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달갑지 않은 인사(1)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윤사해가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윤리오가 끓여 준 콩나물국으로 해장 후 이매망량에 출근했지만 윤사해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숙취로 앓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장천의, 최설윤.’
윤사해가 어젯밤, 아이들과의 시간을 방해한 두 사람을 떠올리고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보다 어젯밤, 도대체 언제 잠들었던 거지?’
장천의와 최설윤이 언제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윤사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가를 찡그렸다.
‘떠올리면 안 될 것 같은데.’
날아간 기억을 그대로 잊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한껏 찌푸린 얼굴에 서차웅이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였다.
“길드장님, 정 불편하다면 광혜원 헌터를 불러 진찰을 받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정도는 아니네.”
“뭐가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타이밍 좋게 광혜원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보아하니 숙취에 고생 중인 것 같군. 술 냄새가 진동을 해.〗
“그래요, 랑야 님?”
광혜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에 랑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처럼 코가 좋지 않고서야 너는 못 맡을 거다. 그보다 윤사해.〗
랑야의 말에 제게서 정말 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고 있던 윤사해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류화홍, 그 자식. 어디 갔는지 불어 줬으면 하는데.〗
“류화홍 헌터는 왜…….”
그러고 보니 류화홍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윤사해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는 말했다.
“아침부터 안 보였던 것 같은데, 류화홍 헌터한테 또 무슨 소리를 한 건가?”
랑야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별소리는 안 했어. 가랑이 사이를 터트려 버릴 거라고 하니 후다닥 도망가더군.〗
윤사해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류화홍 헌터 좀 그만 괴롭히게. 서로 좋아해서 결혼하고 애도 가진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가?”
〖오호라, 너 역시 류화홍 그 자식이 귀한 우리 딸에게 헛짓거리를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지?〗
“헛짓거리라니…….”
윤사해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랑야는 잔뜩 화난 얼굴이었다.
윤사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했다.
“일단 미지 영역으로 돌아가지 그러나? 류화홍 헌터가 돌아오면 다시 불러 주지.”
〖내가 너의 뭘 믿고?〗
“랑야, 제발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되겠나?”
윤사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랑야가 성난 목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거주자의 계약자는 거주자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함께 느끼는 탓에 그런 것이었다.
랑야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윤사해를 보고는 결국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빌어먹을. 류화홍, 그 자식 돌아오면 당장 나를 불러. 알겠나?〗
“알겠네.”
랑야는 그 대답에도 몇 번이나 류화홍이 돌아오면 저를 부르라고 신신당부했다.
“알겠다니까!”
윤사해가 화를 낸 후에야 랑야는 미지 영역으로 돌아갔다. 사라진 그의 모습에 윤사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서차웅이 윤사해에게 차가운 물 한 잔을 내밀었다. 윤사해는 고맙다며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광혜원은 그에 키득거렸다.
“왜 웃지, 광혜원 헌터?”
“재미있어서요. 서로 좋아해서 결혼하고 애도 가진 거라니!”
“맞는 말이지 않나?”
윤사해가 입가를 닦고는 물었다. 광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길드장님께서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윤사해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에일린 리, 제 전부인과는 확실히 그랬기 때문이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네 엄마가 덮쳤단다.’
윤사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누구를 덮쳐? 아니, 그보다 이 기억은 뭐지?
윤사해가 혼란스러워할 때,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덮쳤지.’
윤사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길드장님? 왜 그러십니까?”
윤사해는 서차웅의 걱정에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고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바야흐로 흑역사가 갱신되는 순간이었다.
***
“아빠는 일 잘 하고 있을까?”
“그러게, 숙취로 고생하고 계실 것 같은데 걱정이네.”
비나리 고등학교로 향하는 길, 나와 저세상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사야, 세상이 형!”
“도윤아!”
나는 도윤이에게 후다닥 달려가서는 물었다.
“어제 잘 들어갔어?”
“응, 리사랑 세상이 형은?”
“우리도 잘 들어갔지. 비록, 조금 혼이 나기는 했지만.”
내 말에 도윤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엄청 혼났어. 삼촌이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왜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냐고.”
“흥! 대화로 해결이 안 되니까 주먹 다툼을 한 거지! 그렇게 기죽지마, 도윤아! 우리는 잘못한 거 없으니까!”
“응!”
도윤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세상은 나에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주먹 다툼한 게 잘못한 건 맞지 않아?”
“시끄러, 우리는 잘못한 일 없어.”
잘못한 사람은 우리한테 시비를 걸었던 지희준이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학교로 갈 때였다.
“리사?”
검은 세단에서 내리는 한태극의 세쌍둥이와 만나게 됐다.
“단예야! 단이야!”
“윤리사, 나도 있거든?!”
“단아도 안녕!”
단아의 뺨에는 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어제 가장 격렬하게 싸웠기 때문이리라.
“어제 어땠어?”
“별 일 없었어. 셋째가 할아버지한테 엄청 혼이 난 것 빼고는.”
단예의 말에 단아가 불퉁한 얼굴을 보였다.
“도윤이도 엄청 혼이 났대.”
“리사랑 세상이 오빠는?”
“우리는 괜찮았어.”
윤리오가 잔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윤사해한테 혼이 나지는 않았으니 말이지.
단예는 불퉁하게 말했다.
“할배 미워! 내가 뭐 잘못했다고 그래?”
“맞아, 단아는 잘못한 거 없어.”
나는 심통이 잔뜩 난 단아를 달래 주며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교문을 넘어서기 전.
“야!”
빼액 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홱 들어 보니.
“너희 때문에 어제 외삼촌한테 엄청 혼났잖아! 망할 새끼들!”
사람이 덜 된 지희준이 씩씩거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와, 다가올 용기는 없고 소리를 지를 용기는 있나 봐.”
“그러게.”
저세상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그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 지희준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너희 지금 나 욕하고 있는 거지?!”
“응.”
나와 단아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희준이 분하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리더니 누군가를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단예가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에 겁을 먹은 거다. 지희준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단예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희준아, 너는 어제 혼이 안 났나 보구나? 외삼촌이 AMO의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그분께서 잘려야 정신을 차릴 것 같네.
……라는 뒷말이 생략된 것 같지만 눈치껏 모른 척 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지희준은 단예의 생략된 마지막 문장을 알아차렸는지, 희게 질린 얼굴로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뭐야, 저 자식?”
단아가 지희준의 뒷모습을 보고는 눈가를 찡그렸다. 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단아가 무서워서 도망간 거 아닐까?”
“내가 뭐 어쨌다고?”
“어제 희준이를 가장 많이 때린 사람이 단아잖아.”
“나는 억울해.”
단아가 뚱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저 자식 많이 못 때렸다고!”
그래서 억울한 거였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때, 단예가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미안해져서 도망이라도 간 것 아닐까? 그보다 어서 교실에 가자, 얘들아.”
단예도 은근 무섭다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사이좋게 교실로 향했다.
1학년 4반의 저세상과 단예, 단이와 계단에서 헤어진 후에 나는 도윤이와 단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교실에 들어갔다.
“왔다!”
“리사야!”
그런데 교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입학 첫날부터 4반의 지희준과 싸운 탓에 이야기를 별로 해 보지 못한 1학년 3반 친구들이 나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너희 뭐야?! 당장 윤리사한테서 꺼져!”
단아의 위협에 아이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런 단아를 말리고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친구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남학생이 용기 내서 목소리를 뱉어냈다.
“리사, 너. 윤사해 길드장님 막내딸이라며?”
“그리고 어제 지희준과 싸웠던 비각성자는 네 오빠라고 하던데 정말이야?”
“맞아! 하나도 안 닮았는데!”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비나리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우리 가족에 대한 사실을 꼭 숨겨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숨기지 못해도 최대한 티는 내지 말아야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었는데 말이지.
“……너희,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거야?”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해줬다.
“등교하는데 엄청 잘생긴 형이 너를 찾았었거든! 윤사해 길드장님의 따님이 어디 계신지 아느냐고 말이야!”
“가만히 듣는데 너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 물어본 건데 너 정말 윤사해 길드장님이 네 아버지야? 부럽다!”
“그 비각성자는 진짜 네 오빠야? 오빠인데 왜 우리랑 같이 1학년으로 학교 다니고 있는 거래?”
곳곳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도대체 누구지?’
누가 저런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물어봤냐는 거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예와 단아, 단이랑 도윤이와 함께 등교할 때만 해도 잘생긴 남자 따위 본 기억이 없었다.
‘어떤 자식이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떠들고 다닌 거야?!’
그렇게 이를 까드득 가는데.
“응……?”
잘생긴 남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