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사소하다면 사소한 갈등(4)
이매망량이 위치한 귀수산의 깊은 곳, 사야는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 때문에 화홍이 집을 나가 버렸군요.”
류화홍과 함께 말이다.
탓하는 목소리에 랑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사야, 그 자식이 내게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을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그 자식이라니요, 사위 되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소리세요.”
〖사위라니!〗
랑야가 이를 으득 갈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그런 녀석을 사위로 인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아버지 눈에 흙을 뿌려 드려야 되겠군요.”
〖사야!〗
랑야가 벼락같이 외쳤다. 사야는 키득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한 손으로 벌벌 떨고 있는 금강호를 쓰다듬으면서 말이다.
“그보다 무슨 일로 나오신 거예요?”
〖당연히 너를 보러 나왔지. 윤사해와 거래를 했거든.〗
“무슨 거래요?”
〖훗날, 그 자식 딸한테 달라붙는 놈이 있으면 내가 처리해 줄 테니 한 달에 이틀은 나를 부르라는 거래.〗
“그런 거래를 왜…….”
〖왜겠어?! 류화홍, 그 자식이 너한테 엄한 짓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랬지!〗
“아버지도 참.”
사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류화홍과 백년가약을 맺은 지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가건만, 랑야는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도 류화홍을 집에서 쫓아내 버렸으니…….
‘뭐, 기분 나쁘지는 않으니.’
아버지가 저를 생각해서 그랬다는데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제 부군 되는 사람이 안쓰러울 뿐.
‘당장 내 딸한테서 떨어져!’
‘으악! 알았어요, 아버님!’
‘누가 네 아버님이라는 거야?!’
문득 떠오른 조금 전의 상황에 사야가 심통이 잔뜩 난 랑야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
류화홍이 시무룩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나는 그의 옆에 앉고는 입을 열었다.
“랑야도 참, 인제 화홍이 오빠 좀 인정해 줄 때가 되지 않았어?”
“아가씨, 역시 뭘 아는군요. 그래서 그런데 아가씨께서 랑야 님께 말 좀 해 주면 안 될까요?”
“무슨 말?”
“저 좀 인정해 주라는 말이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화홍이 오빠. 랑야가 화내면 무섭거든.”
“그러니까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없다는 말씀이군요.”
“응.”
“끄흡……!”
류화홍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그러지 말고 형, 랑야 님이랑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지 그래?”
“맞아요, 화홍이 형.”
윤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랑야 님이랑 한 번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그리고 랑야 님이 쫓아낸다고 우리 집으로 오면 어떻게 해? 망부석처럼 버텨야지! 그렇지, 세상아?”
“네? 뭐…… 랑야 님께서도 진지하게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과연 그럴까?
나는 류화홍과 사야의 결혼식 날, 랑야가 류화홍을 향해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을 똑똑히 봤었다.
그러고 보면 류화홍도 참 대단하다.
“화홍이 오빠, 랑야한테 결혼 허락 받지 않았었지?”
“받았었어요.”
류화홍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당일 날에요.”
그러니까 랑야가 오빠를 죽일 듯이 쳐다봤지!
나는 차오르는 말을 애써 집어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인제 와서 묻는 건데. 화홍이 오빠,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던 거야?”
류화홍은 어느새 서른에 접어든 나이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워낙 동안이었고 요즘 같은 시대에 서른이면 한창인 나이였다.
그런데 그는 결혼을 해 버렸다.
그것도 랑야의 딸인 사야. 거주자의 후손인 그녀와 말이다.
내 질문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세상 역시 그 두 사람과 똑같은 눈이었다.
몰리는 시선에 류화홍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말이에요, 사실…… 꼼짝없이 사고 친 줄 알았거든요.”
“무슨 사고?”
류화홍이 머뭇거렸다. 마치, 이걸 말해도 될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그를 닦달했다.
“똑바로 말해 줘, 화홍이 오빠! 무슨 사고를 친 줄 알아서 사야 언니랑 결혼식을 올린 건데?”
“맞아, 화홍이 형. 사람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말해 줘. 혹시, 뭐. 사야 누나랑 애라도 가진 줄 알았어?”
류화홍이 씁쓸하게 미소를 그렸다.
그에 윤리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야?!”
“그때는 진짜인 줄 알았어.”
류화홍이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남들한테 비밀로 하고 사귀고 있었는데 사야 누나가 그러는 거야. 달거리를 안 한다고.”
달거리라면 그거지?
여자라면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빌어먹을 것.
“그때 나는 몰랐어. 거주자의 직계 후손은 달거리든 뭐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그러니까 그건.”
“사야 누나한테 속았었다는 거지!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 결혼 후에 알았지.”
류화홍이 시무룩하게 웅얼거렸다.
“사야 누나가 저보다 한참 어린애가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난리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대.”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사야 누나랑 이렇게 결혼했으니까 괜찮아.”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류화홍이 세상을 얻은 듯한 얼굴을 보였다. 사야랑 결혼하게 저렇게 좋나 싶었다.
“화홍이 오빠가 먼저 사야 언니한테 사귀자고 한 거였지?”
“네, 맞아요.”
류화홍이 수줍게 목소리를 내었다.
“처음 이매망량에 입단했을 때부터 첫눈에 반했었거든요. 거주자의 후손인 것을 알고 고이 마음을 접었었는데…….”
사야가 자신이 저를 좋아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은근슬쩍 놀리더란다.
“그래서 홧김에 사귀자고 했죠.”
“술 왕창 마신 날에 그랬었죠?”
“그때 화홍이 형 엄청 재미있었는데! 나 형이 그렇게 패기 넘치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잖아~!”
“리오, 리타. 조용히 해 줄래?”
류화홍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는 얼굴을 보였다. 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끝이 좋아서 다행이야.”
“맞아요, 형. 두 분 볼 때마다 보기 좋아요.”
저세상이 내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그나저나 류화홍이 나타나서 다행이었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나와 저세상이 학교에서 싸우고 돌아왔었다는 걸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에일린 리의 선물을 확인한 윤리타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류화홍에게 물었다.
“형, 그럼 사야 누나랑 2세 계획은 없어?”
“윤리타, 너는 그런 걸 왜 물어봐? 화홍이 형 곤란하게.”
“아니야, 괜찮아.”
류화홍이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활짝 웃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만 알고 있어. 혹시라도 랑야 님한테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알면 나 진짜 죽어.”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나 했는데.
“올 여름에 너희 조카 나올 거야.”
엄청난 비밀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
-우우, 우우우.
-우우우, 우우.
랑야가 짧게 혀를 차고는 주위를 살폈다. 하나뿐인 딸아이의 집 주위로 수많은 혼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 빌어먹을 귀수산은 어째 변하는 것이 없어. 그 자식은 제대로 관리를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그나마 그분 덕분에 저렇게 울기만 하고 있는 걸요? 아니었으면 이곳에서 못 살았을 거예요.”
그 말에 랑야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네가 여기에서 살지 않았으면 하는데. 류화홍, 그 자식은 불만이 없더냐?〗
“없던데요.”
제 말이라면 아주 껌뻑 죽는 류화홍이었다. 덕분에 요즘 사는 것이 즐거운 사야였다.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제철에 알맞지 않은 과일이라도 달고 맛있는 것으로 가져다주는, 참으로 참한 남편이었다.
그뿐이랴?
손발이 저리면 주물러 주고, 기분이 나쁠까 싶으면 어떻게든 제 기분을 풀어 주려 아양을 떨어댔다.
자신이 임신이라도 한 줄 알고서 어떻게든 책임져 주겠다고 엉엉 울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때, 참 귀여웠는데.’
사야가 지난날을 떠올리다 문득 제 배를 쳐다봤다.
품이 큰 옷을 입고 있던 터라 배가 부른 티는 나지 않았지마는.
“아버지.”
〖응?〗
“혹시, 저한테서 이상한 것 못 느끼셨나요?”
〖못 느꼈는데? 다만.〗
다만?
옅게 피어오른 그림자가 랑야의 몸을 휘감았다. 이내 드러난 건 끝이 붉은 은백색의 털을 지닌 한 마리의 늑대였다.
랑야가 사야한테 다가와서는 코를 킁킁거렸다. 두 귀 역시 쫑긋 세우기까지 했다.
〖너한테서 낯선 냄새가 나는구나.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옛날에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인데…….〗
목소리의 끝을 흐리던 랑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사빈한테서 맡은 적이 있는 냄새야.〗
사빈, 그건 사야의 어머니 되는 자의 이름이었다.
〖분명 너를 가졌을 때 이런 소리와 이런 냄새가 났었지. 그래, 그랬는데 말이다.〗
랑야가 떨떠름한 얼굴을 보였다.
〖왜 너한테서 그 소리와 그 냄새가 나고 있는 것이냐? 아니지, 사야? 제발 아니라고 해.〗
“무엇을요?”
〖류화홍, 그 새끼의 애를 밴 것이 아니라고 하란 말이다!〗
“아버지…….”
사야가 싱긋 웃었다.
“손주한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애가 들어요.”
랑야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