쩔 수 없지. 이게 다 <[F, 숙련 가능] 윤리사는 미운 ?? 살>이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
윤리사가 그렇게 친구들과 교실로 돌아갈 때, 비나리 고등학교를 나선 도하선은 인적 드문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가야 해.’
곧 그분과의 약속 시간이었다.
하지만 도착한 공원, 도하선의 약속 상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도하선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선생님!”
그 역시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고등학교의 선생님이면서, 그는 애타게 ‘선생님’을 찾았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하선이 애타게 찾던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여기 있는데.”
“선생님!”
도하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선생님은 여자였다.
곱슬기 도는 푸석한 검은 머리칼을 아래로 늘어뜨린, 붉은 눈을 가진 여자.
도하선이 그녀의 발밑에 무릎 꿇고 앉고는 말을 더듬었다.
“저, 저와의 약속을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아니, 저를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랬어?”
여자가 도하선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잊어 줬으면 했나 보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하선이 펄쩍 뛰었다.
“제게는 선생님뿐인 걸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장난이었어, 화내지 마렴.”
여자의 붉은 눈이 휘게 접어졌다.
“자, 그럼 약을 줘야겠지? 다 떨어졌을 거 아니야.”
“그, 그렇습니다. 지난주에 이미 다 떨어져서 선생님과의 만남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 그랬구나.”
도하선이 맞다면서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키득거리며 웃고는 도하선에게 약병 하나를 쥐어 줬다.
“자, 하루에 한 알. 그보다 많이 복용하면 알지?”
여자가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도하선의 이마를 쿡쿡 눌렀다.
“네 머리가 깨지고 말 거란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도하선은 여자에게서 약을 받아먹게 된 후로, 단 한 번도 적정 복용량을 지킨 적이 없었다.
여자는 그 사실을 안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도하선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말했다.
“그래, 내 말을 잘 들어야 다음에도 또 약을 얻어먹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도하선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여자는 그런 그를 보며 히죽거렸다.
“하루빨리 각성자가 돼서 너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복수해야지? 그리고 너와 똑같이 약한 녀석들을 네 좋을 대로 굴리는 거야.”
어때, 재미있겠지?
나긋하게 덧붙이는 목소리에 도하선은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하선아.”
여자가 도하선이 보이고 있는 웃음을 손가락 끝으로 슬며시 누르며 목소리를 내었다.
“내 말, 잘 들어주렴. 너는 착한 아이이니.”
“……네, 선생님.”
도하선은 여자에게 받은 약병을 꼭 끌어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