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달갑지 않은 인사(6)
비나리 고등학교에서 내가 아는 한 ‘도하선’라는 이름은 한 사람뿐이었다.
사사건건 내게 태클을 걸고 있는 역사 선생님.
“윤리사.”
옆 침대에 있던 단아가 소곤거리며 나를 불렀다. 단아 역시 ‘도하선’이 자신이 아는 그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단아야, 쉿.”
나는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하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통이 심해서 말입니다. 약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병원은요?”
“아직요.”
“병원 좀 가 보세요, 선생님! 작년에 학교 오신 후로 계속 두통에 시달리고 계시잖아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도하선은 약을 받고 양호실을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뚝 끊겼다.
‘갑자기 왜?’
괜히 불안감이 엄습하여 두 눈을 데굴 굴리는데 양호 선생님이 도하선에게 물었다.
“두통 약 말고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학생 두 명이 양호실에 와 있을 텐데 보이지가 않아서요.”
“아아, 리사랑 단아 학생 말이죠? 아이들은 지금 저기 안쪽에서 자고 있어요. 많이 아픈 모양이더라고요.”
“흐음.”
도하선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를 잠시 흘리고는 말했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탁, 닫힌 문에 나는 단아와 함께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망할 도하선!”
“단아야, 쉿! 양호 선생님이 들으면 어쩌려고!”
“흥!”
단아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잔뜩 심통이 난 그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거나 우리는 양호실에서 꿈만 같은 휴식 시간을 취했다.
도하선의 수업을 땡땡이친 건 물론, 점심시간을 울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아주 단잠을 잤단 말이지!
“흐아암.”
단아가 양호실을 빠져나오면서 크게 하품했다. 나는 두 팔을 쭉 늘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대로 도윤이와 4반 친구들을 찾아 교실로 올라가려는데.
“리사야, 단아야! 아픈 건 괜찮아? 다 나았어?”
“도윤아~!”
때를 맞춰 도윤이가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도윤이의 걱정에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응, 아픈 건 괜찮아.”
애초에 아픈 적도 없었다. 그건 단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아니, 아직도 아파. 그것도 엄청.”
태연하게 도윤이에게 거짓말을 쳤다. 정말 엄청 아프다는 듯이 울상을 지으며 말이다.
우리 순진한 도윤이는 그대로 속고 말았다.
“헉! 단아야, 괜찮아?! 양호실에 좀 더 누워 있어! 내가 매점에서 네가 좋아하는 거 다 사 올게!”
“정말?”
보통 이럴 때면 ‘마음만 받을게’라는 말이 나와야하지만…….
“그럼, 점심 먹고 편의점에서 메론빵 좀 사 줘. 바나나 우유도.”
“저, 점심 먹고?”
“응, 오늘 스파게티 나오는 날이잖아. 그거 먹고 네가 사주는 메론빵에 바나나 우유도 먹으면 아픈 게 싹 나을 것 같거든.”
도윤이가 땀을 삐질 흘렸다. 하긴, 그럴 수밖에. 도윤이는 한 달 용돈이 5만원도 안 됐다.
충분히 넉넉한 형편인데도 그랬다.
“왜? 못 사 줄 것 같아?”
단아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물었다. 못 사 줄 것 같다고 말하면 아주 큰일이 날 눈빛이었다.
결국, 도윤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사 줄 수 있어.”
아이고, 도윤아! 그렇게 착해서 이 험난한 사회를 어떻게 이겨내려고 그래!
어쨌거나 메론빵과 바나나 우유를 얻어 먹게 된 단아는 싱글벙글했다. 도윤이는 울지 못해 웃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리사야, 너도 사 줄까?”
“아니, 나는 괜찮아.”
나도 사 달라고 하면 도윤이는 더는 웃지 못하고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윤이는 내 말에 크게 안도하는 얼굴을 보였다. 그때, 단아가 불퉁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보다 4반은 오늘도 수업 늦게 마치나 보네. 우리끼리 점심 먹으러 가면 안 돼?”
“조금만 기다려 보자.”
단아를 달래는 그 순간.
“윤리사.”
“저세상! 오늘 수업 일찍 마쳤나 보네? 단예랑 단이는?”
“수학 선생님한테 물어볼 것 있다면서 먼저 가래. 그보다 너, 아팠다며? 괜찮아?”
“응, 괜찮아.”
말했듯, 애초에 도하선의 수업을 피하기 위해 꾀병을 부린 거라 아픈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단아는 이번에도 연기를 시작했다. 저세상한테도 편의점에서 간식을 얻어먹을 모양이었다.
“저세상, 나는 안 괜찮아. 온몸의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아.”
그렇지만 저세상은 도윤이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 것 치고는 괜찮은 것 같은데? 온몸의 내장이 뒤틀리면 그렇게 두 다리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없거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단아가 연기를 집어치우고 빼액 소리 질렀다. 저세상은 그런 단아를 향해 비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자.”
그러고는 홱, 몸을 돌려버렸다. 단아가 그 뒷모습을 보며 씩씩거렸다.
“저세상, 진짜 짜증나!”
“단아야, 착한 네가 참아.”
단아가 내 말에 두 뺨을 부풀렸다. 나는 귀엽기 그지없는 그 얼굴에 도윤이와 함께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단아가 도윤이를 콕 골라 꼬집었다.
“백도윤, 웃지 마!”
“악! 리사도 같이 웃었는데!”
도윤이가 앓는 목소리를 냈지만 단아는 가볍게 그를 무시하며 저세상의 뒤를 따라 급식소로 향했다.
나는 울상 가득한 도윤이를 달래며 그 뒤를 따랐다.
점심으로 나올 스파게티를 한껏 기대하면서 말이다.
***
“스파게티, 생각보다 맛없었어.”
나는 뚱하게 말했다. 저세상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는 단아와 함께 메론빵과 바나나 우유를 사러 갔다. 단예와 단이는 뒤늦게 점심을 먹는 중이었고.
그러니까 지금 나는 저세상과 단 둘이 벤치에 앉아 있다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학교에서 저세상과 단 둘이 있는 건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집에서는 맨날 같이 있는데…….
나는 물끄러미 저세상을 쳐다봤다. 저세상이 내 시선을 느끼고는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왜 그렇게 봐?”
“그냥, 새삼스러워서.”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우리 주인공님께서는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웃지 마.”
“왜?”
“너 웃는 거 못생겼거든.”
이 새끼가.
나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저세상을 노려봤다. 그런 내가 무섭지도 않은지 저세상은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내가 아주 못생겼다면서 말이다.
망할 주인공 같으니라고.
나는 구긴 얼굴을 애써 풀고는 뚱하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도하선 아픈가 보더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양호실에 찾아왔더라고. 꽤 자주 찾아오는 것 같았어.”
“그래? 아프다니 다행이네.”
“다행이라니?”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 질문에 저세상이 픽 웃으며 말했다.
“아프지 않고서야 너를 그렇게 못 살게 구는 게 말이 안 됐으니까.”
“도하선은 너도 못살게 굴었잖아.”
“나는 괜찮아. 그런 인간 수도 없이 봤었으니까.”
나는 말없이 저세상을 쳐다봤다.
저세상이 봤다는 도하선과 같은 인간은 『각성, 그 후』에서 만났던 인간들일 거다.
그야, 윤사해의 보호 아래에서 저세상에게 감히 도하선과 같이 구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있잖아, 저세상. 우리 알고 지낸 지 이제 10년이 다 된 거 알아?”
“응, 알아. 내가 아홉 살 때 너를 만났으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느냐는 듯이 저세상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 저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각성, 그 후』의 결말을 알지 못한다. 소설이 끝을 보기 전에 이 세상에 ‘윤리사’로 빙의를 해 버렸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윤리사?”
저세상은 알 거다. 『각성, 그 후』가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그러니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채 내 앞에 이렇게 있는 거겠지.
“왜 갑자기 나를 그런 눈빛으로 봐? 불쾌하게.”
“내가 어떻게 봤다고?”
“불쌍하다는 식으로 봤잖아. 어릴 때처럼.”
“내가 언제? 그보다 어릴 때 그런 식으로 너를 본 적 없거든?!”
“아니, 있어.”
저세상이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설사, 아니라고 해도 나는 그렇게 느꼈어.”
“……순 억지를.”
나는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 말을 끝으로 나와 저세상 사이에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을 이어가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사야, 세상이 오빠.”
“단예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점심 벌써 다 먹었어?”
“응, 거기서 뭐하고 있었어?”
“그냥 대화.”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단이는?”
“매점 갔어. 스파게티가 첫째의 입에 맞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그래? 도윤이랑 단아 만나겠네. 걔네도 매점 갔거든.”
“셋째가 도윤이에게 간식이라도 사 달라고 했나 보구나.”
헐, 어떻게 맞췄지?
나는 놀란 눈으로 단예를 쳐다봤다. 단예는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나와 저세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셋째, 오늘 지갑 안 들고 왔거든.”
“아하.”
“그보다 리사, 점심 맛있게 먹었니?”
“아니.”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단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방긋 웃고는 저세상에게 물었다.
“세상이 오빠는요?”
“너는 맛있게 먹었어?”
“네.”
저세상이 할 말이 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가 단예에게 던진 물음은 ‘너 같으면 맛있게 먹었을 것 같냐’라는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쌤통이다.’
남몰래 키득거리며 웃을 때였다.
“너희, 거기서 뭐하고 있어?”
피로감에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