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돌아와요, 아빠!(5)
“안녕하세요, 아저씨!”
내 인사에 장천의가 무릎을 굽히고는 물었다.
“분명, 리사 양께서는 저를 ‘삼촌’이라고 불러줬던 것 같은데 왜 다시 ‘아저씨’가 됐을까요?”
“그러고 싶어서요!”
“아하, 결국 아무 이유 없다는 거군요.”
“네!”
장천의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때, 그를 놀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으니.
“장천의 회장, 애한테 그렇게 ‘삼촌’ 소리를 듣고 싶어?”
최설윤이었다.
“안녕, 얘들아. 얼마 전에 화백이랑 같이 여름 휴가 다녀왔었지?”
“안녕하세요, 최설윤 길드장님.”
“그래, 리오랑 리타는 이제 다 컸네? 어릴 적에는 언제 크나 싶었는데, 세월 참 빠르단 말이야.”
최설윤이 윤리오와 윤리타를 보며 흐뭇하다는 듯이 웃었다.
“장천의 회장, 그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장천의가 너무하다면서 우는 소리를 내는 한편, 최설윤은 우리를 보며 물었다.
“뭐 사러 왔니?”
“아빠 선물이요.”
“윤사해 길드장의 선물?”
“네.”
윤리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 곧 돌아오신다고 해서요. 미국에서 몸을 잘 안 챙기셨을 것 같아서 이것저것 사드리려고요.”
우리가 고른 ‘이것저것’에는 야외 온천탕과 스파 세트, 이번 달의 모든 신간 책과 고급 브랜드의 안마 의자가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윤리오는 카드를 더 긁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에 최설윤이 싱긋 웃었다.
“윤사해 길드장이 기뻐하겠네.”
저기요, 최설윤 길드장님. 하실 말씀은 그것뿐입니까? 윤리오와 윤리타의 경제 관념에 대해 일러줘야 할 것 같지 않나요?
“우리 바보 같은 조카님도 너희처럼 나를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최설윤은 그런 마음은 들지 않나 보다.
장천의는…….
“이번에 4, 50대 중년 남성을 대상으로 인기가 많은 신규 브랜드점이 입점했는데 가보셨습니까?”
오히려 윤리오와 윤리타의 돈지랄을 환영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하긴, 장천의는 CW의 주인.
이곳, CW백화점에서 돈 쓰는 것을 무척이나 환영할 양반이었다.
장천의의 말에 윤리오와 윤리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천의 삼촌! 지금 당장 가볼게요!”
“리사, 세상아! 가자!”
윤리오와 윤리타가 장천의와 최설윤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나와 저세상은 심드렁한 얼굴로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리사 양, 세상 군.”
장천의가 나와 저세상을 멈춰 세웠다. 그는 그대로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나는 속 편하게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웃었다.
“아저씨도요! 최설윤 길드장님께서 아저씨랑 놀아주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사이 좋아 보이거든요!”
“…….”
장천의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저세상의 손을 잡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있잖아, 세상이 오빠.”
“응?”
“저 아저씨는 보면 볼수록 재수가 없는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저세상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너랑 같아. 보면 볼수록 재수가 없어.”
저세상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장천의와 저세상은 왜 저렇게 서로를 싫어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장천의는 저세상을 싫어한다기보다는…….’
경계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도 왜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간에.
“리사, 세상아. 한눈팔지 말고 빨리 따라와!”
“네에!”
나는 윤리오와 윤리타의 돈지랄을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
윤리사가 오빠들과 함께 자리를 떠난 후, 장천의의 두 눈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최설윤이 웃는 낯으로 그에게 말했다.
“장천의 회장, 애들한테 한 방 먹었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최설윤 길드장님? 제가 먹기는 뭘 먹었다고요.”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최설윤이 키득거리며 웃고는 장천의에게 물었다.
“애들한테 왜 그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로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붉은 눈이 장천의의 얼굴을 빤히 담았다. 장천의는 그 시선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그냥…….”
흐려졌던 목소리의 끝이 이내 선명해졌다.
“재미있어서요.”
저 두 사람의 관계가.
장천의는 치밀어 오른 말을 애써 집어삼켰다. 우웅,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장천의가 최설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곧 메시지를 확인한 장천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최설윤 길드장님.”
“응?”
장천의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면서 최설윤에게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보여줬다.
최설윤이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놀란 눈을 보였다.
“뭐야, 장천의 회장. 정말이야?”
“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라는군요. 여기, 고객님을 찍은 사진이 안 보이십니까?”
“보여! 보여서 묻는 거야!”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최설윤의 모습에 장천의가 키득거리며 웃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을 줄 모양입니다.”
그 말에 최설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 참, 재미있는 집안이라니까?”
“그렇지요?”
장천의의 시선이 윤사해의 자녀들이 떠난 곳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재미있었다.
***
“일시불로 그어주세요.”
“네, 손님.”
이번에도 일시불이다.
결국, 윤리오와 윤리타는 장천의가 가르쳐준 신규 입점 브랜드 점에서 모든 물건을 싹쓸이했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그렇게 막 사도 돼?”
“응? 응, 괜찮아! 알고 보니까 여기, 12공방에서 세운 브랜드더라고! 품질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돼!”
“그리고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 바로 12공방에서 나오는 것들이거든!”
저기요, 제 말은 그렇게 막 돈을 써도 되냐는 거였는데요.
‘뭐, 상관없나?’
윤리오와 윤리타가 아무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카드를 긁어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저 카드, 자기네들 용돈에서 나가는 거였지?’
제 돈 제가 쓴다는데 내가 말리는 것도 이상했다.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고 마음 편안하게 쌍둥이의 돈지랄을 구경하기로 했다.
“윤리타, 이제 살 거 다 샀어?”
“응, 그래도 이왕 나온 김에 리사랑 세상이 옷 좀 보자.”
“좋아, 이제 가을이니까 가을 옷 좀 사놓자.”
아니야! 나 옷 많아! 많다고! 작년 이후로 1cm도 크지 않아서 그 옷들 그대로 입어도 된다고!
나는 황급히 말했다.
“나는 괜찮아! 세상이 오빠 옷만 사도 될 것 같은데?”
암만 윤리오와 윤리타가 긁고 있는 카드가 두 사람의 용돈에서 나가고 있는 거라고 해도 말이지.
‘적당히 쓰라고!’
돈 아까운 줄 모르는 부잣집 아들 녀석들아!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눈여겨보았던 매장의 위치를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겼다.
“카디건 예쁜 거 많이 나왔다는데. 이번에 몇 벌 사놓자.”
“세상이 옷은 완전히 새로 싹 다 사야 해. 1년 사이에 훌쩍 자라 버려서 옷이 다 작더라고.”
“리사는 키가 안 컸지?”
“응, 1cm도 안 컸어.”
강조하지 마, 윤리타!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저세상이 그런 나를 보고는 키득거렸다.
분명, 나와 엇비슷했던 주인공님이셨는데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두고 봐, 저세상.”
“뭘 두고 봐?”
“네 키, 내가 꼭 따라잡고 말 거야! 그러니까 두고 보라고!”
저세상이 어디 한번 열심히 키 커 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재수 없어!
“우리 리사, 한약이라도 먹여야 할까? 또래에 비해 너무 작은 것 같아.”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두고 보자. 안 되면 먹이고.”
윤리오와 윤리타의 대화 주제가 어느새 내 키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는 빼액 소리 질렀다.
“나 꼭 키 클 거야! 저세상 따라잡을 거라고!”
“그래, 리사. 그러려면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되는 거 알지?”
윤리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뚝, 걸음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리오 오빠?”
윤리오는 움직일 생각을 않고 앞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윤리타 역시 마찬가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빠?”
윤사해가 있었다.
나는 황급히 두 눈을 비비고는 다시 앞을 쳐다봤다. 내가 본 것이 환상이 아닐까 싶어서다.
하지만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얘들아.”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아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윤사해였다. 멈췄던 걸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다다 윤사해를 향해 달려갔다.
“아빠아!”
“아버지!”
윤사해가 돌아왔다.
한 달하고도 보름, 그 시간이 훌쩍 지난 후의 만남이었다.