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나는 아직 어린아이(3)
어쨌든, 윤사해는 장천의를 만나러 집을 나섰다.
에일린 리가 보낸 선물이야, 아무리 빨라도 내일에 오겠거니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CW 백화점은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설마, 오늘 휴무일인가?’
하지만 윤사해는 곧 이열 종대로 서 있는 종업원들을 보고는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장천의를 보고서 윤사해는 깨달았다. 장천의가 자신을 위해 백화점을 통째로 빌렸다는 것을 말이다.
‘쓸데없는 짓을.’
윤사해가 짧게 혀를 차고는 장천의에게 다가갔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뭐하는 짓이기는요? 고객님을 향한 제 마음이 보이지 않나 봅니다?”
“안 보인다만.”
“슬프군요.”
장천의가 눈물을 닦는 척, 손가락을 들어 눈가를 꾹꾹 닦고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고객님의 통이 워낙에 크지 않습니까? 오늘 저희 백화점 매출 신기록 달성을 부탁드립니다.”
“그 신기록, 내가 옛적에 달성한 거 아닌가?”
“고객님께서 세운 기록은 7년 전에 깨졌었답니다.”
그 말에 윤사해가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가.
“고객님의 자녀분들이 부순 기록이었지요. 그때 정말 대단했습니다.”
제 아이들의 이야기에 윤사해는 얼굴을 풀었다. 그에 장천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 알기 쉬운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자, 어쨌든. 오늘 저희 백화점 신기록 매출 달성 부탁드립니다.”
“싫다만.”
“네?”
장천의가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사해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세운 기록이라고 했지 않나?”
그러니까 싫다는 거였다. 장천의가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는 듯한 얼굴로 윤사해를 쳐다봤다.
윤사해는 그저 태연히 말했다.
“대신, 아이들이 세운 기록과 똑같은 기록을 세우도록 하지.”
장천의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렴요!”
당시 윤사해의 아이들이 세웠던 신기록의 매출은 억을 가볍게 넘기는 금액이었다.
장천의는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윤사해를 고급 브랜드 명품 매장으로 데리고 갔다.
“리오 군과 리타 군의 선물도 살 생각입니까?”
“리오랑 리타의 선물은 직접 데리고 와서 사겠네. 아이들에게 무기를 하나씩 쥐여 줄 생각이라.”
“좋지요.”
윤사해와 그의 아들들이 즐겨 찾는 브랜드는 12공방에서 세운 곳으로, 고급 브랜드가 늘어져 있는 CW 백화점 내에서도 비싸기로 소문이 난 곳이었다.
‘장인들이 좋아하겠군.’
장인이라고 하면, 12공방을 이끌고 있는 열두 명의 대장장이들을 말했다. 윤사해가 입고 다니는 두루마기 코트 역시 그들의 작품이었다.
어쨌거나 장천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돈을 굴리며 윤사해를 고급 브랜드 점으로 안내했다.
시선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고객님? 저를 왜 그렇게 불타는 시선으로 보십니까?”
“새삼스러워서.”
“뭐가 말입니까?”
“장천의 회장, 자네는 바쁜 몸이지 않나? 몇 달 전만 해도 얼굴 보기 그렇게 힘든 양반이더니…….”
윤사해가 답지 않게 싱긋 웃었다.
“이렇게 내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새삼스러워 말이네.”
“하하! 고객님을 위해서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저, 장천의입니다.”
“최설윤 길드장에게도 그러는 것으로 안다만.”
“최설윤 길드장님께는 있는 시간도 모두 가져다 바쳐야지요!”
장천의가 넉살 좋게 웃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도착했습니다, 고객님. 요즘 10대, 20대 사이에서 아주 인기인 매장입니다.”
하나를 잡으면 기본 천은 호가하는 상품들이 늘어진 곳.
하지만 윤사해에게는 막대 사탕 하나를 잡는 거나 다름없는 가격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이들이 제 선물을 받고 좋아할 얼굴을 떠올리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
오싹, 갑자기 소름이 일었다.
나는 괜히 양팔을 문지르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앞으로 펼쳐질 학교생활에 설레어하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뿐이었다.
“리사, 갑자기 왜 그래?”
“윤리사, 추워? 옷 벗어 줄까?”
“아니야, 괜찮아.”
나는 도윤이와 단아의 걱정을 뒤로 하고는 옆 반을 흘긋거렸다.
1학년 4반, 가장 앞에 단예와 단이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1학년 4반의 반장과 부반장은 단예와 단이가 됐나 보다.
하긴, 두 사람은 중학교 3년 내내 학급 인원을 도맡았었다. 서로 나란히 학생회장과 부회장도 했었지.
‘저세상은 어디 있지?’
단예와 단이의 뒤에 서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1학년 4반 친구들을 한 명씩 살펴보며 저세상을 찾고자 했다.
“저세상, 저 뒤에서 뭐하고 있대?”
“어디? 저세상 어디 있는데?”
“저기에.”
단아가 저세상의 행방을 가르쳐줬다.
저세상은 뒷줄에 있었다. 차림새가 꽤 나빠 보이는 녀석들과 함께였는데…….
“저 새끼들 뭐야? 왜 저세상을 발로 차고 있는 건데?”
“그러게, 저 새끼들 뭐지.”
나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윤리오와 윤리타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욕을 시작했다. 단아는 그냥 대놓고 욕설을 내뱉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단예와 단이가 단아를 타일렀지만, 그 두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는 단아였다.
어쨌든.
“입학식 끝나고 단예랑 단이한테 한 번 물어보자.”
“아니, 지금 물어볼래.”
조금 간격이 있지만, 단예와 단이의 바로 옆에 서 있는 나였다. 나는 제인 아일리의 눈치를 살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단예야, 단이야.”
“리사?”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있잖아, 저세상만 왜 뒤에 서 있어? 걔랑 같이 있는 애들은 뭐고?”
내 물음에 단예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었는데, 하지만 리사. 입학식 끝나고 이야기 나누지 않을래?”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마침 입학식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쩌렁쩌렁하게 강당을 울렸다.
결국, 나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은 별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이 됐다. 입학 고사 수석에 오른 단예와 차석인 단이가 강당 위에 올랐다.
“우와! 한단예, 한단이! 너희 둘 다 재수 없어!”
단아가 단예와 단이를 향해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냈다. 나와 도윤이는 있는 힘껏 손뼉을 쳐 줬다.
“다음은 외빈 분들의 축하 인사가 있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등장한 사람은 서차웅이었다. 윤사해를 대신해 입학식에 참석할 거라고 하더니.
단상 위에 선 서차웅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매망량의 윤사해 길드장님을 대신하여 참석한 서차웅이라고 합니다. 먼저…….”
서차웅이 목소리의 끝을 흐리더니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잠깐만, 카메라는 왜 꺼내든 거지?
그는 그대로 셔터를 눌렀다. 찰칵! 울리는 소리와 함께 서차웅이 다시 한 번 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윤사해 길드장님께서 미래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인재 분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찍어 오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이 분명했다.
‘윤사해, 설마 나랑 저세상을 찍어 오라고 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려는데, 순간 서차웅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서차웅은 짧고 가볍게 비나리 고등학교의 신입생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대한민국의 명문 비나리 고등학교에 입학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훗날, 같은 이매망량의 사람으로 함께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우와아!
우렁찬 함성이 강당을 울렸다. 이매망량의 인기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괜히 뿌듯해졌다.
입학식은 마지막으로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으로 끝을 맺었다.
“자, 1학년 3반 친구들! 먼저 반으로 돌아가 있으세요!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요!”
선생님들끼리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한데 어우러져 강당을 빠져나갔다.
단예와 단이를 만나 저세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오! 싹 다 쓸어 버리고 싶어!”
“안 돼, 단아야. 참아.”
신입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강당 입구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나와 단아, 도윤이는 서로 헤어지지 않기 위해 손을 꼭 잡았다.
어차피 헤어진다고 해도 교실에서 바로 만날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야, 얘가 바로 그 유명한 비각성자 중 한 명이래!”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 중 비각성자는 다섯 명 뿐이라고 들었는데, 그 중 한 명인가 보네.”
질 나빠 보이는 녀석들이 저세상에게 어깨동무를 하고서 킬킬거리는 걸 말이다.
그에 나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단아와 도윤이는 저 광경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봤더라면 난장판이 벌어졌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나는 저세상에게 곧장 다가가고자 단아와 도윤이의 손을 놓았다.
“리사야?”
“윤리사?”
두 사람이 나를 불렀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인파를 피해 저세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리사야.”
단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잠깐만, 단예야. 저기 저쪽에.”
“알아.”
단예가 나를 끌어 당겼다.
“알아서 자리를 피하자고 하는 거야. 세상이 오빠가 그걸 원하거든.”
나는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단예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저세상이 왜 그런 걸 원하느냐고 소리쳐 묻고 싶었지만.
질 나쁜 무리 한가운데에 있던 저세상과 시선이 마주친 나는 결국 단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단예의 말대로, 저세상이 그걸 원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까드득, 나도 모르게 이가 갈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